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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심은 우상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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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468회 작성일13-06-2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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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4)

작성자:C. H. 매킨토쉬

4. 탐심은 우상숭배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의 마지막 두 절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 구절들은 회심의 참 특성에 대해서 특이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 구절들은 아주 분명하게 데살로니가 교회 회심자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적 깊이와 확실성과 충만함과 실제성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는 실수라고는 없다. 거기에는 그 자체의 신임장을 갖고 있다. 그것은 결코 불확실한 사역이 아니었다. 그것을 믿기 위해 어떤 세심한 테스트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분명하고도 실수 없는 하나님의 사역이었으며, 모든 회심자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었다.

"저희가 우리에게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그래서 이제 간략하지만 납득이 갈 만한 회심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깨달을 수 있게 됐다.
회심은 어떤 기점에서 어떤 다른 기점으로의 전환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으로부터 돌이켰다. 거기에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 즉 그들의 과거 생활과 관습에서 단번에 그러면서도 영원한 돌이킴이 있었다. 즉 그것은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에너지를 지배하고 휘어잡고 있었던 세상 것들에 대한 전적인 포기였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안에서 그들 자신의 전체 과거 생활을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 솔직하게 그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떤 어정쩡한 행위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애매하다거나 모호함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생애 속에서 특별한 기점이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도덕적인 면에서나 실 생활면에서도 엄청난 변화의 기점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들의 어떤 의견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떤 새로운 이론의 수용도 아니었다. 또는 그들의 지적 견해에서의 어떤 변화도 아니었다. 전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전체 과거의 경력이 하나의 엄청난 어두움의 괴물과 같은 거짓 생애였음이 엄숙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의 실제적인 확신이 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은 그들의 심령에 강하게 들어갔고 그 진리의 빛의 능력 속에서 그들은 자신과 그들의 과거 전부를 심판 내렸던 것이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이 세상 것의 철저한 부서짐이 있었다. 조금도 세상 것은 남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신비한 변화를 가져왔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능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의 심령에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 사도의 데살로니가 방문에 대해서 영감으로 설명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 17:2).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살아 있고 영원한 말씀에 직접 연결시키려 애썼던 것이다. 거기에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감정이나, 생각에 작용하는 어떤 인위적 시도도 없었다. 그런 것은 축복 받은 사역자 바울에게는 무가치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런 시도는 믿지 않았다. 그의 신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뿐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자세로 확인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쉬지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이점이 바로 생동감 있고 지고한 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능하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데살로니가에서 이런 위대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축복 받은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감사가 채워졌다. 바울이 기뻐한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자기와 연결된 점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었다는 점이었다.
하나님과의 연결은 소멸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말은 인간이 소멸될 때 함께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참 사역자로서 이 점을 깨우쳤고, 또한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신성한 열심히 생겼고, 그의 모든 사역에서 그가 전한 복음을 들은 모든 심령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에게 의뢰하지 않기를 바랬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요, 사역자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하는 말씀을 들어보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여기서 우리는 참 복음 사역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증거"와 "성령의 나타남"이다. 즉 말씀과 성령이라는 말이다. 이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모든 인간의 영향력이라든가 인간의 능력,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에너지에 의한 결과는 철두철미하게 무가치한 것이다. 그렇다.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사역자들은 자기네들이 나열하고 지껄여 온 자기네들의 두드러진 사역의 결과로 마음이 부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거짓된 영향력을 받은 불쌍한 심령들은 속은 것이 되고, 전적으로 거짓된 곳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고 거짓 신앙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전체 사역은 최고의 재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지 전능의 영적 능력과 성령의 활력 하에서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거하게 될 때는 그렇지 않다.
그 때는 데살로니가에서 보여진 경우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엄숙한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모든 의문점을 뛰어넘어 누가 참 사역자인지 분명하게 판가름나는 것이다.

복음 사역이 신임을 얻게 되는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의 사역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사역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영원히 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을 돌리자!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의 그의 사역의 결과를 셈하거나 떠버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 자신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드러냈다. 그것이 진짜 사역이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인침이 확고히 그 사역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바울은 매우 만족했다. 이점이 바로 스스로 마음을 비운 모들 사역자들에게는 만족을 주는 것이다. 바울은 말씀을 전달했고, 그 말씀 자체가 심령을 살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에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다. 그 말씀은 좋은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풍부한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이제 그 결과를 살펴보자. "우상을 버리고"(살전 1:8).

여기서 우리는 회심하지 못한 모든 세상 사람들의 생활을 한 마디로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우상"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포장되어 우리 마음에 던져진다.
우상 숭배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가축이나 돌에만 머리 숙이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사로잡은 모든 세상 것이 우상이다. 어떤 대상에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이 우상 숭배다. 또 그것에다 마음을 빼앗기는 자는 우상 숭배자다.
이런 말이 자존심 강한 어떤 사람에게는 불쾌하게 들릴는지 몰라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 점에서 이 말은 엄연한 진리인 것이다.

"탐심"이라고 불리 우는 일반적인 큰 죄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영감 받은 바울 사도는 "탐심"을 무엇이라고 했던가?
그는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했다.(골 3:5)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돈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금이라는 우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던가?
탐욕은 무엇인가? 좀더 얻고자 하는 욕망이거나,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애착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신약에서 그 두 가지 형태를 다 보게 된다.
그리스 원어에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내포하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얻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던지, 아니면 쌓아 두려는 욕망을 가졌든지 이 둘은 다 우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표면적으로는 같은 모습이 아니라 전자는 더 얻고자 하는 욕망은 쓰기 위해서 예비하는 것과 연관시킬 수 있다. 후자 곧 쌓아 두려는 욕망은 반대로 일반적으로 저장하려는 강렬한 정신과 연결되어진다.
예를 들어 큰 사업 능력을 갖춘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장사에는 천부적 재능이 있다. 그의 손안에서는 모든 것이 불어나는 것 같다. 그에게는 사업에 대한 진짜 열정도 있고, 돈을 버는데 그칠 줄 모르는 갈급 함도 있다. 그의 목적은 오직 더 버는 것이고, 숫자를 더 늘리는 것이고, 사업체를 더 강화시키는 것이요, 그리고 그 자신의 사업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다. 그는 사업의 분위기 속에서 살고 번창하고 흥청거리며 살아간다.
그는 처음에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며, 드디어 자랑 할 수 있는 사업 왕자 자리까지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구두쇠는 아니다. 그는 얻기 위해서는 돈을 쓸 자세도 갖추고 있다. 그는 엄청날 정도로 노임도 나누어준다. 화려한 대접으로 유흥도 베푼다. 아낌없이 대중들에게 여러 배로 되돌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 각층으로부터 우러러 보이게 되고, 존경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더 얻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탐심의 사람 즉 우상 숭배자이다. 실제로 그는 금을 만지며, 돈주머니를 주무르면서 밤을 지새며 즐기는 어리석은 구두쇠를 경멸하는 사람이다.
원래 구두쇠들은 환상적인 먼지(돈을 말함)를 보며, 그것으로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하며 즐긴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가족을 위한 생활 일용품에는 인색하다. 그는 저축된 귀한 돈 뭉치의 일부를 쓰기보다는 넝마 조각을 걸치고 남 보기에 불쌍하리만큼 보이면서 거리를 누비는 사람이다. 그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돈 그 자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그는 쌓는 재미로 산다.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쌓아 두기 위해서 산다. 그의 지배적 욕망은 수많은 넝마 조각과 함께 죽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괴상망칙한 욕망이다.

이 둘은 현저하게 다르다. 그러나 그 둘은 다 한 지점에서 만난다.
그 둘은 동일한 플랜트 홈에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둘 다 탐심의 사람이요, 둘 다 우상 숭배자들이다. 이 말이 거칠고 심각하게 들릴는지 모르나, 이 말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권위에 복종해야만 한다. 성령이 우상 숭배라고 선포하는 바로 그 탐심의 죄를 사람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엾은 저질의 구두쇠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업 왕자와 비교된다는 것은 쇼킹한 일이다.

타인들 속에서 위와 같은 경우를 보는 것과 우리 자신 속에서 그것을 판단 내리며 볼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사실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 내리며 볼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만이 심령을 비추고 영적 존재인 우리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다. 그리고 탐심의 죄를 끄집어 낼 수 있다. 얻기를 추구한다는 것 즉 더 얻으려는 욕망, 즉 사업 정신, 다시 말하면 돈을 버는 능력 즉 계속 얻으려는 욕망은 인간 세계에서는 매우 존경받은 일이다. 비교적 몇 안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견지에서 그런 모습을 가증한 것으로 본다. 자연성은 인간의 생각이다. 자연성은 세상에서 찾아지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찬양하고 숭배한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마음은 나름대로 우상을 갖고 있다.
한 사람은 금을 숭배하고 다는 사람은 쾌락을 숭배하고 또 다른 사람은 권력을 숭배한다. 회심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우상 숭배자다. 회심한 자라 할지라도 우상의 영향력을 뛰어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요일 5:21)고 경계의 말씀을 했던 것이다.

독자들이여, 우리가 이 문제를 더 진행하기 전에 여러분께 확실하고도 예리한 질문을 해도 되겠는가?
당신은 참으로 회심했는가? 당신은 그렇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당신은 구원받은 기독교의 기초석을 갖추고 있는가?
그렇다면 참으로 우상에서 돌이켰는가? 당신은 진실로 세상과의 관계가 끊어졌는가?
그리고 구원받기 이전의 자아와의 관계가 끊어졌는가? 당신은 마음속에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있으며, 또한 당신의 이전의 전 생애 즉 그것이 환락의 생활이었던지 또는 무분별하고 어리석고 돈벌기에만 급급한 생활이었던지 또는 가증하고 사악하고 비참한 생활이었던지 또는 그리스도가 없고, 믿음 없는 무가치한 단순히 의례적인 종교 생활이었던지 간에 그런 생활을 지금 심판하고 있는가?
대답해 보시라. 당신의 생활이 어떤 것인가? 철저하게 솔직해 보시라.

지금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신의 진지한 열의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우리 모임 안에 슬프게도 이런 면에서 철저한 결단이 없음을 깨닫고 괴로워하고 통탄하는 바이다. 우리는 분명하고도 강렬하게 "우상으로부터 돌이키지" 못하고 있다.
구습은 성격이나, 외향이나, 정신이나, 태도가 회심을 바라고 있지 않다. 우리는 슬프게도 우리의 옛 자아를 너무나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세상적인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터놓고 좋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엄청난 일들이다. 우리는 이 점이 복음과 영혼 구원의 진행 과정에서 슬프게도 방해 거리가 되고 있음을 염려하는 바이다.
증거의 말씀은 우리가 전하는 사람들의 귀에 무능력하게 들려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조차 진실하게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의 회심자들에게 말하듯이 직접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살전 1:8)

우리에게는 깊고도 능력 있는 확실한 회심이 부족하다. 소위 역사 하심이 있다는 모임에서도 무기력함과 연약함과 모호함이 부끄럽게도 실망스러울 정도로 만연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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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H. 매킨토쉬 C.H.M의 약칭으로 알려진 C. H. 매킨토쉬는 금세기 최고의 강해서인 "모세오경"(생명의말씀사 간)의 저자이며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Miscellaneous Writings"로 묶여 발행되었다. 또한 그는 성경교사로, 복음전도자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으며 매거진 "Things New and Old"의 발행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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