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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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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405회 작성일13-06-21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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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2)

작성자:C. H. 매킨토쉬

2.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성경은 성경의 권위에 머리를 숙이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의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이 말씀은 그 말씀 자체의 영적 권위와 엄숙함과 함께 타락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 지구상의 수십 억 인구 중 단 하나의 예외도 있을 수 없다. 회심(돌이킴)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그렇게 될 수도 없다.
회심하지 못한 모든 영혼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구며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다. 만일 내가 회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사단의 수하에서 내 죄로 인하여 흑암의 권세 하에 있으며 지옥 길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일 수 도 있다. 흠 없는 명사일 수도 있다. 높은 위치의 종교 지도자일 수도 있다. 또는 포도원의 일꾼일 수도 있다. 주일 학교 교사일 수도 있다. 복음을 시인했다고 하는 교회의 공직자일 수도 있다. 자격 있는 선교사일 수도 있다. 집사, 장로, 목사 또는 카톨릭 주교일 수도 있다. 또는 가장 자비심 많은 사람일 수도 있고, 종교단체나 자선단체에 아낌없이 바치는 기부금 수여자일 수도 있다.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나의 인격과 도덕적 영향력 때문에 우러러 보임을 받는 자일 수도 있고, 선망의 대상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거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사람들이 바라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모든 것을 소유한 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심하지 못했다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요, 사단의 왕국에 속한 자요, 죄책감의 소유자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으로 직통하는 넓은 길목에 서 있는 자다.

이것은 바로 마태 복음 18:3의 우리 주님의 말씀의 정확하고 분명한 의미이며 능력인 것이다. 이 말씀 앞에서는 피할 길이 없다. 그 말씀은 태양 빛과도 같이 분명한 말씀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 말씀은 우리 세상에 엄청날 정도로 위엄 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위엄으로 이 지상에 있는 모든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거리를 배회하고, 짐승보다 못할 정도로 타락한 술주정뱅이에게나, 또는 회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전 직임을 맡은 자에게나, 또는 몇 날, 몇 주, 몇 달, 몇 년이라 할지라도 계속 금주하는 것을 자랑하며 항상 방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우월감을 갖는 절대 금주자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요, 똑같이 자신의 죄 속에 갇혀 있고, 똑같이 영원한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술주정뱅이에서 돌이켜 방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축복할 만 하다. 그러나 술 취함에서 돌이켜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자랑하며, 그러한 자만심으로 자신을 헛된 데로 자신을 속여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술주정뱅이와 절제 자 사이에 외형적 차이점은 있다. 즉 금주 자는 자신의 절제하는 마음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자신의 도덕성을 자랑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옳다고 하는 헛된 사상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술주정뱅이는 틀림없이 잘못된 모습이다. 모든 사람은 술주정뱅이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회심하지 못한 상태의 절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도 마찬가지 사실이다. 둘 다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다. 전자나 후자나 다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것이 절대 필수적인 것이다. 사회 각층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또는 여러 생활 수준의 사람들로부터, 도는 모든 피부색의 사람들로부터, 모든 사회 계급으로부터, 그리고 해 아래서의 모든 환경의 사람들로부터 동일한 질문을 받게 된다. 이런 크나큰 질문에 대한 해답에는 그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 있다. 그들의 외모가 어떻든,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너희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나는 돌이켰는가(회심했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엄청난 질문이다. 인간의 언어로 이 질문의 중요성과 위엄을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것이다.

한 인간이 매일 또는 매년 이 귀한 질문에 대한 확실하고도 확정적인 해답 없이 계속 이 생각에만 몰두한다는 것은 최고의 어리석은 자로 지목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더욱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만일 인간의 자신의 세상 문제를 불확실하고도, 가장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 내버려둔다면, 그는 가장 악하고 못된 자기 무관심과 자기 부정이라는 송사에 자신을 드러내는 꼴이 된다. 그러나 영혼 구원과 비교해서 현세에서 무엇이 가장 긴박하고도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불멸의 영혼의 유익과 비교해 볼 때(불멸의 영혼은 가장 중요한 영원의 실재이다.) 모든 세상 염려는 단지 여름 타작 마당의 겨와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이 진실로 하나님께로 회심했다는 분명하고도 평안한 확신 없이 단 한 시간이라도 쉴 수 있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되는 소리다.

회심한 심령은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분계선을 통과한 사람이다. 그 분계선은 흑암의 자녀와 빛의 자녀를 구별하는 분계선이며, 이 악한 현세와 하나님의 교회를 구별하는 분계선이다. 회심한 심령에게는 사망과 심판은 뒤에 있고 오직 영광만이 앞에 있다. 그는 이미 그 자신이 천국에 있는 것처럼 천국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 이미 천국에 속한 자가 된 것이다. 그는 흠 없는 자녀의 명칭을 소유한 자며, 어두움이 없는 내세를 소유한 자다. 그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알며,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와 친구로 알며, 성령을 자신의 축복의 위안자, 또는 인도자와 선생으로 안다. 또한 천국은 자신의 밝고도 행복한 가정으로 안다.

오! 회심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믿는 자들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

자! 이제 이 회심이 무엇인지, 참으로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하심을 받을 것인가? 거기에 한 점의 실수라도 있다면 치명적 재난으로 판명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회심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제목 하의 매우 중요한 어떤 사실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즉 그 사실이라는 것은 우리의 원수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원수인 사단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회심에 대해서 잘못된 길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사단이 계속적으로 사람들은 이 회심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케 하는 데로 이끌지 못한다면, 한 술 더 떠서 사단은 그 회심의 본질에 대해서 사람들은 눈을 가리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여러 방법으로 이 세상 오락이 몹시 헛되고,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여 자신의 생활 변화의 긴급한 필요성을 알게 될라치면, 그 최고의 속임 자는 그런 사람을 오히려 종교적인 사람이 되게 하여 예배 형식과 의식과 행사에 바쁘게 하여 무도회나, 파티나, 극장이나, 콘서트나, 음주나, 놀음이나, 사냥이나, 경마를 다시 말해서 모든 쾌락이나 오락을 버리게 하면서 오히려 종교적 생활에 빠지게 하며 또 모든 종교 행사에 부지런히 참석케 하여 성경도 읽게 하고, 기도도 하게 하고, 구제도 하게 하며, 큰 종교 행사나, 그 지방의 자선 단체를 지원하는데 헌신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은 회심이 아니다. 사람은 위의 모든 것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독실한 종교인이 자기의 전 생활을 철야라든가, 금식, 기도, 금욕, 구제 행위 등을 실천하면서도 전혀 회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시들어 가는 나뭇잎이나, 꽃 등, 무가치한 대상물을 추구하면서 전 생활을 보내는 사냥꾼이나, 사려 깊지 못한 세상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생활인 것이다.

상기 두 인물(철저한 종교인과 세상 취미 생활자)들은 틀림없이 서로 외형적으로 크게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회심하지 못했다.
둘 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밖의 사람들이다. 둘 다 자신들의 죄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사실 하나는 "악한 행위(골 1:21)"에 몰입한 자요, 다른 하나는 "죽은 행실(히 6:1)"에 빠진 자다.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 둘은 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요, 소망 없고, 끝없는 고통의 길에 있는 자들이다. 만일 구원의 회심을 못했다면 다른 한 쪽과 마찬가지로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 속에서 자신들의 들어 갈 자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회심은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유대교나, 이방 종교나, 마호멧교나, 또는 카톨릭교에서 개신교로 전환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회심하지 않을 수 있다. 틀림없이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지적 기준에서 볼 때 개신교인이 되는 것은 마호멧 교인이 되는 것보다 나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서 볼 때 그들은 모두 공통 플랫트홈에 있는 것이고, 둘 다 회심하지 못한 것이다. 진실로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회심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회심은 어떤 종교 제도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 종교제도가 항상 순수하고, 항상 건전하고, 항상 권위가 있는 제도라 할지라도 말이다. 사람이 기독교 내의 가장 존경스러운 종교 단체의 한 일원이 될 수는 있다. 그러면서도 회심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영원한 멸망의 길에 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신학적 신조에서도 그렇다. 사람이 어떤 위대한 기준인 종교적 신념에 가입할 수도 있다. 39개도(영국 국교의 신조)나, 웨스트 민스터 고백이나, 요한 웨슬레의 설교문에나, 폭스나, 바클레인이나, 또는 어떤 다른 신조에 가입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회심하지 못하고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에서 한 가닥의 소망의 빛조차 없는 비참하고도 영원한 우울한 장소인 지옥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가닥의 하나님의 생명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합법적으로 종교 문답을 할 수 있다 해도, 그 종교적 제도나 신학적 신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제도나 신조가 심령을 살릴 수 없고, 구원할 수 없고, 영생을 줄 수는 없다. 사람이 매일 매일 계속해서 맷돌을 돌리는 말과 같이, 한 해 한 해 종교라는 기계 장치 위에서 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황량하고 단조로운 죽은 행실로 제자리걸음만 하는 격이다.

그런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에서 끝장 날 것인가? 죽음! 맞다. 바로 끝은 죽음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아! 바로 이것이 문제다. 하나님께 이 질문의 중요성과 심각성이 보다 진지하게 알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 그 자체는 더욱 만월의 빛 가운데서 아마도 종교적 신념의 제도로서 옹호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지식적으로 영광스런 은혜의 교리와 함께 충만하고도 값없이 받는 복음으로, 행한 것 없이도 받은 구원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칭의에 거의 입문하여 기뻐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영광스런 신약적 기독교 교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다. 사람이 이 교리를 믿고 기쁨을 지식적으로 시인할 수도 있다. 그는 능력있는 작가로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또는 복음을 웅변적으로 열의를 다해 설교할 수도 있다. 이 모두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전혀 회심하지 못하고,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귀한 복음의 진리에 익숙해진 나머지 오히려 마음이 굳어져서 스스로 속임을 당하고, 파멸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복음의 진리는 그 사람의 이해력을 초월하지 못하고, 그의 양심에 도달되지도 못하고, 그의 마음을 감동하지 못하고, 전혀 그의 영혼을 회심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가장 극단적인 예만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믿고 기뻐한다고 하면서, 또한 실제로 하나님의 복음을 설교하면서, 또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특이한 모든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아직도 회심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영원의 길로 향하고 있다면, 이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불행은 없으리라. 이 불행은 그가 한 때 믿고 죽어 가는 모든 사람의 귀에 가장 영광스런 복음의 소식을 실제로 설교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때문에 그 불행은 더욱 최고조에 달하는 것이다.

오! 독자여 당신이 누구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당신에게 간청하는 바이다. 위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당신의 모든 주의력을 집중하길 바란다. 당신의 오류 없는 진짜 회심이 하나님 앞에서 확인될 때까지는 한시라도 안일한 마음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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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H. 매킨토쉬 C.H.M의 약칭으로 알려진 C. H. 매킨토쉬는 금세기 최고의 강해서인 "모세오경"(생명의말씀사 간)의 저자이며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Miscellaneous Writings"로 묶여 발행되었다. 또한 그는 성경교사로, 복음전도자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으며 매거진 "Things New and Old"의 발행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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