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죄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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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885회 작성일13-06-21 00:43본문
이 세번째 질문을 다루기 전에 먼저 확실히 알아야 할 사실은, 사람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실제로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엄숙한 말씀은 허구에 대한 경고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 죄를 범할 수 있으며, 또 범해 왔습니다.
사단도 그 죄를 범했습니다 그의 최초의 범죄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범죄의 역사 가운데서 알지 못하고 죄를 지었거나 흑은 유혹을 받아서 죄를 지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지성을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의 빛과 사람을 대적하는 죄를 짓고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늘 스스로 죄를 지어 왔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죄를 지어 왔으며, 도저히 회개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전혀 용서받을 수 없고 오로지 불못행일 뿐입니다.
타락한 천사들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유전(遺傳) 따윈 전혀 생각해 볼 수 없습니다. 타락한 천사들은 순전히 자발적으로 죄를 범했으며,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이성적(理性的) 반역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회개의 가능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그들 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용서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지옥뿐입니다.
바로와 헤롯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 당시의 종교적인 위선자들도 역시 이 죄에 매우 근접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면서도 고의적인 위선으로,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을 마귀의 소행이라고 말할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주님께서 그들 중 일부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아돌프 히틀러 같은 사람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었는지 우리는 궁금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도 역시 다음처럼 동일한 특징과 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양심의 계획적인 억누름, 계속적인 기만과 사기, 완전히 비정상적으로 되어 버린 도덕성, 그래서 검은 것을 희다하고, 악을 선이라 하며, 마귀를 하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2편이 만일 세상 끝날과 관계있는 말씀이라면 그것은 마치 세상의 권력자들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아마겟돈으로 가는 전조와도 같이 짓게 될 것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여간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다른 각도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으며, 이것은 참으로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즉, 자기가 혹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지나 않았나 염려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실상 그러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고민하는 그 자체가 바로 그들이 그러한 죄를 짓지 않았음을 입증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간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사람도 과거의 죄가 어떠하든지 간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자기 죄를 자각하고, 다가오는 심판을 두려워하며, 구원의 길을 알기 원하고, 더 나은 생활을 하기 소원하는 죄인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감정과 소원과 참회가 다 성령의 역사이며, 따라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정로를 벗어난 그리스도인들과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낙담시키기 위해, 자기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얼마나 잘 이용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로우신 성령님께서는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
여러분 모두는 이 말씀 속에 포함됩니다!
고(故) G. 캠벨 몰간(Campbell Morgan)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시험기간(수습기간) 중에는 범해질 수 없습니다. 그 죄는 한 시간 안에 범해지거나 한 행동으로 범해지지 않습니다. 그 죄는 시험기간(수습기간)이 끝날 때까지 분명하고 확고부동하게 취해진 자세의 결과입니다. 그 기간은 사람이 이생과 내생의 경계선을 넘어가야 끝납니다. 우리는 은혜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에는 성령님이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하나님을 끝끝내 버리는 사람만 하나님도 결국 버리신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진행되는 그 과정이 시작조차 되지 않도록 우리는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죄는 십중팔구 다음과 같은 세방식으로 시작됩니다. 연기(延期), 가정(假定), 가식(假飾).
성령의 내적인 활동에 의해 영혼들은 자신의 영원한 구원에 관하여 각성하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를 구원하는 복음의 진리와 주 예수님의 능력을 깨닫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연기합니다. 이렇게 하여 긴박감은 점차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될수록 연기하는(미루는) 일은 점점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반응을 나타내는 영혼의 힘이 손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점점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영혼은 만성적인 무능(無能)으로 회개할 수 없게 되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고 마는 것입니다.
다른 경우로는 영혼이 하나님에 관하여 그릇된 가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구원받기를 원하긴 하지만 그 시간은 스스로 선택합니다. 그들은 죄의 자각과 돌이킴, 회개와 중생(重生)이 인간의 의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어리석게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다른 경우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이르는 과정이 가식에 의해 야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 하나님과 자기 양심에게 솔직하지 못함으로써, 변화되지 않은 마음이 여전히 죄를 품고 있는데도 구원을 받은 것처럼 꾸밈으로써 발생합니다. 그들의 말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물론 저는 복음을 믿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저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쉽사리 포기할 수 있어요." 사람이 이런 치명적인 자기 기만에 습관적으로 빠지면 급기야 그 마음은 처음에 잘못임을 알았을지라도 그것이 진짜 사실이라고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검은 것이 희게 되고, 횐 것이 검게 되며, 그 마음 자체가 거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처음부터 거절하거나 배척하거나 반항하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악한 과정은 단지 연기하거나 가정하거나 가식하거나 하는 식으로 매우 완곡하게 시작되며, 그 이유는 거의 예외 없이 그 마음이 애지중지하는 것들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에 기인합니다. 오, 우리는 참다운 헌신을 사랑하는 구주께 드려, 하나님의 영원한 실재들을 어리석게 장난하는 일을 결코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끝내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변하고마는 이 과정을 잘 보여주는 예들이 세가지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사울, 헤롯, 이 세 왕이었습니다.
1. 애굽 왕 바로
먼저 바로를 생각해 봅시다(출 1 :14장).
첫 눈에 알아보게 되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괴롭히려고 잔인한 계교를 꾸밀 만큼 악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연속적인 "재앙"이 퍼부어짐으로써 참되신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증명되었으며, 그러기에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는 전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이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거역차기로 결심하고 말았습니다.
단지 인간이 알면서도 감히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지만 고(故) F. B. 마이어(Meyer)의 글에서 인용한 다음의 문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압적이고 안하무인격인 자세로 묻는 바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애굽의 절대군주들이 지녔던 무제한적 권력을 고려해야 합니다. 각 바로는 태양의 아들이었습니다. 바로는 가장 위대한 신(神)들에게 총애를 받는 것으로 묘사되며, 또 그 신들과 함께 신전 깊숙한 곳에 앉아 똑같은 숭배를 받는 것으로 묘사되는 존재였습니다. '바로의 생명을 걸고'라는 표현은 최고의 맹세였습니다. 애굽 온 땅에서 바로의 허락없이는 아무도 수족을 놀리지 못했습니다. 거대한 애굽은 바로 그를 위해 존재했으며, 다른 모든 인민들은 그를 위해 살았고, 고난당했고, 죽었습니다. 미지의 원천에서 흘러 토양을 비옥하게 했던 저 도도한 나일 강도 그를 위해 흘렀습니다. 그 엄청난 숫자의 사제들과 마법사들, 아전들도 그를 섬기며 수종들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보좌에 앉아 백성들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은채 불쌍한 인민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백성들의 눈물과 신음, 그들의 속박의 울부짖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바로의 위엄을 더욱 높이기 위해 합당한 희생이 강요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의 절대 군주는 최근에 자기 장군들을 통해 큰 승리를 획득했으며, 이 성공은 그의 오만을 크게 부풀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오만한 조소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순종하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 하니라'(출 5:2).
이 대답의 핵심은 '듣고'(순종하고)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자기에게 청원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보다 더 큰 권세를 지니신 분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을 보았으며, 이것은 그의 속살을 찔렀던 것입니다. '나도 역시 신(神)인데 그런 나에게 이런 명령을 감히 내리면서 나보다 더 강하다는 이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금까지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저 하나님이란 누구인가!
한 꾸러미의 노예들의 하나님이 아닌가! 그런데도 어찌 저들이 감히 내 앞에서, 그리고 사제들과 아전들과 고관들 앞에서 하찮은 신(神)에 관해 입을 연단 말인가!'
이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으로서 교만하고 허세부리며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영혼 속에서 그 치명적인 과정(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이르는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로의 마음이 18번이나 "강팍하여져서" 거절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약 절반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었고, 그 나머지는 바로 자신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회개치 않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상대적 반작용이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 도전하며 자신을 강팍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저희 마음의 정욕대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롬1:24,26,28). 예루살렘을 향하여 한탄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 속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너희는 ... 못하리라"(마 23:37∼39).
2.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바로의 경우보다 덜 심각하긴 하지만 애처롭기로는 훨씬 더 한 것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경우였습니다.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초기의 약속 단계, 나중의 쇠퇴 단계, 최후의 실패 단계.
그의 출발은 우월한 신체, 높이 칭찬받을 만한 성격, 성령에 의해 갖추어진 특별한 영성, 자기 주위에 있던 경건한 사람들, 훌륭한 조언자인 사무엘 선지자와 더불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완고함과 하나님께 대한 거역은 그의 생애를 점점 더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급기야 제사장의 특권을 범하는 교만한 행동을 저질렀고(삼상 13장), 그런 다음에는 경솔하게도 하나님께 불순종했으며(14장),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또 불순종함과 동시에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15장). 그런 다음에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켜 소멸하였으며, 소인처럼 다윗을 시기하다가 결국 악마같이 그를 세 번이나 살해하려 하였고,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수개월 동안 그를 추적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령을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하나님의 성령도 그를 저버리셨고, 마침내 그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도다"(삼상 28:15).
그리고 그처럼 훌륭한 약속과 더불어 출발했던 사울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물을 정도로 타락하였고, 결국 자살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사울이 우리 주님의 말씀하신바 그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생애는 그 죄에 이르는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 로마의 영주였던 헤롯 왕
마지막으로 로마의 영주였던 헤롯 왕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에 그의 경우는 두드러진 사례입니다 마가복음 6장 20절에 기록된 대로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활 속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
그러나 헤롯은 자기 형제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탐하여 불법적으로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헤롯은 요한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지 혜로디아를 통해 오는 죄의 음성을 듣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요한을 옥에 가두고,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써(17∼19절) 성가신 하나님의 음성을 자신에게서 제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음 과정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일한 사건이 언급된 누가복음 3장 19,20절에서 누가는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과 "이 위에 한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는 헤로디아를 기쁘게 하려고 요한의 목을 베는 일까지 자행했습니다(막 6:27).
하지만 이 때에도 양심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죄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
그 후에 헤롯은 예수님도 죽이려 했으며(눅 13:31),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날 아침 빌라도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헤롯 앞으로 끌려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누가복음 23장 9절에는 헤롯이 "여러 말로 물었으나" 예수님은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생활 가운데서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묵살되어 온 하나님의 음성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분노와 좌절에 빠진 헤롯은 이제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사랑은 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요, 이것이 바로 그리로 가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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