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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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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464회 작성일13-06-20 17:15

본문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2)

작성자:알프레드 P. 깁스
제2장

지금까지는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에 대해 "거듭남이 아닌 것들"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부정적인 점에 대해 다루어 왔습니다만, 이제 우리는 무엇이 거듭남인가 하는 긍정적인 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들은 거듭남에 대한 네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 질문들에 대해서 "왜?", "어떻게?", "언제?",그리고 "그렇다면?"과 같은 논리적인 답변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Ⅱ. 왜 사람은 거듭나야만 하는가?

거듭남이 이처럼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거나 또는 들어가려면, 거듭남의 경험이 그토록 필수적인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러한 필요성에 대해 완전히 논리적이고 납득할만한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다른 말로 하자면,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해 놀라거나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필요성이 불가피하고 확고하게 논리적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과정은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이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필요성이 너무도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항상 불가해하게 보여도, 결코 불가해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을 듯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관계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실제적인 사실에 기초해야 합니다. 왜 거듭남이 우리 각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 왜냐하면 영적인 본성이 사람이 날 때부터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구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6절).
이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독특하고 전혀 상반되는 본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콩 심은데 콩난다"고 하는 근본적인 사실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새의 생명은 새의 생명을 낳고, 물고기의 생명은 물고기의 생명을, 동물의 생명은 동물의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고기"는 육적인 것만을 낳을 뿐이며, "성령"은 영적인 것을 낳는 것입니다.

(1) "육"의 의미
이제 "육(flesh)"이라고 하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육"이라고 하는 단어는 성경에서 삼중적인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때때로 그 단어는 실제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로 우리 몸의 육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전체 인류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이 단어는 육체적인 출생의 결과로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바로 이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육"이라 불리는 이 본성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말씀하고 있는 존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단어(flesh)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려면 마지막 알파벳인 'h'를 제거해 보고, 이 단어의 나머지 부분을 거꾸로 읽어보면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보셨습니까? S-I-L-F(자아). 따라서 "육"은 육체적인 출생을 통해 우리에게 전수된 "자아" 본성으로써, 날 때부터 가지게 된 죄악되고 하나님께 반항하고 적대적인 성품인 것입니다. 따라서 육을 "원칙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악으로, 인간의 타고난 본성"으로 정의한 것은 바른 것입니다. 이러한 죄악된 본성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로 죄악된 본성을 얻게 되었습니다(롬 5:12, 18-19).

(2) "육"의 특징
이러한 본성은 날 때부터 죄악되고, 하나님께 적대적이기 때문에, 사람이 "육"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서 사는 한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을 보거나, 이해하거나, 감지하거나, 또는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그러한 육신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곧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히 1:9)시는 분으로 선언된 그분을 기르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가 말하는 것을 말하며, 우리가 행하는 것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우리라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죄악된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본성은 우리의 죄악된 생각과 말과 행위와 태도의 근원이며, 자원이며, 또한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들은 단지 그 속에 있는 본성의 드러난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 뿌리로부터 결실되어 맺힌 열매들인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이 실제로 죄를 범하여 죄인이 되는 것은 사실상 시간 문제인 것입니다
이 죄악된 본성은 변하지 않으며, 또한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영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구제불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육에 속한 사람(혹은 이러한 죄악된 본성을 소유한 채로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라고 말씀하신 것을 봅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본성으로 물리적인 것들을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그리고 깨닫는 것처럼, 우리가 영적인 것들을 깨닫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인 본성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결론은 합당하고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11절에서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논증하고 있는 것도 논리적인 결론인 것입니다.

육적인 본성과 결합된 육체의 생명이 출생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듯이, 마찬가지로 영적인 본성이 결합된 영적인 생명도 초자연적인 출생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출생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에 의해, 신성한 생명과 성품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거듭남을 통해 비로소 사람은 영적인 실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또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 1:4)라고 묘사하고 있는 참된 의미입니다.

이제 요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간단한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선천적으로 음악적인 재능이 없거나, 혹은 적성에 맞지 않으면 음악의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 교수로부터 모든 가르침을 받는다 할지라도 이러한 음악적인 재능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음악적인 재능을 개발하려면 음악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최근에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어떤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은 외동딸에게 가능한한 최고의 음악교육을 받게 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기 딸을 가장 유명한 음악 교수에게 보내어, 최고의 음악 교육과 함께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고, 가장 엄격한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음악 교수는 수주일 동안 가망없는 노력을 시도해본 후에, 마침내 그 부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즉, "당신의 딸에게는 '음악적인 재능'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자기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분개한 부인은 답장을 썼습니다. "저는 이미 당신에게 제 딸아이를 위한 음악 교육을 위해서 돈과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일 제 딸에게 음악적인 재능이 없다면, 우리 딸애에게 그것도 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음악에 관한 것들을 이해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음악적인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분명히 보았을 줄로 압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 즉 영적인 실제들을 이해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인 것들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인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능력은 자연적인 출생을 통해서는 오지 않습니다. 오직 사람이 거듭나는 순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아무도 신성에 속한 일들을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 교육을 통해서도 이러한 영적인 능력을 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능력은 거듭남을 통해 새 생명을 받음으로써만 임하는 것입니다.

(3) "육"의 무능력성
"육"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부패한 본성은 외형상 교화되거나, 외견상 변화될 수는 있지만, 그 본래의 성격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종교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품위있는 모습으로, 혹은 천박한 모습으로, 때로는 문명화된 모습으로, 혹은 야만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겸손한 모습으로, 혹은 교만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육신적인 모습들이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잘 쳐려 입은 사람이나,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이나, 혹은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에게나 다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육"입니다. 따라서 "육"은 그 자체로, 즉 본질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예화를 소개해 드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여기에 가시나무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나무를 재배하는데 필요로 하는 전문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가시나무와 엉겅퀴 몇 그루를 가지고 최신 시설을 갖춘 온실에 심었습니다. 열심을 다해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정기적으로 물을 주고, 적당한 온도를 유지시켜 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최상의 포도송이가 달린 묘목과 맛이 그만인 무화과로 주변에 둘렀습니다. 이러한 전문적인 재배방식으로 수년간 실험해본 후에,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신 것과 같은 결과가 있었습니다. 바로 매우 아름답게 경작된 가시덤블과 엉겅퀴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물으신 동일한 결과였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육은 오직 육 외에 아무 것도 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교육을 받고, 자기 계발을 하고, 좋은 종교적인 환경 가운데 자랄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기 종류대로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13장 23절에서 물으신 다음의 질문은 이 점에 대해 더 이상 논증할 필요가 없는 확답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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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P. 깁스. 성경교사로서 많은 가르침을 전해 주었으며 대표적인 저술로는 <설교자와 그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의무 예배>, <주님의 만찬>, 등 그외 다수가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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