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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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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794회 작성일13-06-2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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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8)

작성자:C. H. 매킨토쉬

8. 당신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데살로니가 전서 1장 마지막 절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그 구절은 매우 확실하고 강력한 어조로 데살로니가에서의 뚜렷하고도 충만한 사도 바울의 깊은 이해력있는 증거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곳 데살로니가의 새 회심자들 속에 있었던 밝고도 실제적인 믿음 생활을 드러내고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살아 계시고 참 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이것은 은혜로 행한 것이었다. 또한 특별한 능력과 원기와 열의로 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믿건데 그보다 더한 것이 또 있었는데 곧 만일 이것이 없었더라면 사랑하는 성도들의 회심과 신앙 속에서 엄청난 결함이 있을 뻔했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돌이켜 회심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바로 이 사실에 깊은 관심을 두기 바란다. 밝고도 복된 주님의 재림의 소망은 바울 사도의 설교 속에 있는 복음의 진지한 부분이며, 또한 그의 복음 사역으로 말미암아 회심한 사람들의 내적 신앙의 성실한 부분이기도 하다.

축복의 종 바울은 온전한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위대한 일을 성취했음을 전파함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그 계획의 영원한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주께서 하늘에 올라 하나님 우편에서 승리의 자리에 앉아 성도들을 드높이고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사실도 설파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전했다.
첫째는 자기 백성을 자신에게 이끌어 하나님 아버지의 집 깊숙한 곳에 거하게 하기 위함이요,(그 장소는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그 후 그들과 함께 지상에 오시어 원수들을 심판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왕국으로부터 불법을 행하는 대적자 모두를 끌어내고 자신의 영광스런 통치를 땅 끝까지 이루기 위함이다.

이 모든 내용이 사도 바울이 전한 귀한 복음 속에 있다.
데살로니가의 회심자들은 바로 그 복음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사도행전 17장에서 간접적이지만 매우 흥미 있는 이 복음의 내용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영감 받은 기자는 불신의 유대인들이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어떻게 반대하고, 평가한 내용을 기록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행 17:5-7)

이것이 주의 종들의 설교를 들은 불신자들의 불쌍하고 무식하고 편견적인 생각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생각 속에서 위대하고 엄숙한 진리의 요소를 볼 수 있는데 즉 환경에 따른 세상 제도의 완전한 멸망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의 설립이다.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겔 21:27)

그러나 주님의 재림과 왕국이 사도 바울의 설교 속에서 당시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교훈이 현재에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이러한 축복된 소망으로 돌이켰을 뿐만 아니라 그 소망 안에서 섰고, 안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매일의 삶을 그러한 밝은 소망 안에서 사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한 신조의 부분으로만 받아들이기 위한 건조하고 메마른 어떤 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실상이요, 심령 속에 있는 강력한 영적 능력이었다. 즉 이 세상에서 완전히 마음을 분리시킨 어떤 귀하고 흠 없는 거룩하고도 지고한 소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순간 순간 밖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 다시 강조하는데,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이었다.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는 다른 서신에서 합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계시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전, 후서가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초기의 글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주목하게 된다.
그 서신서들은 신앙 면에서 어린 모임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독자들께서 이 두 서신을 단번에 읽어보면 8개의 각 장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기록되어 매 장마다의 주제와 연관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제 1장에서는 주의 재림이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항상 보존되어 마음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주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에서의 긴 여정의 끝에 가서는 찬란하게 빛나는 빛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 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기다린다고 말하니"(살전 1:9-10)

무얼 기다린다는 말인가? 자신들의 죽음을? 아니다. 그러한 내용이 아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은 없어졌다. 죽음은 신자들의 소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무얼 기다리라고 가르침을 받았던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살전 1:10a)

그렇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 주목하시라.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b)

이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구주시며, 위대한 구속자의 인격이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비참함을 담당하신 분이며, 우리를 위해 영원하신 심판자의 손길로부터 진노의 잔을 받아 영원히 비워 버리신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구름을 제거하셨고, 그리함으로 우리는 그 구름 너머에 있는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고 영원 속을 끝없이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찬란한 영광과 축복만을 바라보게 되었고, 이는 마치 끝없는 행복을 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 은혜로우신 구원자의 재림을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밤까지 바라보며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인 구주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실상인가!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 그 날의 일을 시작하면서, 비록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때로는 마루를 닦는 일일 수도 있고, 복음을 설파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밝고도 복된 소망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 얼마나 구별되고 고상한 것인가! 저녁 어두움이 우리를 엄습하기 전에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주님의 재림을 맞이한다는 것은 너무나 거룩하고 구별된 일이다.

이것이 광신자의 꿈이고, 열광자의 환상이겠는가? 아니다. 이것은 소멸될 수 없는 진리이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가장 귀한 기독 신앙의 바로 그 기초 위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의 인성을 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밟으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분께서 이 땅에서 가련하고 타락된 인간들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며 일하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분이 죄가 들끓는 이 황폐한 세상의 감각으로 한숨짓고, 눈물을 흘리시며 신음하였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을 옹호하셨고,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셨고, 마귀의 역사를 멸하시고, 지옥의 모든 권세를 공개적으로 보이셨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려 원죄를 소멸하시고, 역사의 시작부터 은혜로 하나님의 이름을 믿게 되는 모든 사람들의 자범죄를 짊어지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흘 밤, 사흘 낮을 땅 속에 누이셨고, 주의 첫날에 무덤에서 일어나 죽음을 이기시어 새로운 피조물의 머리가 되시고, 최소한 오 백 여명의 증인들에게 보이신 후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부활 후 50일 만에 성령을 보내어 사도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여 땅 끝까지 그분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오순절로부터 지금까지 그분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대언자가 되시어, 곧 거룩한 대제사장이 되시어 우리의 죄와 허물과 부족함을 위해 중보자로서 우리의 모든 연약성과 슬픔을 동정하시며, 지속적으로 우리의 기도와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려 아름다운 향기를 흠향케 하시는 것이 사실인가?
이 모든 것이 사실이며, 진실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 모두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것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놀랍게도 확실함과 충만함과 함께 심도있게 능력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모두가 바로 성경의 확고한 기초가 된다. 이 기초는 어떠한 세상의 권세라도, 또는 지옥의 권세라도, 또는 인간과 마귀의 어떤 권세라도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 이제 주님의 재림의 복된 소망도 정확하게 위와 같은 권위에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로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것이 사실인 것처럼, 자라서 어른의 신분이 되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무덤에 누이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하늘의 위엄의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주께서 주의 백성을 자신에게 영접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주님은 오늘밤에 오실 수도 있다. 그가 언제 오실런지 아무도 모른다. 그건 어느 때고 오실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그분께서 지체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1800년의 오랜 기간 동안(필자는 1820년에 태어났다) 주님은 식을 줄 모르는 사랑과 자비와 동정심으로 기다려 오셨다. 그 모든 기간 동안 온전한 구원이 드러나기를 예비하셨고, 동시에 심판도 예비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오랜 고통과 인내로 기다려 오셨고,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언젠가는 도적같이 주님은 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오심을 소망하고 항상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러한 마음 자세로 살 것을 가르쳤다. 사도 바울도 실은 그렇게 살았다. 복된 재림의 소망은 그의 매일의 생활 습관과 감정에 긴밀히 밀착돼 있었다. 그것은 그의 노고의 매일의 생활 습관과 감정에 긴밀히 밀착돼 있었다. 그것은 그의 노고의 열매였던가?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바울은 그들 모두를 그때 그곳에서(주님의 재림 때) 만나기를 바랬다. 어느 원수도 그 모임을 방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 2:18)

매우 기이한 일이고, 괴기한 일이다! 그때도 그랬었다. 사단은 다니엘의 시대에도 자기의 임무대로 하나님의 천사를 방해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간절히 보기 원하는 일에도 방해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가 즐겁게 모이는 그 모임은 방해할 수 없다.(하늘의 모임을 말함-역자 주)

그 모임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순간일까! 얼마나 귀한 결합일까! 얼마나 달콤한 만남일까! 얼마나 멋진 오랜 친구들의 인사가 될 것인가!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 멋진 것은 주님 자신이다. 주님의 미소야말로 최고의 멋짐인 것이다. 바로 주님의 환영이다. 주님의 감동어린 "참 잘 했노라"라는 말일게다.

이 얼마나 귀하고 심령을 감싸주는 소망인가! 복된 사도의 생각과 가르침 속에 있는 그 엄청난 장소에 대해서 우리는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 사도는 지난 모든 경우를 회상하며 모든 주제와 연관시킨다. 그것은 구별된 생활과 실제로 경건으로 이어지는 문제인가?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이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2-13)

독자들이여, 특별히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마지막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자.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이 얼마나 감탄할만한 지혜가 비치고 있는가!
사도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친구들(성도들)로 인해서 실족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오류에 대해서 직접 관여하려 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미 자는 자들이 주님 재림 때 만남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의 오류는 다음의 짤막한 문장으로 완전히 해소되고 있다. 즉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이다. 한 사람도 그 기쁨의 만남과 잔치에서 누락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복된 확신이다! 이것은 현재 살면서 보이는 것 이외에는 아무도 주님의 재림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승리적 해답인 것이다.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비록 그들이 무식하고, 실수 많고, 방황하고, 넘어지고, 연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복된 주님인 우리 심령의 영원한 사랑 공급자는 그 복된 순간에서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내어쫓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한량없는 은혜로 인해서 우리는 신앙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살게 될 것인가? 아니다. 그 은혜는 항상 내재하는 지각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의 모든 것을 판단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에 거슬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방법을 분별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이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 주님의 재림의 소망 역시 마음 속에 밝고도 생생하게 간직되어 진다면 틀림없이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생활을 깨끗하고, 거룩하고, 고상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렇게 해주지 못한다.

"자기 안에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주께서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케 하느니라"(요일 3:3)

사람이 어느 때고 주님 맞이할 소망으로 살아가면서 그의 마음이 세상일에 집착하고, 돈버는 일이라든가, 자기 멋대로의 행동이라든가, 오락 등 헛되고 어리석은 일에 마음이 붙잡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우리가 하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매일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면 시간 속에서의 피부적 감각 생활에는 좀 느슨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의 재림을 지식으로 단순히 교리로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에나, 성격에나, 실생활 속에 아무런 효과도 미치지 못하면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예언의 진리를 단순히 지식으로만 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귀한 보혈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신 주님을 맞이할 밝고도 복된 소망으로 가득찬 모든 영적 실재와 실질적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다.
우리 속에 이러한 일들이 허다하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참되고 적절한 소망의 능력을 이처럼 잃고 살아가고 있음은 심히 두려운 일이다. 주님 재림의 진리는 우리가 쉽게 거론할 수 있는 단순한 교리로만 받아들이기에 매우 익숙하다. 때문에 우리는 재림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서 토론도 하며, 사람들과 논쟁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확실하게 잡았다고 고백하는 신앙에다 거짓된 우리 자신의 세상적 태도와 마음과 세상적 기질을 더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주제 하에서 슬프고도 비참한 우리의 단면을 더 추구하지 않으련다. 주께서 우리를 살피사 은혜로 치유하시어 우리의 심령을 높여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망을 적절하게 재생시켜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은 찬란한 새벽 별을 맞이할 소망이리라.(벧후 1:19참조)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명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이 "아멘 주여 어서옵소서" 라는 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이 글을 끝맺어야겠다. 우리는 독자들과 함께 두 서신서(데살로니가 전, 후서)를 통해 데살로니가인들이 돌이켜 주님의 재림의 소망을 갖게 됨이 곧 사도 바울의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면으로 또한 기독자의 생활 양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건대 참 회심으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한다면 복된 주의 재림의 소망은 절대로 중단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드러냈다.

참 회심자는 우상에서 돌이켜 즉 세상과의 연관을 끊고, 또한 옛 자아와 관계를 끊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이 생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발견하여, 그만을 섬기며 결국에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자다.

"참 회심이란 무엇인가?"(Conversion, What is it?) 라는 질문에 대한 참되고 적절한 해답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당신은 참으로 돌이켜 회심했는가?(즉 당신은 참으로 구원받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일 당신이 회심했다면 당신의 생명은 지금 그 회심(구원)을 선포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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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H. 매킨토쉬 C.H.M의 약칭으로 알려진 C. H. 매킨토쉬는 금세기 최고의 강해서인 "모세오경"(생명의말씀사 간)의 저자이며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Miscellaneous Writings"로 묶여 발행되었다. 또한 그는 성경교사로, 복음전도자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으며 매거진 "Things New and Old"의 발행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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