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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통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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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878회 작성일13-06-21 01:08

본문

"제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추호도 의심이 없어요. 그렇지만 구원받기 전이나 다름없이 낙심하고 답답해 할 때가 자주 있거든요. 위안이나 기쁨을 송두리째 잃게 될 때도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군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위안과 기쁨은 주님을 믿는 성도의 심령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유지할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육신이라 불리우는 옛 성품이 여 전히 남아 있는데, 옛 성품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악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육신이라 불리우는 옛 성품은 어머니의 무릎에서 젖을 빨고 있는 어린아이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심령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육체의 소욕을 대항하시기 때문에 언행심사에 있어서 육신적인 모든 일은 성령님을 근심케 합니다. 주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시는 대로 행할 때 성령님께서는 성도의 심령에서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의 말씀대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반대로 성도가 육체의 소욕대로 행하게 되면 성령님을 근심케 해 드리게 되며, 성령님의 열매도 별로 맺히니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사역과 당신의 구원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당신의 행위와 기쁨 역시 불가분의 관계임을 명심하십시오.
천만부당한 가상이지만, 그리스도의 공로가 무효한다면 당신의 구원도 무효화될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당신의 행위가 그릇될 때에 당신의 기쁨은 사라질 것입니다. 물론 전자는 어디까지나 가상에 불과하지만, 후자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같은 체험을 했던 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돼 있습니다.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했다"는 사도행전 9장 31절의 기록과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사도행전 13장 52절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은 후에 심령에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당신의 순종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셨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전연 별개의 사실임에도 마치 하나인양 혼동하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제멋대로 하며 절제하지 못하고 세속적으로 살게 될 때에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게 되고 자신도 기쁨을 잃게 되는데 이를 구원의 확신과 관련시켜 생각하셨기 때문에 확신마저 흔들렸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당신의 구원은 당신을 위하여 이미 이루어 주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달려 있는 것으로 전혀 안전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성경을 통하여 당신에게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는 것으로 절대 불변합니다.
당신의 기름은 언행 심사간 주께서 합당히 여기시는대로 행함으로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지 않는데 달려 있기에 이것만은 당신의 책임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릴 일을 저질렀을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정상적으로 교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어진 부자간의 관계가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드린대로 부자간에 틈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교제의 기쁨을 회복하고 불화를 해소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자신을 살펴보고 죄를 자백하는 것뿐입니다.
당신의 자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럴 때 당신은 자녀의 언행과 표정에서 이 사실을 역력히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리광을 부리며 태연자약하던 아이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서려 있고 행동이 어색하며 자꾸만 낮을 피하려 할 것입니다. 이제 이 아이가 해야할 일은 부모님께 솔직하게 잘못을 자백하여 용서를 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쉽사리 자백하지 않은 채 울며 버틴다고 부자간의 관계가 회복될 리가 만무합니다. 오직 부모님께 자백하면 용서해 주시리라는 확신으로 겸손하게 자백해야 할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순간부터 자백사고 용서를 받기까지 이 아이에게는 기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순간에 모든 기쁨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는 잘못을 저질름으로 더 이상 교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관계마저 끊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자관계는 출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자간의 교제가 어린아이의 행실로 인하여 중단된 것뿐입니다.
이 아이가 뉘우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자초지종을 부모님께 자백할 때에, 용서해 주고 달래주며 위로해 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때에야 비로소 이 아이는 다시금 부모와 스스럼 없는 교제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그의 중신이었던 우리아의 아내로 더불어 중죄를 범했을 때 "주의 구원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했던 사실은 이 진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시편 51:12).
 
앞서 말씀드렸던 예화에서, 당신의 아들이 시무룩해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불이야"하는 소리가 났다고 합시다. 그럴 때에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에 타 죽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 당신은 그 아이를 제일 먼저 데리고 뛰쳐나갈 것입니다.
혈연 관계를 통한 사랑과 교제가 주는 기쁨은 이처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범죄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원만한 영적 교제가 중단되고, 자백하기까지, 즉 자신을 반성하고 통회할 때까지는 결코 구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통회와 자백이 있었다면 죄사함을 받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요한일서 1:9)고 확실히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맺어진 생명의 관계보다 더 강한 것도 없으며, 더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온 세상과 지옥의 세력이 힘을 합쳐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로마서 8:38, 39).
그렇지만 불순종의 생활은 쉽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어 놓으며, 당신의 기쁨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잠시 동안이라도 심령이 답답하여 고민하고 계신다면, 주님 앞에 마음을 낮추시고 자신을 반성해 보십시오. 당신에게서 기쁨을 앗아간 도둑을 발견했을 때에는 즉시 빛 가운데 드러내십시오. 다시 말씀드려서 왜 내가 기쁨을 잃게 되었는가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당신의 죄를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둑이 들어와서 노략질하도록 부주의하고 나태했던 자신을 깊이 뉘우치기 바랍니다. 결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즐거움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불신자보다 다소 관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나 불신자를 불문하고 죄에 대하여 절대 공평하게 다루십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죄는 낱낱이 하나님 앞에 드러났고,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을 때 이미 그 죄값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신자들의 죄의 문제는 단번에, 그리고 영원토록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베드로전서 2:24).
 
"오직 그리스도는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브리 서 10:12, 17, 18).
 
주 예수님을 끝내 믿지 아니 한 사람은 죄 의 댓가로 영원토록 불못에서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원얻은 사람이 다시금 죄의 댓가로 지옥 형벌을 당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성 령님을 근심케 할 때 교제는 끊어지거나 원만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달밤에 한 친구가 연못에 비친 달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고요찬 연못에는 눈부실 듯 빛나는 은빛 보름달이 찬란하게 비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가 느닷없이 돌멩이를 연못에 던졌습니다. 쟁반같은 보름달은 순식간에 일그러져 버렸습니다.
"달이 산산조각 나버렸군! "
중얼거리는 친구에게 한 친구가 응수했습니다. "달이 깨어지다니! 무슨 소릴 하고 있나.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나. 달의 모습은 조금도 변한 것이 아닐세. 변했다면 연못 속에 비쳤던 달의 모습에 불과하지 안그런가?"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의 마음은 이 연못과도 같습니다. 아무런 장애물이 없으면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당신의 심령에 비쳐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근심케 할 때에는 순간, 평안과 기쁨은 사라지고 내 마음은 돌멩이가 날아든 연못처럼 어지럽게 흔들리게 됩니다.
다시금 당신이 통회하는 심령으로 죄를 자백하실 때에야 비로소 평화롭고 즐거운 교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평안과 불안이 교차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도 연못에 비친 달과 같이 수시로 변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공로가 변하지 않는 한 당신의 구원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당신의 심령과 심령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이 변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영광과, 주님께서 합당히 여기실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고 죄의 소욕으로 채워져 있다면 성령님께서는 근심하시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정죄하시고 대적하시는 죄악에 대하여 당신도 한가지로 정죄하고 대적하지 않는 한 당신은 위로와 기쁨을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4:30)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순종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
(1) 당신의 믿음이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당신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신 주님께서는 결코 변치 아니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고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니라"(히브리서 13:8).
 
(2)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공로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나이다"(전도서 3:14).
 
(3)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베드로전서 1:24,25).
 
당신의 구원과 확신의 터가 되시는 주 예수님께서 결코 변치 아니하시기에 당신의 구원은 안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주 식는 나의 사랑, 조수같은 나의 기쁨
변치않는 주의 사랑, 변치않는 주의 약속
나는 항상 변하여도 주는 항상 동일하네.
사랑없는 나의 맘에 주의 사랑 내 안식처
진실없는 나의 맘에 주의 진리 날 붙드네.
 
이제 끝으로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은 어느 대열에 서서 여행을 하고 계십니까? 이제 진정 하나님께로 돌이키심으로 이 영원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요한복음 3:33) .
 
이 글을 읽으시는 가운데 당신도 이제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구원의 확신 가운데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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