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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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164회 작성일13-06-21 00:23본문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3)
작성자:C. H. 매킨토
3.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지금까지 어떤 경우에라도 회심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또 어느 정도 무엇이 참 회심이 아니라는 것도 지적했기 때문에 이제는 진짜 회심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겠다. 그래서 성경 말씀의 확실한 가르침에 접근해야만 한다. 우리는 보다 못하지 않고, 보다 틀리지 않은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이 회심했다고 하는데 전혀 회심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난 것에 대해 몹시 염려되는 바다. 소위 회심했다고 하는 많은 간증이 나오고 또 그런 소문을 듣고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볼 때 적합 되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다고 고백하고 또 그렇게 믿어 주고 있는데, 그들이 단순히 무감각한 청중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 마음에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영적 움직임은 없고, 양심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실제적 활동도 없고, 세상과 함께 철저한 부서짐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의 영향력을 받아 감정의 작용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 들고, 또는 어느 복음 전도자의 감정이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든다. 그러면서도 자아(self)는 판단 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자연에 대한 집착은 계속 있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열의는 없고, 또한 신약 성경에 기록된 회심의 특성을 지닌 그런 진짜 회심자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심하는 그런 회심자를 찾고 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천박한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시도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은혜로운 복음 전도 사업에 몰두하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성경의 밝은 빛으로 그 문제를 상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언급하는 바이다. 그리고 많은 복음 사역자들이 얼마나 성경 원리에서 이탈하고 있는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아마도 우리의 복음 사역에 많은 인간적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도록 맡기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사역의 능력과 효율성 자체를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하다. 아마도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려는데 신경을 쓰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 선풍을 일으키는데 많은 할애를 하는 것 같다. 아마도 좋은 결과를 보려는 욕심에서 많은 회심자들의 일시적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도자들은 그들을 회심으로 인정해 주고, 공중 앞에서 공포까지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열의가 위축되겠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들의 열심을 더 강렬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남모르게 더 열심을 간구할 것이며, 공중 앞에서는 청중들에게 더 열렬히 호소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의 중요성을 보다 깊이 깨닫게 되고, 우리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역사하심이 와야 함을 전적으로 확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소중히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를 바른 자세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바른 자세란 지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역사하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자아를 비운 마음으로 의뢰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골방에서나 공중 앞에서나 회심의 영광스런 사역에 관한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보다 똑바른 마음으로 직면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황금 같은 알곡과 잘 익은 열매가 열릴 것이다. 그럴 때 진짜 회심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회심은 그 회심 자체가 증거 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회심자와 함께 회심의 신용장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진실로 우리의 마음은 귀한 영혼들이 구원받음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이 회심한 경우를 일일이 세고, 우리들의 사역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자만심과 자기 만족 속에서 거들먹거리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마음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귀한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예배하는 마음 자세가 우리 자신의 이름을 위대한 설교자로 또는 대단한 복음 전도자로 땅 끝까지 드러내는 것보다 얼마나 훌륭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자세인가! 진실로 영의 인격으로 판단해 볼 때 우리의 사역은 비교조차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맡길 때 복음 사역의 위엄과 실제적 효과와 중요성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 사역자들의 마음에서는 행복과 영적 평안함과 실제적 효과는 점점 증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하게 되고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이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는 어떻게 묘사되었는가를 알아보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1-3)
이것은 참 기독교의 위대한 근본원리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생활 속에 드러난 확실하고도 의심할 바 없는 증거로 알게 된 것이다. 즉 한 성도가 택함을 입었을 때, 알 수 있는 바로 그 동일한 방법으로 알았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축복 받은 사도는 그의 일상생활 자체가 그 자신이 설교하는 복음의 해설자였던 것이다. 그는 복음으로 살았다. 바울은 성도들로부터 무엇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의 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설교했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밤낮 없이 일하고 수고했다. 그는 사랑스럽고 유순한 유모와 같이 그들 가운데 함께 있었다.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직분에 대해서나,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나, 자신의 은사에 대해서나,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나, 다른 지역에서의 기적 행함에 대해서 전혀 과장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사랑하고 낮아진 자세에서 난체하지 않고, 열심을 다하는 헌신하는 사역자였다. 그러한 그의 생활 자체가 회심의 일을 했고, 그의 전 생활이, 그의 영이, 그의 생활 모습이, 그의 태도가, 그의 생활 습관이 그의 설교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사역자들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천박한 사역이 사역자의 천박성에 결과임을 바울의 생활 태도로 믿게 된다.
능력은 어디에 있을까? 성령의 드러남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충만한 확신"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들의 설교에는 혹 이런 생활의 부족함은 없지 않은가? 유창한 언어구사가 많을 수 있다. 소위 재치라는 것도 많이 발휘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귀를 즐기고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많은 것들이 일시적으로 유익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단순한 호기심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오! 거룩한 기름부음은 어디 있으며, 살아 있는 열의와 깊은 진지함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럴 때 일상 생활과 습관이 산 해설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주께서 그의 사역자들의 마음에 작용하여 그의 사역을 되살아나게 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사역의 열매를 보다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회심의 일이 사역자에게 달렸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괴기한 생각은 멀리멀리 안녕이다! 그런 일은 전적으로,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이 모든 의문점을 해소한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는 말씀은 사역의 모든 부분과 매 경우마다 항상 바르게 붙들어야 할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성령님은 보통 어떤 도구를 사용하실까? 우리 사역자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주님의 마음에 드는"것은 어떤 그릇일까? 그것은 비고, 깨끗한 그릇이다. 우리는 과연 그런가? 우리는 자신을 비웠는가? 우리의 손은 깨끗한가? 우리의 교제, 우리의 방법, 우리의 환경은 깨끗한가?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주께서 그의 거룩한 봉사에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이 중요한 문제에서 은혜 받기를 바란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하사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을 정도로 보다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을 계속 진행하자. 그 전체의 내용은 능력으로 가득차 있다. 한편에는 사역자의 특성이요, 다른 한편에는 사역 자체의 특성인데, 그 특성들은 우리에게 매우 세심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저희가 우리에게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 1:6-9)
이것이야말로 참 사역이다. 그 사역은 그 자체에 신임장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헛된 것이나 불만족이 전혀 없다. 그 일에 대해서 어떤 비평도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주님의 인침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분명함을 줄 수 있는 확고함이 있다. 회심의 역사는 행해졌고, 그 회심의 결과는 기쁨 충만함으로 뒤따랐다. 그 증거는 더 멀리 더 넓게 펴져 갔다. 그래서 사역자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심자의 수를 세어 드러낼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직접하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었는데 거기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고, 그 사역에 또 다른 말을 더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사도는 충만한 확신으로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설교한 것 뿐이다. 거기에는 헛됨도 없고, 그의 증거에 대해서 의심 할 수조차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설교 내용을 믿고, 그 내용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설교했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단순히 알고 있는 지적 진리의 유창한 언어구사가 아니었다. 어떤 틀에 박힌 열매 없는 교리 강연이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고 말고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의 퍼부음이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말씀의 의미를 깊숙이 느끼는 그러한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설교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가슴에 와 닿은 모든 것을 수령한 것이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그의 사역이 그러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고,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적 참 열매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흥분도 아니고, 선동도 아니고, 들뜸도 아니고, 리바이벌 붐을 일으키려는 시도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울 정도로 고요했다.
사도 행전 17장에서 사도는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행 17:1-2)
귀하고 능력 있는 강론이었다. 하나님께 구하노니 우리 가운데서도 그보다 더한 역사가 있기를 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3)
이 얼마나 단순한가! 성경으로 예수를 설교했다. 그렇다 여기에 위대한 바울의 설교의 비밀이 있다. 그는 살아 계신 인격자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능력으로, 살아 있는 말씀의 권위로 설교했다. 이 설교가 산 믿음으로 받아들여졌고, 회심자들의 생활 속에서 산열매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고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그것은 단순한 틀에 박힌 설교가 아니고, 종교 대담도 아니다. 오직 자신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설교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한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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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H. 매킨토쉬 C.H.M의 약칭으로 알려진 C. H. 매킨토쉬는 금세기 최고의 강해서인 "모세오경"(생명의말씀사 간)의 저자이며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Miscellaneous Writings"로 묶여 발행되었다. 또한 그는 성경교사로, 복음전도자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으며 매거진 "Things New and Old"의 발행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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