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사함이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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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087회 작성일13-06-21 00:21본문
작성자:C. H. 매킨토쉬
하나님의 권위로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를 원하면서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 말씀 안에서 죄사함의 과제를 계속 풀어 나가도록 합시다.
다음 3가지 항목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
둘째, 하나님의 죄사함의 양(크기)
셋째, 하나님의 죄사함의 방법(형태)
위의 열거한 세 개의 항목은 우리가 이 과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분명하고도, 충분하고, 명확한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먼저 죄사함의 기초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면, 더욱 죄사함의 양(크기)에 감사하게 될 것이요, 또한 죄사함의 방법을 더 알기를 원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를 상고하는 동안 계속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
죄 때문에 염려 속에 있는 독자들이 이 귀한 진리를 이해하여야만 한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취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사함의 기초가 확실히 깨달아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난 심령(양심)이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관해서 인간은 모호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즉 죄인을 영접하려는 하나님의 준비, 죄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 심판의 자리에 보내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뜻, 그리고 속히 죄인을 은혜의 장소로 보내려는 하나님의 안타까움 등,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인간은 모호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유죄로 판명난 자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운 분이시면서도 구세주로 계시고, 또 죄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얼마나 깨끗한 분이시면서 하나님의 속성이 얼마나 이 모든 것을 조화시켜 왔는가를 알기 전에는 진실로 깨우침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화평에 대해서 문외한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유죄를 선포하실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우리 양심에 부어지면 죄는 절대로 하나님의 존전에 그냥 나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죄는 어느 곳에서 발견되든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에서만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방법이 이해되고 믿어지기 전에는 심한 염려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심판도 실제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알아져야 하고 정식으로 상고되어야 합니다.
공의는 만족되어야 합니다. 양심은 깨끗함을 입어야 합니다. 사탄은 잠잠케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귀한 구속 사역은 공의의 하나님과 칭의(稱義)를 받은 죄인의 달콤한 밀월을 즐길 수 있는 기초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구속 사역 속에서 저주받은 죄를 보게 되고, 공의가 만족해하는 것을 보게 되고, 율법의 중요성을 보게 되고, 죄인이 구원받는 것을 보게 되고, 원수 마귀가 당황해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조 시에는 이런 것을 결코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피조물들이 표면에 나타난 능력과 지혜와 선양(goodness)을 즐겼으나, 첫 창조는 공의를 통과한 은혜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공의와 화평" 또는 "자비와 진리"의 아름다운 조화 같은 것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갈보리에서 보여지도록 예비해 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점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공의롭고 의로운 분이신가요?
하나님은 영광스런 해답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해답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다루었습니다.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이 새롭고 영원한 부활의 기초 위에서 죄인을 다루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점 일획의 죄라도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제거하실 수는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 위에 의로운 진노를 퍼부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믿는 죄인(구원받은 성도)위에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모든 기록은 장엄하도다. 죄는 심판 받았고, 죄인은 구원을 얻었도다"
귀한 말씀입니다. 두려워하는 모든 죄인들은 믿음의 눈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음에 안정된 평화를 주는 진리의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도 만족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나도(믿는 사람) 만족합니다. 여기서 나의 죄스럽고 고통스런 양심은 달콤한 쉼을 발견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앞에 검은 산 그림자같이 증대해 가는 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영원한 진노로 나를 위협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혈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그 모든 죄들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 모든 죄는 사라진 것입니다.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납덩이처럼 하나님의 망각의 수렁 밑바닥에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나는 이제 자유자 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 때문에 못 박히셨고, 이제는 일점의 죄도 없이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그분의 자유를 나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인 것입니다. 얼마나 굳건한 기초입니까? 누가, 무엇이 그것을 간섭할 수 있을까요? 공의는 그 기초를 확보했습니다. 고통의 양심은 그 안에서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공의자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계시의 빛과 능력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단순하고 확실하고 만족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공의자로 계시하신다면 나는 그 계시된 말씀 속에서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적 영광이 죄인에게 비췰 때, 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를 심판하신 분이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죄인을 의롭다 하셨음을 보게 되고, 깨닫고, 믿고,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가득찬 독자들이여! 간청하노니 죄사함의 참 기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고통 속에 있는 불쌍한 양심이 영원불변의 죄사함의 기초 위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죄사함의 양(크기)과 죄사함의 방법을 아무리 숙고할지라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물어보겠습니다. 이 순간 완성된 구속 사역의 기초 위에서 안식할 수 있는 은혜로부터 당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도데체 무엇입니까?
말해 보십시오. 당신은 절대로 굽히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십자가보다 더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다른 것을 필요로 합니까? 하나님께서 의칭(義稱) 받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완전한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한 그 기초가 바로 십자가가 아니었습니까?
이에 대해서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만족합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충분하신 분이 아닙니까? 당신은 아직도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다른 것, 즉 당신 자신의 방법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사역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생각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감정 같은 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헛된 것인 줄 알고 중지하십시오. 당신은 결코 다른 것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무언가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장애물이 될 것이요, 손해거리요, 방해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도 충분한 자요, 동시에 당신에게도 충분할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당신은 진실로 행복할 것입니다.(그렇게 되기 전에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아마도 이 순간 유일한 죄사함의 기초인 온전하고 충만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당신에게 안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 실질적인 깨달음과 흥미를 갖고 두 번째 항목인 죄사함의 양(크기)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2. 죄사함의 양(크기)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충분한 구속 사역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죄에 적용되는 실제적인 자유를 붙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노래하면서도 그 가사의 능력 있는 내용에 심취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누가 그 큰 은혜로 용서하실까!"
그들은 주께서 단지 죄의 일부분만 짊어진 것으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즉 그들이 회심 시의 죄까지만 주께서 짊어지신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매일 짓는 죄에 대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마치 매일 짓는 죄는 과거의 죄를 용서하신 것과는 다른 기초에서 다시 용서되어지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따금 심히 낙담하고 매우 시달리는 생활을 합니다. 그들이 모든 죄에 해한 온전한 죄사함의 예비를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알기 전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와 그 죄를 자백(시인)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성도가 그렇게 자기 죄를 자백함에 대해 무어라고 말했던가?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자! 왜 사도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라고 말하고 있으면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사"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모든 죄의 문제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제거되고 평온하게 되었다는 기초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의로운 대언자로서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죄사함에 관한 한 다른 어떤 기초 위에서 미쁘시고 의로우실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의 죄는 십자가에서 전부 속죄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의 죄라도 남았다면 그들은 영원히 버리운 자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하찮은 죄라도 하나님의 성역에는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첨가해서 말한다면 만일 믿는 자들의 모든 죄가 예수의 죽음으로 속죄되지 않았다면 그때는 자백(시인)으로도 안되고, 기도로도 안되고, 금식으로도 안되고, 그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용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미쁘시고 의로운" 성품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기초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직 "미쁘시고 의로운" 성품으로만 이 기초를 꼭 실천하셔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기초가 곧 하나님께는 찬양이 되고, 우리들에게는 최고의 안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독자들이 다음과 같이 부르짖을 것을 상상해 봅니다.
"무어라고요? 당신은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도 다 속죄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고 저주받은 시기로부터 미래의 죄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믿는 자들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을 때로부터 18세기 동안 미래였습니다.(C. H .맥킨토쉬는 19세기 사람임) 만일 이 미래의 죄에 대한 생각이 우리가 범할 수 있는 미래의 죄와 관련지어 볼 때 어려움에 부딪힌다면, 그리고 현재 그 문제가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 있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범해 온 과거의 죄에 관해서도 매우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미래의 죄에 대한 모든 복잡함이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기보다는 습관적으로 우리 인간 자신의 견지에서 십자가를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미래의 죄에 대한 언급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오직 인간적인 것이요, 세상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영원한 현재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의 죄들)가 십자가의 영원한 공의의 눈길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죄가 죄를 짊어진 자 곧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놓여졌던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으로 죄사함의 영원한 기초를 세웠고, 그러므로 믿는 자마다 각자의 생애의 어느 한 순간, 또는 자신의 역사의 어느 한 경점에서, 또는 자신의 경력의 어느 한 지점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의 믿음의 귀로 듣게 되고 그 순간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확실함과 확신을 갖고 거리낌 없이, 불안함도 없이, 주저함도 없이 "주께서 나의 모든 죄를 주의 등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오직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 10:17)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응답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강도를 예로 들어 봅시다. 유죄 선고를 받은 죄인으로서 그는 자기 옆에 매어달린 복된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곳에서 그 강도는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죄인에서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 갈 하나님이 주시는 자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적격자가 되기 위해서 그 자신 속에 그 자신과 함께 할 어떤 다른 것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낙원에 들어 갈 자격을 받은 후 낙원에 가는 대신 허락 받고 십자가에서 내려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즉 못은 뽑혀지고 자유롭게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아마도 그는 그의 자연성 속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각 속에서나, 말과 행동에서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자격과 적합함을 상실할 수 있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자격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지상에 남아서 50년을 더 살았다 할지라도, 그는 어느 날 첫 번째 얻은 동등한 자격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만일 용서받은 죄인이 죄를 범한다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죄에 대한 진정한 자백(시인)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기 이전에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죄사함과는 전혀 다른 각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방해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의 자격은 절대로 상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와 허물은 비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귀중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속죄된 것입니다. 그분의 희생에 의해 믿는 자는 죄와 저주의 장소에서 의로움과 온전한 은혜의 장소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 하나의 의로운 행위도 없었던 상태에서, 단 하나의 죄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는 상태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는 은혜 안에 서 있고, 은혜 아래서 살고, 바로 그 은혜를 호흡하며, 하나님의 시야 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누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으랴?) 거기에는 반드시 자백(시인)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그래도 죄사함과 죄의 씻음은 역시 십자가에서 해답을 주신 하나님의 "미쁘고 의로운" 성품에서 세워진 기초 위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십자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과 의로우심, 그리스도의 대언자로서의 사역, 우리의 모든 자백, 우리에 대한 모든 용서, 우리의 모든 성결, 모든 교제의 회복,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귀중한 보혈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죄사함의 양(크기)이라는 항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또 다른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먼저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하나 됨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요, 성령님이 함께 거하심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죄를 온전히 용서하셨음을 의미하고 있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현재 한정된 주제 안에서 죄사함의 기초와 죄사함의 크기(양)를 생각해 보면서 죄사함의 방법(형태)이라는 몇 마디 말로 결론을 맺을가 합니다.
3. 죄사함의 방법(형태)
우리는 얼마나 많은 행위를 의뢰하고 있는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내면적, 실질보다는 외형적 형태에서 좀 더 능력을 취하려 합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그래요, 나는 그가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음을 압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은혜에 따른 모든 좋은 것도 갖고 가 버리기 위함이었지요"(이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때때로 있는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자신의 방법대로 행하십니다. 그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그분은 그 큰 일들을 실천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있음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분의 실제적 행위가 위대할 뿐 아니라 그분의 실천하시는 방법(형태) 또한 매력적인 것입니다.
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 복음 7장에서 바리새인 시므온에게 하시는 주님의 감동적인 말을 살펴봅시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원문에는 이 말이 있음-역자 주) 탕감하여 주었으니…"(눅 7:42)
위 말씀에서 단순히 빚에 관해서만 생각해 볼 때, 어떤 방법이었든 결과는 동일하게 둘에게 적용되었습니다.(둘 다 탕감되었다는 뜻) 그러나 둘 중에 누가 "기쁘게"라는 말의 영적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포기했을까요? 둘 중 누가 그분의 적나라한 실제 방법을 보고 싶어했을까요? 빚 준자는 그 빚의 양에 대해서 투덜대며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이 투덜댐은 판단하려는 마음이므로 모든 은혜의 고마움을 삭감시킬 수 있습니다.(세상 사람들의 은혜는 때때로 그렇다) 다시 말하면 "기쁘게 하는" 은혜의 방법이 실제에 있어서 은혜의 가치를 보기보다는 더 높이는 것입니다.
잠시 늘 영적 풍성함을 주는 우리에게 친숙한 누가 복음 15장을 살펴봅시다.
여기에는 3가지 비유가 있는데, 매 비유마다 능력 있고, 아름다운 방법을 보여 줍니다.
목자가 자기의 양을 찾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찾느라고 애썼던 모든 괴로움을 불평하였습니까? 아니면 자기 앞에서 양 자신이 스스로 집으로 가도록 다루었습니까? 둘 다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그 양을 자신의 어깨에 메었습니다.
어떻게? 그 무거움과 괴로움을 불평하면서 말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즐거움"으로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방법을 깨닫습니다. 목자는 양을 다시 찾은 기쁨을 보여주었습니다. 양은 안전하게 그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비록 과거에 벼랑에 있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자, 누가 그의 "기쁘게"라는 말을 포기할까요? 누가 그분의 매혹적인 모습의 적나라한 행위의 본질을 깨닫기를 원할까요?
또 한 여인과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촛불을 켜고, 집을 쓸고, 찾았습니다.
어떻게? 활기 없이, 싫증난 모습으로, 무관심하게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심전력으로 일하는 사람처럼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이것은 진짜 잃어버린 은전을 찾고자 하는 여인의 분명한 모습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불쌍하게 타락한 아들의 돌아옴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주목해 봅시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아버지는 잘못을 저지른 아들은 집밖의 어느 누추한 곳으로 쳐 박으려고, 한 종을 보내지 않았고, 또는 부엌 같은 데로 들어가게 하지도 않았고, 아들이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자신이 친히 뛰어 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아버지로서의 위엄도 제쳐놓고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 전심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내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실제적 사랑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모습으로도 그 사랑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도 하나님의 죄사함의 방법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성경 말씀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간 마음에 베푸시는 능력있는 모습을 은혜로 깨우쳐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침에 즈음하여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하노니,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가 무엇이며, 죄사함의 크기(양)가 얼마나 큰 것이며, 죄사함의 방법(형태)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알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그 기초가 하나님 보좌만큼이나 안전하며, 그 크기가 무한하며, 그 방법(형태)이 모든 심령들이 바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죄사함의 문제가 풀려서 만족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아직도 죄사함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고 있습니까?
그가 이런 방법으로 당신들 앞에 실제적으로 죄를 용서해 놓고 죄사함의 기초와, 죄사함의 크기(양)와, 죄사함의 방법(형태)을 보여 줄 때 당신은 주저할 것입니까?
그분은 당신에게 마음 문을 열고 그의 생각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두 팔을 벌리고 당신을 영접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십자가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의 손은 죄사함의 기초를 만들었고, 다 이루었음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그곳에 나아와 안식을 누리기를 간청합니다. 더 나아가 항상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당신을 위하여 예비하셨습니다.
지금 축복의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임하시어 이 모든 일들을 확실하게, 충만하게 알게 하시고, 죄사함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모든 죄를 "기쁘게" 그리고 "영원히" 용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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