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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이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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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637회 작성일13-06-2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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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거듭나야 하겠다"(1)
작성자:알프레드 P. 깁스
제1장

먼저 "거듭남"이라는 주제에 대해 부정적인 것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듭남이 아닌 것.
이 주제에 대해 살펴보려면, 거듭남에 대해 다루고 있는 성경적인 사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을 펴서 10절부터 13절까지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즉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첫 번째, 거듭남은 "혈통으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거듭남은 인간의 혈통을 따라서 임하거나 육체적인 출생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느 누구도 이러한 거듭남을 그 부모가 참으로 거듭난 사람일지라도 자기 부모로부터 상속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정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 자동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난 각 사람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간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로서" 나야 합니다.

두 번째, 거듭남은 "육정으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 말은 거듭남이 자신의 노력이나 스스로 결정하는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굳게 결심한다 해도, 자기 스스로는 이러한 거듭남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것도 사실은 우리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아무 사람도 자신의 육체적인 출생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았을지라도 우리 육신의 본성을 우리 육신의 부모들로부터 육체의 출생이라는 과정을 거쳐 물려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적인 출생이라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게 하신 모든 자들에게 신령한 본성을 물려주십니다. 이 일은 확실히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 번째, 거듭남은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 말은 인간의 개입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 사람도 다른 사람 속에 거듭남을 일으키거나, 혹은 생명을 나눠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러한 특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육신의 부모를 통하지 않고서 아무도 육체적인 출생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오직 한 분, 이러한 거듭남의 과정을 통해 하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영적인 출생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비록 도덕적으로 탁월한 사람도, 종교심이 높은 사람도, 신학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이러한 거듭남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러한 영적 출생의 역사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비록 기독교계에서 최고의 성직자의 자리에 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만이 이러한 거듭남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분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위 성직자들의 집행하는 예전이나 예식을 통해 영원한 축복의 소망을 얻고자 하는 현실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 인지요! 아마도 그러한 사람들은 세례(영세)와 교리문답과 견진례와 성체를 받았고, 교회의 회원으로 등록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다 거친 사람들은 이제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거듭난" 사람으로 상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인간 대리자를 통해 이 모든 일을 다 한다할지라도 결코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드리건대, 거듭남은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네 번째, 거듭남은 '육체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물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4절) 이 질문은 니고데모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에 대해 전적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생각을 바로 잡아주시면서, 거듭남은 그가 말한 것처럼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출생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거듭남은 사람의 육체의 몸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사람이 거듭나기 이전에 근시안이었다면,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근시안인 것입니다(거듭난 경험이 근시안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구인 사람은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불구로 살아야 합니다. 불치의 암에 걸린 사람이 거듭났을지라도 갑자기 낫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서 육체적인 변화에 대한 기대일랑 모두 버려야 합니다.

다섯 번째, 거듭남은 '사회적인 신분의 변화'가 아닙니다.
거듭남은 노동자를 갑자기 이 세상의 권력과 부와 높은 신분의 자리로 승진시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벽돌공, 도장공, 목공, 속기사 등등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야 합니다(고전 7:20-24). 거듭남이 사람에게 일으키는 변화는 그 사람이 남자이건 여자이건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골 3:22-24) 하기로 힘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거듭남은 '지리적인 이동'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거듭나자마자 하늘나라로 옮겨지거나, 한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지리적인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변화된 삶을 통해 자기 영혼 안에 하나님이 일으키신 신령한 역사에 대한 산 증인으로써 거듭남을 증거하기 위해, 거듭난 그곳에 남아있게 됩니다.

일곱 번째, 거듭남은 "거듭남(born again)"이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한 이해나 지적인 동의를 통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에 대해 이론적으로 잘 안다 할지라도 실제적인 경험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필자는 전적으로 육체적인 출생과 관련해서 이 땅에서 결코 되어질 수 없는 두 가지 일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먼저, 저는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미국 대통령의 신분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만이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저는 대영제국의 황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황족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황태자의 보좌에 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혹은 황태자의 임무에 대해 연구하고, 불철주야 공부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육체적인 출생이라는 필수적인 조건을 갖추지 않는 한, 결코 위의 두 가지 신분은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신학교에서 수년동안 성실히 공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조직신학과 같은 과정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자가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중에 거듭난 경험이 없는 분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거듭난 적이 없는 어떤 목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거듭남에 대한 설교를 마치자, 그 교회의 어떤 성도가 찾아 와서, 한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거듭남에 대해 설교하셨는데, 정말 거듭난 경험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 질문을 사용하셔서, 그 목사의 영혼을 일깨우셨고, 자신이 거듭남을 경험해본 일이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거듭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오늘날 최대의 비극 가운데 하나는 허다한 소위 "성직자들", 즉 신학적인 훈련을 받았고, 교양있고, 도덕적으로 탁월하고, 학식이 있고, 품위가 있고, 온화하고, 위선적인 것이 없는 사람들이 거듭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이었던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는 그가 거듭나기 전에 수년동안 성직자로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거듭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채, 30년 혹은 40년을 설교해온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거듭남이라는 조건이 있음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한번은 위대한 설교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슬픈 광경은 영적으로 죽은 설교자가 죽은 청중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여덟째, 거듭남은 일종의 '발전 과정'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거듭남은 이미 거듭난 사람 안에 존재하고 있는 영적 생명의 점진적인 발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발전 혹은 진보"라는 용어에 대한 콩트(Le conte)의 정의를 살펴보면, 우리가 의미하고 있는 바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이 될 줄로 압니다. 그는 그것을 "정해진 규칙이나 내재된 힘이 작용함에 따른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로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육체적으로 그 안에 신성한 생명의 싹을 가지고 태어나며, 거듭남이 일어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점차적으로 진전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인으로 발전될 때까지 이러한 영적인 싹이 계속해서 자라나는 것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론은 하나님의 말씀 그 어디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확증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영적인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하나님은 거듭남을 가리켜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혹은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라는 성경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생명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그 위에서만 발전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시체에게서 생명을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교육과 수련도 죽은 사람의 몸 속에서 육체의 생명을 발전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장의사는 시신에게 향품을 바르고, 종교적인 수의를 입히고,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화장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생명을 나눠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모든 수고와 노력 끝에는 장례식이 거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생명이 죄인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이신 오직 하나님만이 이러한 일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러한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의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이러한 사례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아홉 번째, 거듭남은 '개선'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나뭇잎의 색깔을 바꾸는 것과 같이 단순한 외적인 변화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은 확고한 결심을 통해 외적인 행동은 바꿀 수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을 통해서 나쁜 습관을 끊거나, 좋지 못한 언어생활, 도둑질, 음주벽, 마약중독, 도박, 그 외에 정결하지 못한 삶의 모습 등을 청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결단코 거듭남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외적인 습관들이 개선이 되고, 훌륭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에는 추호의 의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성, 그 사람 자체는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으며, 변화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개선한다는 것은 마치 새로운 양복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양복에 맞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개선과 거듭남의 차이는 하얗게 페인트 칠하는 것과 아예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 사이의 차이와 같습니다. 벽에 잉크 얼룩이 묻어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만일 벽을 하얗게 칠한다면 그 얼룩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그 얼룩을 씻어낸다면, 그 얼룩 자체가 벽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개선을 통해서 죄나 죄인들을 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결과적으로 죄의 얼룩 자체를 완전히 씻어내게 됩니다.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washed us: 씻어 주시고)…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계 1:5-6). 거듭남은 나뭇잎의 색이 새롭게 변하는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얻는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자신의 행실을 개선시켜 간다 할지라도 그 결국은 요한계시록 20장에 있는 크고 흰 보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은 심판과 불못뿐 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개선은 외적인 것과 관계가 있고, 거듭남은 내적인 실체와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개선이 사람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라면, 중생은 그 사람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열 번째, 거듭남은 '종교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와 참된 기독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 끼어 있습니다. 종교는 사람이 고수하고자 하는 신앙의 형식과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는 한 분의 인격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곧 그 한 분의 인격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이 한 분 그리스도와의 살아있고 생명으로 충만한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매우 다양한 종교가 있지만, 이처럼 참된 기독교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은 참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그 자체이다."

어떤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도 "종교를 갖는 것"은 가능합니다. 오늘날 널리 확산되고 있는 대중적인 복음주의는 단지 종교의 히스테리적 분위기를 생성하는데 이바지할 뿐입니다. 열광적인 설교자에 의해 생성된 감정적인 흥분 상태 속에서 잘 조작되고, 교묘한 심리적인 호소가 이어지게 되면, 허다한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손을 들게 되고", "앞으로 나오게 되며", "서명란에 이름을 적게" 되므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명목상의 기독교"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믿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진지하게 해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정말 거듭나셨습니까?" 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만이 성령님의 권능으로 하실 수 있는 거듭나는 역사를, 순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시도하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기만하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행해진 돌이킬 수 없는 해악으로 인해 큰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러한 일의 실제적인 시험은 구원받았노라고 말하는, 6개월이나, 혹은 그 이상된 사람들을 방문해보고, 영적인 생명이 그들의 삶 속에 나타나고 있는지 그 증거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따르는 명백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즉 그러한 증거들에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대한 갈망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교제를 사모해서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이 있고,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봉사에 대한 열망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았노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영적인 생명이 있는, 혹은 중생을 경험한 이와 같은 실제적인 증거들이 없는 것으로 인해 큰 염려가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종교"는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고백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것"은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도 모든 종교적인 의식과 종교적인 행사들, 그리고 체계화된 신앙고백들을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계의 모든 신조들을 암송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떠한 교리문답에도 정확하게 대답하고, 세례와 견진례도 받고, 각자 나름대로 좋은 교회를 택해서 입교하기도 하고, 만찬에 참여하기도 하고, 주일학교의 반사가 되기도 하고, 교회의 직분을 받기도 하고, 마침내 성직수임을 받아 설교도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고도 말입니다!

진실하고, 종교적이며, 존경받을만한 많은 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들어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에 대해 선언하신 거듭남을 경험해본 일이 없다고 하는 현실은 너무도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 찬송가를 지은 작가가 한 말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절실하게 와닿습니다.

"너희 사람의 아들들아,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곧 주 예수님이 엄숙하게 하신 말씀이라 이 말씀을 너희 귀에 헛되이 듣지 말지니 곧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것이라!"

"거듭난 경험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저도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린시절부터 종교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조금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영생의 축복이 보장된 것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그렇게 상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신앙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고, 또한 자신의 마음이 변함이 없이 신실하기만 하면, 결국에는 하늘나라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믿는바에 따라 지조있게 살면서, 자신이 성실하다는 것만 증명한다면, 무엇을 믿든지 상관없지 않겠어요."

우리 잠시 이러한 철학적인 사고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확인해봅시다. 여기 어둠 속에서 찬장 쪽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감기약이 담긴 병을 찾고자 한다고 해봅시다. 그는 그 병에 감기약이 들어있는 것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그는 그 병을 자신의 입 속에 갖다 대고는 의사가 정해준 양만큼 꿀꺽 삼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마신 병에는 치명적인 독약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성실한 믿음이 과연 독약의 치명적인 효과를 없앨 수 있었나요? 이러한 성실함이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했습니까? 신문에서 종종 그러한 비극적인 기사를 보고 있지만, 아무도 그러한 사고의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 놀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사람이 성실하면 할수록, 자신이 잘못되었을 때, 그 결과는 더욱 피할 수 없을뿐더러, 더욱 비극적이기 마련입니다! 진실하게 되는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동시에 진실로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이 시점에서 각자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영생의 복된 소망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옳다고 믿는 모든 진실한 분들에게,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이 말씀은 자기 시대에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진실되며, 또한 가장 도덕적인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거듭남이 단지 외적으로 불경건하고, 비도덕적이며, 범죄자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사회의 하류층에게만 하신 말씀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격을 가하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교의 탁월한 교사이자, 예루살렘에서 크게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교의 최고 법정이자, 이스라엘 민족의 통치기관인 산헤드린의 회원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종교적인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크게 도덕적이고,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가장 신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구주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깊이 바라보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그때 니고데모는 마지못해 하며 그저 웃어넘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참으로 등뼈없는 물고기같이 흐물흐물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의심에 찬 목소리로 그러나 나지막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수 있삽나이까?(4절)" 그리고 또다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하고 물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물었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여러분에게 기쁘게 답변해 드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거듭남에 대해 왜 필요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언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답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에 대한 확실하고 명쾌한 결론은 다음 장에서 다루고자 합니다. 니고데모가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도덕적이었으며, 또한 진실하였음에도 거듭날 필요가 있었다면, 제 자신과 당신을 포함한 그밖에 모든 사람들도 거듭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알프레드 P. 깁스. 성경교사로서 많은 가르침을 전해 주었으며 대표적인 저술로는 <설교자와 그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의무 예배>, <주님의 만찬>, 등 그외 다수가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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