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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인을 위한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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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888회 작성일13-06-2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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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2)

작성자:J. H. 브룩스

2.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인을 위한 사역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라고 했던 율법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거룩하고 영적이고 변할 수 없는 율법의 계명을 어겼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율법의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욥은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지혜로는 이 어려움을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사랑에 연유된 구원의 계획에 관련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사도 바울은 율법 자체가 약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타락으로 인해 즉, 죄악된 본성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의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1-25). 따라서 믿음은 우리를 속죄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해 줍니다.
성경에는 첫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해 주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런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둘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즉,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담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그 속전을 내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따라,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킴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장하셨습니다.
넷째, 위의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의 대가로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셨고, 마치 우리를 의로울 뿐 아니라 한번도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대우하심을 보여줍니다.

범죄로 인해 고소를 당한 사람이 정당하게 되는 것은 그를 고소한 내용이 증명되지 않거나 무죄라고 여겨져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정에서 어떤 사람에 대한 결백(무죄)의 관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대법정에서의 관계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유리하게 무죄 석방이 선언되는 것은 우리가 결백하거나, 고소한 내용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행하신 일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는 로마서 8:34절에서 다음과 같이 승리에 찬 해답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고대 역사에 의하면 저명한 그리스의 시인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 B.C. 525-456. 그리스의 비극 시인)가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고 정죄되어 막 사형에 처해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으며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팔을 잃은 그의 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판관들을 향해서 그의 잘려진 팔을 들어올렸습니다. 이 감동적인 호소에 너무나도 감동된 재판관들은 그 영웅에 대한 마땅한 대우를 생각해서 즉시 아이스킬로스를 놓아주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재판관들의 호의를 살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의 형이 행한 것 덕택이라는 점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물론 그 시인의 형이 아이스킬로스에게 사형을 정죄한 그 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 이 비유가 우리를 대신해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정확하게 예증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 재판관들이 그의 형에게 동정하여 그리고 그의 충성스러운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아이스킬로스를 석방할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보좌 앞에서 한때 못 박히셨던 그의 손을 들어올리시면 믿는 자의 무죄석방은 얼마나 확실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 자신이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이 얼마나 호소력이 있겠습니까!

우리를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더 나은 예증은 샤롯 엘리자벳(Sharlotte Elizabeth)의 생애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저명하고 경건한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여인은 잭(Jack)이라는 불쌍하고 귀먹은 벙어리 소년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극도로 머리가 안 좋고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생님의 헌신적인 가르침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심으로 그 소년은 현저하게 영리해졌으며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잭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잭이 묘지에 편안히 누워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잭’하고 크게 부르셨고 그러면 그는 깜짝 놀라 ‘예! 제가 잭인데요’라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손에 아주 큰 책을 가지고 그 책을 펴서 잭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까지 뒤져서 그를 불러서 그 분 앞에 세우셨습니다. 그 페이지에는 하나님께서 잭의 모든 ‘악행’ 즉 그가 행한 모든 죄들을 기록해 두셨는데 그 페이지에 아주 빽빽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것을 읽으려고 태양 빛에 비추어 보셨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전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좀 놀라서 그에게 어떤 악행도 한일이 없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아니요, 물론 정말 많은 악한 짓을 했지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상처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하나님의 손에서 그 책을 받아 드시고 그 페이지를 찾아서 그 페이지 위로 그 분의 손을 지나가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잭의 ‘악행’들은 전혀 보실 수 없으시고 다만 그리스도의 피 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그를 고소하는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책을 덮으셨고, 주 예수님께서 잭이 서 있는 곳으로 오셔서 ‘나의 잭아!’라고 하시고 그에게 그의 팔을 두르고, 곁으로 이끌어, 천사들과 함께 세울 것이라고 하나님께 말씀했습니다”.
그 불쌍한 소년은 비록 그 자신의 의는 전혀 없었지만 구주께서 그에 대한 의의 요구를 충족시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정확하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그 분이 이루신 사역을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율법 앞에 흠 없으신 그리스도

그 분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히 7:26) 계십니다. 그 분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십니다(벧전 2:22). 그 분은 흠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십니다(벧전 1:18, 19). 그 분 자신에 대한 증거는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였다”(요 8:29)고 했습니다. 그 분은 유대인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라고 말씀했습니다. 비록 그들은 그 분을 치밀하게 살피면서 그 분을 고소할 근거를 찾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 분을 고소할 털끝만한 흠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했던 로마 집정관 빌라도는 그 분의 대적들에게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마 27:23)라고 되물었으며, 그 분을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이 의로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마 27:34 우리말에는 ‘의로운’이라는 말이 없음-역자주).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 23:4)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라도 주님을 사형에 처하게 했던 사람들의 증거가 이러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바로 전에 그 분이 선언하시길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關係)할 것이 없다”(요 14:30)고 하셨는데 사탄은 어떤 것도 죄에 대해 어떤 영향력을 미쳤다고 주장하거나, 어떤 제안했다거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죄에 대해 동감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잘라 말해서, 주님의 이 세상에서의 전 생애 동안에 우리 주 예수님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일이 전혀 없으며,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남겨 두신 일도 전혀 없으며,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하신 적도 없으며, 그 분의 천상적인 거룩한 영혼은 부정한 목적이나 욕망으로 인해 더럽혀진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은 생각이나, 언행으로나 전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완전하게 순종했으며, 그 모든 것을 아담이 불순종했던 인성을 가지고 순종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인간이셨으므로 그 분에게 죄가 없었다는 단 한 가지 점을 제외하곤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았습니다. 인간으로서 그 분은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며 자신을 사랑하듯 사람을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롬 5:8). 그러므로 그 분은 흠 없이 순종하심으로 율법의 계명을 받들어 만족시켰으므로 율법이 그 명령을 더 완벽하게 준행하라거나 더 완벽한 의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 율법의 모든 계명을 남김없이 순종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긴 율법의 형벌을 당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어긴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형벌을 완전히 담당하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만족시켰으며 그로 인해 거룩한 하나님께서 그 분의 성품에 모순됨 없이 경건치 못한 자들을 의롭다고 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초기 이탈리아 남부의 역사에서 보면 이탈리아 남부의 통치자이며 입법자인 잘레우커스(Zaleucus)는 간음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범죄를 막기 위하여 그 죄에 대한 형벌은 두 눈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법을 처음으로 범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처벌을 면제해 주라는 신하들의 청원을 받아들이길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는 아들을 사랑했으나 법대로 처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아들을 구제하면서도 이것을 이루기 위해 그는 자신의 한 눈과 그의 아들의 한 눈을 뽑기로 했습니다. 그 법이 제정된 목적이 성취되었고 취지가 확증되었습니다. 아니, 만일 그 아들에게 정확하고 완전하게 형벌을 가해졌다고 해도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그 법이 확증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훌륭한 입법자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었으며 백성들은 범죄한 아들에게만 정확하게 형벌이 가하도록 명해졌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는 청렴한 성품과 그의 정부에 대한 명예를 지키려는 확고한 결의에 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죽는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통당하신 분의 존엄하심을 고려해 볼 때, 그 분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켰으며, 마치 슬프게도 세상에서 모든 인류가 감금되는 것과 같이 완전히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켰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시는동안에도 여전히 완전하셨으며, 매를 맞으시는 동안에도 그 의로우심으로 하나님을 의롭게 하셨기에(시 22:1-3), 십자가에 달리신 거룩하신 분께서 그 심판을 모두 다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때리는 것도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습니다.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주님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 형상의 본체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계심을”(히 1:3) 기억하십시오. 그 분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 2:6-8). 그러므로 성경 모든 곳에서 그 분은 진정한 사람일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속성과 이름과 칭호를 소유하신(골 1:15-20) 거룩한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히 1:6)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시고, 그 분의 고난은 놀라운 겸손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무한한 존귀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주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났고, 헤롯 왕이 유아였을 때 그를 죽이려고 했으며, 그 분의 육신의 부모가 애굽에서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온 후에 어쩔 수 없이 그곳을 피해야 했으며 멸시받던 동네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목수”(막 6;3)와 “목수의 아들”(마 13:55)이라고 불렸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제사장들이 율법을 따라 그들의 직무를 행하기 시작하는 30세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 분은 세례 요한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습니다(요 1:11). 그 분은 그들에게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그들은 그 분에게서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 분은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분이셨으며, 마치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인양 얼굴을 가렸으며, 그분을 멸시했으며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습니다(사 53:2-6). 그들은 그 분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로 여겨 경멸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마 8:20).

주님께서 종종 자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에게서 물러나 혼자 하나님과 기도하셨고 어떤 때는 마치 아버지와의 교제를 위해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눅 6;12). 그분이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고 사도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분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항상 죽음이 그의 마음에 항상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이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어느 날, 어떤 헬라 사람들이 빌립에게 와서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님을 뵈옵고자 하나이다”(요 12:21)라고 말했을 때, 그들이 온 것이 모든 민족들을 모으는 보증인 것처럼 그 분의 영은 밝은 전망으로 고조되셨고, 갑자기 마치 공포에 찬 환상이 앞을 지나치기라도 하는 듯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라고 외치셨습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주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막 10:32). 온화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바로 그 얼굴에 그분이 선택한 친밀한 친구들 사이에 이러한 두려움을 자아낼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그의 열 두 제자들을 데리고 그 분에게 어떤 일이 생길는지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막 10:33-34). 그의 생을 마감하실 때가 가까움에 따라 그 분 앞에 있던 고난의 그림자는 점점 더 어두워졌으며 그 분의 십자가의 예견은 더 명백해졌습니다.

드디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룰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이 될 유월절에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찢긴 몸과 흘린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말씀하신 후 일어나셔서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라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가시면서 그 분은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37-40)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었습니다(눅 22:44).

주님의 제자 중에 한 명은 은 삼십을 받고 그분을 배반했으며, 또 다른 제자는 절대로 그를 알고 지낸 적이 없다고 했으며, 그리고 다른 모든 제자들은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결국 주님 홀로 대제사장의 법정에 끌려가서 거기서 조롱섞인 재판을 받은 후 사형을 선고받고, 침 뱉음 당하고, 주먹으로 침을 당하고, 수치스런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주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세워졌는데 그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하였으니 때려서 놓으리라고 선언하고서도 양심을 어기고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의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졌고 어깨에 십자가가 지워졌고 못 박히기 위해 끌려갔습니다.
특별히 주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죽음의 고통을 당하실 때, 겸손하게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죽음과 싸울 때 경험하는 것과 같은 붙들어 주심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붙들어 주심으로 그들의 입에서 승리의 찬송이 격앙되어 나오고 그들의 얼굴에 거룩한 기쁨이 차서 정복자처럼 고통받는 것과 십자가와 순교 당하는 것에 당당히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떤 것도 갈보리 길을 가는 죄 없는 분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두 강도 사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주님을 죽인 자들에게서 욕을 당하셨습니다. 세 시간이 지나서 갑자기 어둠이 하늘을 덮었고 측량할 수 없는 슬픔의 세 시간이 더 지나간 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절망의 울부짖음과 같은 고뇌의 부르짖는 소리가 암흑 속에 날카롭게 울렸습니다.

아무 이유없이 구주 예수님의 고난을 늘어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 지구상의 유일하게 거룩한 분께서 가장 극심한 고난을 받는 분이었다는 이 엄숙한 사실에 감동받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생명의 왕이요, 거룩한 주님이신 그분은 자신의 생명에 대해 절대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계셨기에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게 하신 분이고(벧전 2:24), 바로 그분이 죄인들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히 12:3) 분이시고, 바로 그분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멸시를 당하셨으나 모든 선함으로 갚으셨으며, 비난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에 마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짐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마땅히 버림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 빛에서 가림을 당하셨습니다.
왜 이래야 했습니까? 죄를 알지도 못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너무나도 잔인하고도 부끄러운 죽음을 당하시는 것이 가능이나 한 일입니까? 만일 죽음에 대한 바른 설명이 없다면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전능자의 성품을 욕되게 했으며 그분의 통치의 기초를 망쳤음에 틀림없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이 죽음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를 것이다”(사 53:5-10).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만일 어떤 진리를 드러내는데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런 구절들과 그와 같은 다른 많은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진정 적합하게 충족시켰다는 것을 명백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계명을 순종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율법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습니다(히 9:26).
따라서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켰습니다. 그분은 율법의 모든 요구에 응하시므로 율법을 높여 존귀케 했습니다(사 42:21). 그분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들어 순종하여 우주 만물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 자신의 인격과 사역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 85:10)라는 말씀이 명백하게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믿는 자들의 대리인 즉, 다른 사람의 채무를 충족시켜 그 빚을 갚아주는 분이 되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당신에게 엄청나게 많은 돈을 빚을 졌는데 갚지 못해 그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넣을 권세를 가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제게 친구가 하나 있는데 당신에게 가서 “내 친구가 당신에게 빚진 돈 여기 있소. 내가 대신 갚겠소!”라고 말한다고 한다면 그 순간 당신은 돈을 받았으니 비록 내가 빚을 갚느라고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내 친구가 내 대신 해 준 일 때문에 나는 채무와 감옥에서 풀려나야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5세기 경 놀라(Nola)의 주교 폴리너스(Paulinus)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고트 인들이 자기 나라를 침입해서 잡아간 동포들을 구해오는데 썼다고 합니다. 그의 재산이 완전히 바닥난 후에 한 가난한 과부가 그를 찾아와 그녀가 이제 늙어 의지하던 외아들이 아프리카로 포로로 잡혀갔다는 슬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폴리너스는 집을 떠나 그 젊은이를 발견하고 그 아들을 어머니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그를 대신하여 노예가 되기로 그의 주인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는 그 아들을 노예에서 구해낼 목적으로 위해 포로 된 아들의 의무를 떠맡아서 실제로 그를 위해 그의 자리에서 순종하고 고난을 겪었습니다.

신성(神性)을 지닌 영원하고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믿는 자들을 위해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해서 죄인을 대신해서 율법의 빚인 죽음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그를 하나님과의 교제로 회복시켜 줍니다. 그분만이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반면에 충분히 입증한 것처럼 본질상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정죄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의문이 생기는데 특별히 주의를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은혜로운 공여가 누구에게 주어지며, 담보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누구에게 유효할까요? 성경은 우리가 논의해 온 다른 모든 질문에 해답을 제공해 왔으므로 성경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 즉, 율법을 완전히 이루시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셔서 믿는 사람 오직 믿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형벌을 면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구세주에 대한 믿음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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