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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787회 작성일13-06-2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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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5)

작성자:J. H. 브룩스

제5장 구원의 증거

바라기는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히 좇기로 작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들어서면, 성경적인 구원의 증거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성경적인 증거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심각하게 오도되거나, 적어도 성경에서 그 증거를 찾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서 그들의 증거를 찾기 때문에 오랫동안 어둠과 마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내게 그렇게 보였던 것처럼, 많은 복음 전도자들도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많은 그들의 청중들의 그들 자신을 판단하기에 적합한 규칙인양 만드는 실수를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경험을 하지 않으면 그들의 상태에 대해서 낙담하고 의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외양과 정신적인 능력과 재능과 습관이나 역사가 같지 않듯이, 어떤 두 사람의 그리스도인도 똑같은 영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믿음의 행위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데리고 가는 성령의 사역에 관해서는 대단히 다양합니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그들의 죄짐이 굴러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각자 자신의 독특한 길을 통해 십자가로 인도됩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의 경험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완전히 일치한지 않는다고 그 점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시고, 성경에서 제시하는 것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언급하고 싶은 첫 번째 증거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한 순종'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4).
여기에는 실수나 자기 기만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명백하게 구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된 상태에 대한 시험을 언급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명령을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고백이 어떠하냐, 우리가 어떤 교회에 속하는가,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준수하는가에 상관없이 우리의 확신이나 자기 만족은 헛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킨다면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그러는 것처럼 우리의 개심(conversion)에 대해서 의심하게 우리 자신을 표현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의심에 빠질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약 3:2).
만일 우리가 소망하고 진심으로 그의 계명을 지키려고 한다면 의도적으로나 계속적으로 주님이 금한 것을 행하지는 않거나,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을 의도적으로 게을리 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에 대항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면, 죄에서 자유케 되기를 갈망하십시오(공개적이고 외적인 죄뿐만 아니라 은밀하고 내면의 죄로부터). 만일 구주 예수님의 성품과 일치하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시편 기자처럼 우리는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 119:128)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승리에 차고 강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이 신실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따르기를 열망하는 신자들을 지배하는 원리는 그의 본성이 새롭게 되어서 뛰어나고 아름다운 거룩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 당하신 구속자에 대한 사랑과 우리가 존중하는 그분에 대한 사랑입니다.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의 전기에 나오는 한 사건은 이것에 대한 예가 될 수 있다. 전에 전해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고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그 소송사건에서 그 죄인에게 한 명의 친구도 없다는 사실이 도드리지의 관심을 유발시켰습니다. 그래서 상당한 어려움과 비용을 들여서 그 사람의 무죄를 명백하게 세우는데 성공했습니다. 죽음에서 그를 구해준 은혜에 어떻게 감사할 줄 몰라하면서 "내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하여 감사드립니다. 한편으로 당신은 나의 구속주이므로 나의 대한 권리는 당신에게 있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주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느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분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저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사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성경에 있는 참된 믿음의 두 번째 증거는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그들의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이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회심자들은 때때로 거듭남의 이러한 성경적인 증거에 대해서 어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특별한 애정이 가지 않는 자칭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는 은혜의 사역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회심하지 않는 친구들을 혐오하거나 냉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형제에 대한 사랑은 선천적인 기호나 기질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것보다는 더 고상하고 거룩한 토대입니다.
다음의 예증이 당신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잃은 한 여인이 고아원을 방문했습니다. 거기에서 그녀는 한 아이를 보고 '저 아이는 우리 메리와 아주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를 갈구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그녀는 그 아이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를 볼 때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자신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낳으셨고 당신이 사랑하는 주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형상을 어디에서 보게 되든지 분명히 그것을 사랑할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에게 당신의 마음이 향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내가 언급하고 싶은 성경에 나와 있는 세 번째 참된 믿음의 증거는 '관점과 애정과 목적과 습관의 변화'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여기서 다시 이 말을 어려워할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서 어떤 변화도 감지하지 못해왔기에 그들 마음에는 자신들이 거듭났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년 동안,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그들은 다소간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해왔고, 성경을 읽었으며, 주의 깊게 복음 설교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확신이 부족합니다.
이제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들의 오랜 기간동안 확신 없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이 성령의 억제와 통치하는 영향력 하에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사역이 아주 잠잠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내면에서 수행되고 있으므로 회심할 때에 그들이 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처럼 압도적인 경험을 꼭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거듭난 날과 달, 년도도 말하지 못하는 몇몇 아주 총명한 그리스도인들은 만난 것은 나의 특권입니다. 성경은 어린 시절에 거듭난 사람과 어머니 태에서부터 성별된 사람의 예를 제공합니다(눅 1:15).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은 환상이나 비범한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습니다(마 7:20). 그리고 나는 우리가 지금 고려하고 있는 증거가 두려움이나 슬픈 마음이 아니라 기쁨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에서는 "육신의", 혹은 "거듭나지 못한"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고"(롬 8:7).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기"(롬 8:5)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그의 계획이나 목표에서 하나님을 제외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기조차 싫어합니다. 그가 그의 동료들에게 보여주는 모든 온화한 특징들은 다만 본성적인 것이요 마치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것이 덕스럽고 경건하다고 불린다면 그것은 동물들이 그들의 새끼에게 사랑과 서로간에 애정과 종종 그 주인에게 애착을 보이는 것과 같이 동물적인 본능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자는 성령의 양자되게 하는 성령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자녀로서의 존경으로 인도되어 "아바(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롬 8:16). 예전에 그는 다만 현세의 유익을 증진시키고 부와 명예, 세상의 쾌락을 증진시키기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약 4:4) 느끼고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을 찾습니다. 예전에 성경은 그에게 봉인된 책이었고 구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진귀한 말씀은 세상의 이야기 거리와 쓸데없는 허구의 이야기로 인해 내던져 졌었지만, 이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빛과 영적인 영식으로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예전에 기도집회와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흥미없고 지루한 것이었지만, 이제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제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변화의 실제와 세상 사람과 "하나님으로 거듭난" 사람과의 차이를 충분하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이제 기억해야 할 것은 믿음은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시선을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에게 둘 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정결케 되고,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고(요일 5:4), 믿는 자들이 그의 피 값으로 산 자로서 주인의 소유권을 인식할 수 있고(행 20:28), 우리로 하여금 우리 몸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고(롬 12:1), 그리고 하늘과 대화를 늘려서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할 것입니다(빌 3:20,21).

그러므로 우리의 노래를 풍성하게 하며
모든 눈물을 그치게 하라.
우리는 임마누엘의 정원을 향해 진군하고 있으며
하늘의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향해 행진하고 있다.

다만 당신이 마음써야 할 것은 "완전한데 나아가는" 것(히 6:2) 즉,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자라는 것이며,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살전 5:22), 예수님을 위해 분명히 악한 것들뿐만 아니라 의심스런 것까지 모든 습관과 잘못된 상습들을 기꺼이 버리는 것입니다.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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