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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처녀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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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847회 작성일13-06-21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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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 다비 / 여성모 역
마 25 : 1-13
이 세상에는 우리가 만나 볼 수 있는 꼭 두가지 부류의 인물이 있읍니다. 첫째 부류는 진리와 구원의 길을 결코 들어 본 일이 없는 그래서 분명히 이 길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부류의 인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부류는 이 진리와 구원의 길을 듣고 이 길을 받아 들였노라고 분명히 고백한 부류의 인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두번째 부류에 속한 자들이 이 길을 받아들이는 각각의 근본 원리는 아주 다릅니다.
 
이 두번째 부류에 속한 자중 한 부분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일반적인 특징을 성경 말씀에 질책하여 잘 요약하고 있는데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디1:16) 라고 말씀하고 있읍니다. 반면에 이 두번째 부류에 속한자중 그 나머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마음과 진실된 마음으로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로 부터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저들이 눈으로 직접 보기를 바라는 것인데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선포하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읍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어지는 5절의 말씀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수 없느니라" 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조건을 말해주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이 왕국과 이 왕국에 들어가는 출입구를 인식하는 능력은 저들이 거듭남으로서 명백히 생겨 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새로 태어남이라는 문제를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지금까지 지켜온 자기의 견해, 욕망, 감정, 만의 변화로 간주하기 쉬운 것입니다. 이 새로 태어남이란 진정으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하나의 중대한 변화로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을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 쓰여있는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말하면 새로 태어남이란 "옮기어 짐" 을 말합니다 - 즉 "우리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1:13) - 마태복음이 현저히 우리에게 꺼집어 내어서 보여 주고자 하고 있는 그 옮김 즉 이전과 전혀 다른 위치로 우리를 내려 놓음을 말합니다.
 
주 예수님은 4 복음서 저자들의 조명에 따라 각각 다른 관점으로 증거 됩니다. 즉 이렇게 성령께서 즐겨 각각 다른 관점에서 주님을 조명하여 나타내신 이유는 구주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 낼 뿐 아니라 더욱 충만케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축복을 충만케 하시기 때문에 영존하시는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모든 위대하심과 지혜와 사랑 그리고 권능의 축복이 우리 주님안에서 밝히 드러 나는 것입니다. 주님안에 이 모든 축복이 내재하고 있으며 주님을 알게된 믿는자의 경우에는 주님을 알게되어 다음과 같이 되게 되는데, 믿는자의 기쁨은 자기의 마음을 그리스도에 고정해 놓음으로 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모든일에 있어서 주님과 일체감을 갖고 있을때 비로소 느낄 수 있게되며 비로소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끌어당기는 인력의 한 중앙에 있으시며 그는 그의 최상의 기쁨의 대상으로서의 우리 주님 주변을 공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게되면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든 임무와 사역을 이와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갖고 이 권위를 행사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읍니다.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주님을 하늘로부터 오신 주님이신 마지막 아담으로 묘사하는데 마태처럼 주님의 혈통을 추적하여 계보를 따라 내려가는것이 아니라 계보를 거슬려 원조를 찿아 올라 가서 "그이상은 아담이요 그이상은 하나님 이시니라" 라고 하여 우리주님을 부지런히 그리고 쉬지않고 선을 행하시며 모든 의를 이룬 하늘로 부터 오신 주님이신 마지막 아담으로 묘사 하였읍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우리주님은 메시아로, 모든 예언의 대상으로, 그림자의 실체로 그리고 유대 종교의식의 모형으로 나타나고 있읍니다. 주님께서는 기대하던 자손이요 옜 것의 모형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그들의 자손으로 약속하신 그 약속이신것과 같이 이 마태복음 속에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육신에 따라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이심을 보여 주고 있읍니다. 그러나 천국에 관한 언급은 이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에게는 매우 특별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 11절에서 우리가 크게 주목하게 되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하고 한대목에서 천국에 관하여 언급되고 있읍니다.
 
한편으로 모든 유대백성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전적으로 이땅에서 왕국을 기다렸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수치를 당하며 오심을 예언한 모든 예언의 말씀을 저들이 전적으로 간과 했음으로 당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저들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천국 비밀에 관한 주제는 이제 저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읍니다. 즉 저들에게 이 비밀의 왕국이 저들이 거부한 주님이 이땅에 계시지 않는 동안에 어떻게 건설될 것을 보여 줌으로서 말입니다.
 
한편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비밀왕국의 존속기간은 하나님의 목적하심이 발전하여 성취되는 기간으로서 인자로오신 주님께서 세상 사람들로 부터 버림받으신 때로 부터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재림하실 때 즉 의인에게는 허락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한 어떠한 자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이 왕국 즉 저들 의인들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저들 의롭다 함을 입은자들이 해처럼 밝게 빛날 그때까지의 기간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왕국이야 말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와 이세상에 속한 자들과의 완전하고도 철저한 분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세상에 속한 자들이 현재 서있는 그대로의 저들의 지위는 어떤 것입니까? 저들의 타고 난 실질적인 지위란 어떤 것입니까? 저들이 처한 지위란 단순히 하나님과 적대적인 상태에 있다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며 즉 모든 거룩함으로 부터 분리되어 비난 받아 마땅한 입장이나 공개적인 반항이나 분노를 표출하는 그러한 입장에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면전에서 아주 완전히 쫓겨난 상태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존전에서 '확실히' 거듭말하거니와 '확실히' 쫓겨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창3:24)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그의 죄없다함이나 정결함을 상실 하였읍니다. 그리고 더이상 죄없는 세상에는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는 존재가 된것입니다. 하나의 평이한 계율이 사람에게 주어졌는데 이사람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함으로 이계율을 범한 것입니다. 이 실과를 따 먹는 것에 관한 사실 그자체는 단순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사건은 중대한 결과를 수반하게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이사건이 조그만하다 하는 사실이 오히려 계율을 범한 죄성을 더욱 가중시킨 것입니다.
 
사건 자체로서 우리가 바라본 그 행동은 사소한 일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행위는 현존하는 상황에서 천국 권위에 가할수 있는, 있을 수 있는 모든 모욕적인 행위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되었읍니다. 죄에 대한 동기 유발의 정도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죄의 유죄성의 정도는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은 이와같이 시작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바 이 세상은 이와같은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쫓아 내셨읍니다. 그때 그의 죄인된 상태로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거할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라는 말씀과 같게 된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세상은 이와같이 하나님으로 부터 쫓겨난 상태에 처해 있으며 수고와 슬픔과 죄와 고생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죄악은 하나님과는 상관 없는 일이며 하나님안에서는 시작도 되지 않았읍니다. 즉 이러한 죄악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로 인하여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여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있으야 할 반응 즉 정결한 상태로 회복과 같은 반응이 있었읍니까?-전혀 없었읍니다. 다시말하면 이 세상은 다시는 죄가 없는 세상으로 될수 없었읍니다. 근본적으로 일단 죄를 지었던 자는 결단코 다시는 순수한 죄없는자로 될수는 없는 것입니다. 즉 무죄함의 바로 그 근본이 한번 그 정결함을 잃어 불결하게 되었다면 도저히 다시는 거룩하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죄함이란 한번 그 무죄함을 잃어버리면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더이상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만이 이 죄를 없앨 수 있는 분 이십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 죄를 없앨 수 있으십니까? 하나님 당신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함으로 한없는 자비가 있는 새로운 세대(역주:하나님의 목적의 성취과정에 있어서 한 구분가능한 경륜)를 펼치시고 한 왕국을 건설한 다음에 이세상으로부터 이 새로운 세대에 건설한 왕국에 합당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를 지었었지만 이세상은 그곳에 죄인의 상태 그대로 내 버려 두어 지지는 않았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대하여 자신을 드러 내 보이시며 자신의 계획하심을 이 세상으로 하여금 다 알게 하였읍니다. 처음에, 아담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 라고 부르실 때에 아담은 그의 죄를 그 자신 앞에 드러 내어 밝히 보게 하였읍니다. 그 다음으로 노아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어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잇읍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노아로하여금 세상 가운데서 부름심 가운데 있게하여 홍수 이후에도 교회의 모형이 되도록 노아를 보존 하셨읍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유대 백성을 부르시어서 율법을 주시고 모든 믿는 자의 믿음의 대상으로서 모형과 예식 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 내셨읍니다. 마침내는 하나님의 최상의 사랑을 나타내신 이 모든 하나님의 드러내심도 한낱 사람 마음의 완전한 적대행위를 훨씬 더 눈에 띠게 드러 내게 하는데 불과 하였을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읍니다. : 성경에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눅20:13)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같은 세상의 단계에서 우리가 사람을 볼때 말하자면, 그들은 사단과 동맹을 하여 훨씬 결의에찬 적대 행위와 훨씬더 지독한 악의에 찬 행동을 더욱 새롭게 하는 위치에 있으며 극도의 증오심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이 세상이 갖는 느낌이란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눅20:14) 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자 하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이런 패륜적인 불법 행위가 나타났읍니까?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자비하심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의 부족을 채워 주시고 그들의 죄를 없애야 하실 바로 그때 였읍니다. 저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겠노라고 악을 쓰며 큰소리로 외칠 바로 그때 였읍니다. 주님께서 화목하기 위하여 그리고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그 사랑의 온유를 보이기 위하여 오셨을때, 그때에는 저들이 하나님을 저들 가운데서 제거해 버리는 일 말고는 아무 일도 행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 고난 가운데 오시며 저들의 사악함 속에 있는 이세상의 조롱 가운데 오셨을때 저들은 우리 주님의 영접을 거절 하였읍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이셨읍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우리 주님을 이 세상에서 좇아 내버린 것입니다.
 
한편 이와같이 사람이 행하는 최후의 발악 속에서 우리는 단순히 저들의 반항을 아니, 심지어 그보다 더한 도전적인 태도를 보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게 됩니다. 저들은 주님의 굴욕 당하심을 절호의 호기로 이용하여 주님을 모욕하며 경멸하였읍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저들 사람에 관한한 저들은 우리가 지금 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어린양 우리 주님을 몰아 내듯 쫓아 내었읍니다. 성경에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 하노이다" (눅19:14) 한 말씀은 실질적으로 우리 주님을 쫓아내는 결정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한편 믿는 자들은 생각이나 느낌이나 사랑 그리고 관심에 있어서 까지도, 이 세상이 결의에 찬 적대행위를 하는 그 대상이 되시는 우리 주님과 연합하는 자들 입니다. 즉 이 세상이 저들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는 이 왕께서 이 믿는자들이 모셔 섬기는 믿는 자들의 왕이 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곳임을 알며 이 세상은 모든 정의와 진리를 거절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유죄를 선고 받았음을 아는 자들 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 자신이 직접 성경에 말씀하셨듯이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12:31) 함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 (요19:30) 라고 외쳤을때 심판은 이미 내려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바로 그 행위속에 저들에 대한 심판이 인봉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항하여 가장 결의에찬 그리고 가장 철두철미한 사람의 적대행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실때 그 절정에 달하였읍니다. 사람의 악의가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더이상 이에 더 나아갈 수는 없는 그 곳에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로 나타났읍니다. 죄가 더하였다 하나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넘쳤읍니다. (롬5:20) 사람쪽에서 극악 무도한 적대행위를 보여준 바로 그 행동이 하나님편에서 최고의 사랑의 문을 열어 젖히게 하였읍니다. 여기서 죄와 사랑이 만납니다. 말하자면 각각 할 수 있는한 최대로 끌어 당겨진 한점 곧 한중앙에서 죄와 사랑이 조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조우에서 사랑은 승리르 얻었고 죄를 이겼으며 영원한 의를 이루게 된것입니다.
 
이와같은 세상에 대한 심판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읍니다. 성령께서 그 자신이 몸소 믿는 자들에게 세상에 대한 심판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성경에 "보혜사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 하시리라" (요16:8)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이어서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 하시리라... 심판에 대하여라 하면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요16:9,11)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믿는 자들은 저들이 심판받은 세상에서 즉 하나님을 거부함으로 유죄 평결을 받아 선고을 받았지만 형이 아직 집행되지 않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형이 선고되고 나서 최종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중간 위치에 처해 있읍니다.
 
이와같이 이 세상 사람의 맹열한 분노를 나타내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믿는 자는 그 자신이 하나님께 완전히 용납 되어진 자 임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믿는 자가 기쁨을 얻고 그 안에서 쉼을 얻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타락한 악행에 대하여 자비하심으로 넉넉히 초월해 있으시며 사람이 행하는 극도의 증오에 대하여도 사랑하심으로 넉넉히 이기셨읍니다. 저들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창으로 옆구리를 찔럿었을 때 저들은 가장 혐오스러운 범죄의 극치를 보였으며 이때 주님께서는 우리 주예수그리스도의 피와 물로서 이 죄를 다루어 모든 깨끗치 못 한 것들을 정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과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이 열처녀의 비유로부터 이 세상에는 믿는 도리에 있어서는 하나님 백성과 연합하여 있으면서 겉으로는 하나님백성에 속한 자인양 하면서도 실제 모습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지 못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주님 보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 조차도 바라지 않읍니다. 우리 주님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 보는 것이 저들 심령이 간절히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저들의 영혼들은 오소서 주 예수여 속히 오소서라고 부르짖으면서도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지는 아니 하였읍니다.
 
저들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 (눅12:45)(마24:48) 고 외치고서는 그들 자신의 쾌락에 깊이 빠져 계속해서 쾌락을 추구하는 이런 종들과 많이 닮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주님의 얼굴을 마주 보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것을 갈망하여 기대하고 있는 가운데 기다리고 있는 기다림이 갖는 기쁨과 환희 그리고 천국 행복의 어떠함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열처녀의 기사 속에서, 심지어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자로 믿어 외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런 형태의 믿는 도리가 나아갈수 있는 한계에 대한 한 증거를 갖게됩니다. 슬기있는 다섯 처녀가 있었다 하나 미련한 다섯 처녀에 해당하는 저들 모두도 신랑을 맞으러 나아갔읍니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동일한 목적을 갖고서 저들 모두도 나아간 것입니다. 저들도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똑같이 서로 교제 가운에 있었읍니다. 저들 모두다 증거의 등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점에서 저들은 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다르단 말입니까? 바로 이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저들은 신랑을 영접하는데 꼭 필요한 단 한가지를 아니 유일한 이 한가지를 갖이고 있지 않았읍니다. 이것 하나 만으로도 저들을 이 주인에게 적합한 짝이 되게 할 수 있는 바로 이것을 저들은 갖고 있지 않았읍니다. 이 유일한 것이란 즉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 빛을 수여 받는 것, 하나님 곧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의 영혼을 충만케 해주며, 신랑의 모습이 영광의 화염속에 나타나심만을 기다리고 있는, 기쁨의 기름 곧 성령의 기름이 저들 슬기로운 처녀들의 영혼 속에서 만들어 낸 열열한 사랑의 결정체가 저들 어리석은 처녀들 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들이 갖고 있지 못한 반면에 믿는 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와 믿지않는 자인 이세상을 구별하는 커다란 차이점을 만들어 내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마25:6) : 하늘나라에 속한 슬기로운 처녀들이 다 일어났읍니다. 이 슬기로운 처녀들은 비록 그들 속에 많은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자신들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서 일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는 이 소리에 응답하는 것이 있었읍니다. 이 미련한 처녀들도 저들의 등을 준비하였지만 이 극적인 순간에 저들의 등불은 불이 켜지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에게는 달리 아무런 구제의 방법도 없단 말입니까? -결단코 없읍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섭게 선포하신 말씀에 일렀으되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계22:11) 하십니다.
 
여기에서 알곡과 가라지 사이에 완전하 구별이 이루어집니다. 저들의 목적 소망 그리고 저들의 교제는 완전히 다르며 즉, 다른 정도가 아닌 정 반대적인 것임으로 결코 융화될 수 없는것이라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세상에 속한 것이며 다른 한쪽은 하나님에 속한 것입니다. 즉 한쪽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소생케 되며 다른 한쪽은 불사르게 하기 위하여 보존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라지는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마13:30)
 
그렇다면 알곡이 왜 아직도 이 세상에 보존되고 있는 것입니까? 이유는 오직 우리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 은혜의 증인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들이 그의 소유가 되어지고 이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말하면 이들과 영광스러운 머리 되시는 주님 사이에 분리 되어질 수 없는 한몸을 이루고 있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증인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듯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3)
 
그러면 영광의 주님을 거절하여 주님을 세상 밖으로 내어 쫓듯이 몰아낸 범죄에 대하여 유죄로 선고 받은 이 세상 가운데서 믿는 자들 여러분들은 이와같이 구별되어 있읍니까? 여러분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 대하여 형이 결정되고 그리스도의 성도들 가운데 최후의 성도가 곳간에 모아 넣어질 때까지 그 형집행이 보류되고 있는 심판받은 이 세상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이신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읍니까?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 느끼는 것들, 바라는 것들과 연합하여 아니 이들모두와 함께하는 모양과 연합하여 살고 있단 말이며 또한 살고 있을수 있단 말입니까? 믿는 자의 기쁨은 주님의 영광이 됩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 든지 주의 적과 연합되어 있는 그 곳 그 어디에 주의 영광이 있읍니까? 결코 어느 곳에도 주의 영광은 없읍니다. 주의 오심을 기쁨으로 바라보는 성도는 느낌이나 바람에 있어서 주님과 함께하는 자이며 주의뜻이 곧 자신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그 자신에게로 영접하기 위하여 오실 그때를, 이어서 주님을 거스리는 모든 것들이 말끔히 청소되어질 그때를, 그리하여 주님 백성들이 주와 함께 다스릴 그때를 지금 묵상해 보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모든것들, 즉 지금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에 속한 모든것들이 주가 오시느 그 찬란한 보습으로 인하여 멸망해 버릴 그때를, 그리고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주의 입으로 숨만 한모금 들여 쉬어도 삼키어 없어질 그때를, 여러분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묵상할 수 있읍니까? 그때에는 우리 주님을 거스리는것은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주님과 함께 그기서 더이상 같이 거할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성도의 완전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성도가 찿고 갈망하여 서두러고 있는 바로 그 일이며 곧 우리 주님의 오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여러분 각자의 삶 속에서 개인적으로 소망하는 진정한 바람이 되고 있읍니까? 이런 바람은 여러분의 몸에 밴 체험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체하지 마소서,' 다시말하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부르짖고 있읍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의 천국 주인이자 천국 신랑되신 분에게 훨씬더 합당한 자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갖이고 노력하고 있읍니까? 그리고 주님이 나타나실때 여러분의 주님을 맞이하여 그분에게 불빛을 비추어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등이 잘 준비가 되어 있도록 점검하고 있읍니까?
 
이 일이야말로 여러분의 바람이요 환희요 기쁨이 되게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 만찬 자리를 바라보며 그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여러분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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