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아 하나님만 바라라 > 구원의 복음

구원의 복음

복음말씀

구원의 복음


내 영혼아 하나님만 바라라

페이지 정보

조회860회 작성일13-06-21 00:26

본문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6)

작성자:C. H. 매킨토쉬

6. 내 영혼아 하나님만 바라라.

데살로니가 전서 1:9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깊고도 충만한 신비의 능력에 감동을 받게 된다. 그것은 마치 광맥을 집어넣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잠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풍요롭고도 암시적인 구절을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진정 그 말씀 속에 있는 능력과 충만함을 이해하고 있는가? 한 심령이 하나님께로 인도된다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연약하고, 필요할 때마다 그분을 우리의 방패와 능력으로 안다는 것, 우리의 인도자와 조언자로 안다는 것, 우리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로 전적으로 다가가서 전적으로 그분만 의뢰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당신은 심령 속에서 이 모든 깊고도 오묘한 축복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자녀이고, 진정으로 회심한 심령이라면 그 회심을 안다는 것은 당신의 즐거운 특권이요, 따라서 그 회심 없이는 한시라도 기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면 이 세상이나 영원 속에서 우리의 필요를 그분 안에서 찾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심령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세상에는 없다. 우리가 만일 온 우주의 부요를 다 소유하고 그 부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취한다 할지라도 해 아래서는 다 채워지지 않고 오직 고통과 공허만이 남게 될 것이다.

"나 전도자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내가 마음 가운데서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 깨달았도다."(전 1:12-17)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 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1:18-2:11)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에 의해 기록된 모든 것은 그런 시들어 가는 말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모든 술잔과 세상 즐거움은 쓰레기 같이 소모되도록 허락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 되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도다."(전 1:8) 가련한 인간의 마음은 세상 것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영원성을 지닌 인간의 심령의 목마름을 세상 것으로 채워 주지 못한다. 물질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물질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모든 인간의 심령에서 증명된다. 조만간 모든 사람이 철저히 드러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귀머거리 귀를 지금 그런 진리의 말씀으로 돌이킬 수 있다. 반대로 성령님의 음성을 거절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 가련한 세상이 실질적인 위안과 행복을 줄 수 있다는 망상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세상의 부요와 명예와 공덕과 쾌락과 물질적 위로에 열심히 몰두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너무 늦게 깨닫는 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누가 복음에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눅 16:19 이하 참고) 그 부자와 같이 지옥에서 눈이 열린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는가?
하나님의 존전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는 한 심령의 공포를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밖에 어두움에 버리워져 이를 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깨달아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지옥에서 고통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한 가닥의 소망의 빛조차 없이 영원하고도 깊은 해결할 수 없는 어두운 구렁텅이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것인가?

오, 그런 사람은 아마도 조만간에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닥쳐올 심판에서 도망했을 것을, 복음으로 눈앞에 온 은혜의 소망을 붙잡았을 것을, 일찌감치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것을"

그러나 슬프게도 이 세상 신은 그들의 마음을 가렸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사단은 그들을 세상 것에만 몰두하게 했다. 사업이라든가, 돈벌이, 쾌락, 세상 걱정, 정욕 등 세상 모든 일에만 몰두하게 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복음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게 했다. 이 복음과 비교해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은 저울 위에 티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잠시 본 주제에서 벗어난 것 같다.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특별히 성도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서 모든 자원을 찾아야 함을 강조하는 바이다. 우리는 잠시 주제에서 벗어났는데 실은 회심하지 못하고 무관심한 사람이 혹 이 글을 우연히 읽게 될 때 그의 귀에 경고의 말을 주기 위함이다. 우리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간청하는 바이다. 그리고 회심한 성도들에게는 은혜로 돌이켜 주신 그분 하나님과 더 깊은 친교를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회심'이라는 제목 하에서 이 글을 쓰면서 우리 앞에 두 가지 일이 놓여 있음을 안다. 곧 회심하지 못한 심령들은 하나님께 회심하라는 것과 이미 회심한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라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 안에서 찾은 심령의 평안한 생활을 매일 살아가면서 그 실제적인 회심의 중요성에 대해서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그러한 확신 있는 생활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는 매우 기이한 모습으로 비치게 된다. 사실 그러한 확신 있는 생활은 이 세상에 담대히 말할 수 있게 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비법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얻은 것을 지속적으로 감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에게 기대려는 강렬한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것이며, 우리가 다소 탄식하며 얻은 세상 것에 우리를 매달리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세상 것들은 우리에게 실망만 주었고, 하나님을 경멸하게 했던 것들이다.

우리는 동정과 도움과 상담을 위해 하나님께 직접 매달리기보다는 사람을 찾는 경향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것은 정말 심각한 실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요, 담을 수 없는 물통마저 우리 스스로 부셔 버리는 격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결과는 불모와 황폐뿐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우리에게 실망만 안겨 준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왜냐하면 사람의 팔에 기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터득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살펴보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 17:5-6)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다음의 말씀을 보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렘 17:7-8)

살아 계신 하나님의 팔에 의지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찾고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어떤 환경에서나 우리의 자원을 그분 안에서 찾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믿는 마음에는 결코 실망을 주시지 않는다.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이후에라도 실망을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응답을 우리로 하여금 계속 기다리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 기다림 속에서 시간이 흘러 때가 되어 응답이 임하게 되면, 우리 마음은 찬양으로 가득 차게 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위급할 때마다 그분은 우리에게 충족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인 사실이어야 하고 단순히 말로만의 고백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연약한 인간에게 기대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이것은 슬픈 기만술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런 기만술에 빠지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을 찾고 있으며, 또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부족한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또한 하나님을 불 명예롭게 한다. 그 결과는 실망과 혼돈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좀더 솔직하게 살펴보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귀한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정말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 구절 속에는 참 행복과 참 거룩의 본질이 있다. 심령이 참으로 하나님께로 실질적으로 돌아올 때는 참 진리와 참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과 안식과 온전한 만족을 알게 된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 품속에 있는 것들이다. 거기에는 피조물을 의지하려는 어떤 기회도 있을 수 없다.
나는 혹 혼돈 속에 있지는 않은지? 나는 나의 길 인도를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의 눈길로 나를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얼마나 완전한 인도함인가! 어느 인간이 나를 위해 이보다 더 훌륭한 인도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을 한번에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거동을 알고 계신다.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모든 문제의 근원과 결과를 알고 계신다. 그분은 실수 없는 인도자시다. 그분의 지혜에는 오류가 없고 게다가 그분은 나를 완벽하게 사랑하신다. 어디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인도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나는 부족하단 말인가? 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소유주시다. 우주의 모든 보물이 그의 섭리 속에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에게 유익된 것이라면 주실 것이다. 만일 그 반대라면 안일함보다는 오히려 고통이 나에게 유익될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왜 피조물을 찾아야 하는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우리의 부족함을 인간에게 가서 찾아야 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실제로 믿음의 기초를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을 단순히 의뢰하는 생활을 포기하는 것이리라. 그것은 실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불명예롭게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은 나를 실망시키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그것은 나의 몸과 혼과 영을 택하시어, 세상에서나 영원한 세계에서도 나를 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배신하는 꼴이 된다.

그분은 스스로 나의 부족을 예비하시겠다고 맹세하셨다. 비록 그 예비물이 아무리 많고, 아무리 크고,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말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그분의 말씀은 이렇다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물론 하나님은 피조물을 사용하시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다. 축복 받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 7:6)

바울은 위로를 위해 하나님을 찾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디도를 보내어 바울을 위로하셨다. 만일 바울이 디도를 바랬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다른 모든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유일한 언급은 하나님을 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라는 말씀뿐이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위급한 때에라도 그분은 우리의 확실한 자원이 되신다. 우리는 동정을 위해서도, 기타 모든 것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 하리로다"(시 62:5-6)

이렇게 하나님만 찾는 가장 축복된 습관이 그분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람을 무가치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서 그분의 분명한 도구로 사용되어 나에게 전달자로 오는 사람을 어떻게 무가치하게 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통로로 사용되는 그 사람을 내가 의뢰할 자원으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통로로만 가치 있게 보는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것은 분명해 진다.
회심의 참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로 인도된다면 그것은 그분 안에서 우리의 완전한 가리개(covering)를 찾기 위함이요, 우리 마음의 완전한 대상을 찾기 위함이요, 시종 우리의 위급한 때를 맞아 완전한 자원을 찾기 위함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두자.

참으로 회심한 심령은 모든 피조물을 의뢰함으로부터, 또는 인본적 소망으로부터, 그리고 세상 성취로부터 돌아서서, 살아 계시고, 참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와 자신의 모든 부족함을 찾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하리라.

- 본 홈페이지의 대부분의 글들은 이미 출판되었거나 또는 앞으로 출판 예정인 글들입니다. 글은 자유롭게 이용하시되 본 게시물을 복사하여 다른 홈페이지에 옮기시거나 부분 인쇄하여 사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C. H. 매킨토쉬 C.H.M의 약칭으로 알려진 C. H. 매킨토쉬는 금세기 최고의 강해서인 "모세오경"(생명의말씀사 간)의 저자이며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Miscellaneous Writings"로 묶여 발행되었다. 또한 그는 성경교사로, 복음전도자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으며 매거진 "Things New and Old"의 발행인이기도 했다.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