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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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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164회 작성일13-06-21 01:34

본문

J. N. 다비 / 여성모 역
요7:37-39
이 본문 성경 말씀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명절이 하나의 모형이 되는 이 환경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님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즉 성경은 우리 주님을 지금 현재는 이땅에 계시지 않는 주님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음 말씀에서 장차 있을 우리 주님 자신의 이땅에 계시지 않음을 예감하고있는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그 때를 대비하여 위로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즉 이 말씀은"나의 가는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13:36) 라고 말씀하신 그곳에서 주님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신 결과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으리라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베드로가 큰소리로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요13:37) 라고 말할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14:1) 라는 말씀으로 위로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과연 너희는 나의 몸을 입고 너희와 함께 있음을 기뻐하지 말찌니라. 그러나 내가 '곧 다가올 그때' 너희와 함께 있지 않다하더라도 너희는 나를 믿을찌니라 너희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도 하나님을 믿는도다 내게도 그리하여라 즉 이제는 나를 보지 않고도 나를 믿으라는 말씀과 같은것입니다. 즉 이말을 다시 풀어 말하면 내가 너희곁을 떠난다 하더라도 나는 너희를 다시 볼것이요 그때 너희 심령은 기뻐할찌니 아무도 너희에게서 이 기쁨을 뺏을 자가 없느니라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곧 다가올 그때' 라는 말은 믿는자들의 위치를 두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떠나셨읍니다 그리고 믿는자는 주님의 이땅에 계시지 않음을 이해하고 있읍니다. 다시말하면 믿는자의 바램이란 오로지 지금 이땅에 계시지 않는 주님께 향하여 있다는 말입니다. 믿는자는 그래서 아직은 그의 기쁨을 완전한 것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주님께서 이땅에 계시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렇다는 말입니다.
 
즉 믿는자는 주님께서 나타나실 그 때를 바라고 있으며 그 때를 향하여 마음을 서두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우리는 "우리 주님이 계신 그대로" (요일3:2) 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는자는 예수님께서 계신곳에 지금 당장 자신이 같이있지 않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읍니다 사탄이 왕국을 세우고 있는곳 즉 자신의 나라를 빼앗긴 이곳 바꾸어말하면 믿는자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으며 기록된바 사탄의나라 백성들이 스스로 일컽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계18:7) 라고 말하는 그곳에 살고 있읍니다. 여기 이 사탄의 왕국에는 주님께서 이땅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믿는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느끼는 바와 동일한 정도로 의식하고 있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울부짖으며 구원을 구하는자도 없고 소리쳐 외치면서 장차 오실 주님을 찾는자도 없읍니다. 즉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후5:2) 와 같은 말을 하는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자들로서의 성품이 있읍니다. 이런자들은 주님께서 세상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과 저들의 대적이 이땅에 있다는 사실과 저들 스스로가 저들의 주님을 배척한 세상에 그리고 저들의 적들에게 주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지배당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몸에 밸 정도로 잘 의식하고 있는 그러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 (배후3:13) 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믿는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사람들과 세상것으로부터는 이곳 사탄의 영토에서 저들의 분깃을 얻을것을 믿고있지 않습니다. 저들의 것이란 저들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기업" (벧전1:4) 이며 이제 저들은 바라봄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기업가운데서도 진정한 기업을 받게 되는것입니다. -즉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1:9) 말씀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저들은 이곳에서 "현재는 즐겁지 않고 슬픈" (히12:11) 고민과 시련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께서 진정 사랑하는 아들이 저들에게 가져다 준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아는 복된 의식을 갖인자들이며 저들은 또한 성령과의 교제를 통하여 이 사랑을 나누어 갖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성경에 이른바와같이 두개의 도성이 있읍니다. 바울은 모든 믿는자의 이름으로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히13:14) 라고한 장차올 한도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는자들은 "성읍은 과괴되리라" (사32:19) 고한이 성읍에 잠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읍니다. 나머지 또하나의 도성은 "약탈을 당한 성읍" (사24:10) 또는 그 동의어에 해당하는 '바벨론 성읍'을 말합니다. 즉 이후자의 도성은 우리 믿는자가 찿는 전자의 도성과는 완전히 구별됩니다: 이 두 성읍은 통일되어 있지도 않으며 통일 될수도 없읍니다. 서로에게 상관없이 정반대되는 두개의 독립된 자치조직이며 서로에 대하여도 상호 대립하고 있읍니다.
 
믿는자의 심령가운데는 성령이 행하는 다음과 같은 증거가 있읍니다. 즉 믿는자는 타락한 도성 곧 심판날에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잔을 받을 "큰성 바벨론" (계16:19) 에 둘러 싸여 있다 하더라도 믿는자의 도성은 의무를 다하여 복종하고 있는 율법에 속한 도성이 아니라 그 나타남을 고대하고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증거가 있읍니다.
 
믿는자는 육체 가운데서 이 "약탈을 당한 성읍" (사24:10) 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는자가 "이른곳은 사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히12:22) 인 것을 의식하고 있읍니다. 이 하나님의 도성에 믿는자는 속해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 하나님 도성의 시민이라는 말이며 이 도성을 분명히 알기 위하여 이 도성을 향하여 서둘러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이 증거하는 것은 이제 믿는자는 그 곳에 거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 속하여 있지 않은 다른 체제를 육안으로 구별 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자가 속하지 않은 다른 체제에서 거한다고 말할때는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10:37) 할 그때 즉 주님께서 사탄의 통치를 무너뜨리고 영원히 다스리실 그때를 기다리며 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이 의미하는바는 우리 주님께서 이땅에 계시지 않으시다는 사실외에(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남편 잃어 충격가운데 있는 과부의 처지가 되어- 이말은 저들이 광야에 있는 동안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가기 직전 의 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것처럼 번민하는 자들과 성령께서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도 증거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또 특별히 후자의 때 즉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가기 직전 의 때 즉 성령의 부어 주심이 특별히 막 나타나야 할 바로 그때 다시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바로 직전의 때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노여 있던 환경에 대하여 서술을 하고 있는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명절인 초막절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7:1) 이 말씀속에 예수님을 죽이려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38년동안이나 베데스다 못에서 헛되이 병낫음을 구하였던 병자의 병을 낫게하여 주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베데스다 못은 율법과 같이 그 자체로는 선한것이며 유익한 것이었지만 이 연못을 사용할 수 없기 대문에 이 병자에게는 완벽하게 쓸모없는 것이 되었읍니다. 즉 이 병자 자신의 병때문에 이 연못 으로부터 병낫음을 받을수 있다는 희망을 전혀 갖일수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이곳을 지나가지 않으시고 또 권능의 말씀으로 이병자에게 온전함을 입어 오래 살아라라고 말씀하지 않았더라면 이 병자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병낫음을 입지 못한채로 남아 있어야 했읍니다.
 
초막절은 광야에서는 지켜지지도 않았으며 광야에서 지켜질수도 없었읍니다. 그렇다면 이 초막절은 분명히 지금까지 이루어 지지 않았지만 이루어질 그 놀랄만한 모형중의 하나입니다. 이 명절은 유대인들이 큰사건을 기념하여 지키는 일년중 세 큰 명절중에 그 세번째 명절입니다. 이 초막절 명절이 처음 지켜진때는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 안으로 들어간 이후였읍니다. 바로 그 와같은 초막절의 분위기는 광야에서는 지켜질 수 없다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초막절은 칠일동안 계속되고 제 팔일에도 계속되는데 이날 제팔일은 명절의 마직막 큰날로 안식날이 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유대 백성들이 장막속에 거하였던 것을 기념하여 지켜진 명절입니다. 다시말하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거하였었지만 명절을 지킨 이때는 광야를 벗어나 있음을 기념하였다는 말입니다. 초막절은 엄숙한 집회의 날이었으며 수확의 날이었으며 또한 유대백성들이 "나그네와행인" (벧전2:11) 되었던자들이며 이국땅에서 방랑하던자들 이었다하더라도 그러나 이제는 유대백성들이 광야에 있었던 기간 내내 이곳을 목표로 하여 여행을 하였던 바로 그땅에 정착 하였음을 인정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거니와 이 초막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계시하신 세대 가운데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하나의 모형인 것입니다. 유대백성들이 그 광야상태에서 완전히 빠져 나왔을 때까지 초막절이 지켜질수 없었던 것처럼 초막절은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한 모형이 되며 백성들이 그들 자신의 땅에서 모이는 것을 증거 할 세번째 큰 모형은 그 최후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형의 실체로서의 사실들이 이를 잘 증명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죽여 그피를 뿌림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애급사람의 종노릇한데서 해방(구원)된 것을 기념한 명절이자 어린양을 죽여 그피를 뿌림으로서 주예수 그리스도의 희생하심으로 교회의 구속을 이루어 내심을 예표하는 명절인 유월절은 애급사람의 종되었던것 보다 더 많은 종노릇 하였던 곳(세상)에서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우리주님의 우리의 죄에 대한 속죄하심의 절대적 사실에 관한한 우리를 건져(구원해)내심에 있어서 성취된 명절인 것입니다. 그 구속의 결과들은 실로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니며 그 마지막 구속 받은 죄인이 영광가운데 있게될 그때까지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증명 가능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 즉 우리 주님의 즉으심과 우리죄의 속죄를 통해서 유월절은 하나의 명백한 성취를 이루었음을 알수 있읍니다.
 
토지 소산물의 초실들의 수확이후의 수확에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제인 칠칠절 또는 오순절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에 관한한 그리스도인 교회의 첫열매들이 나타났을때에 명백한 성취를 이루었읍니다. 즉 오순절 날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신가운데 성령확장의 드러 나심 즉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사역의 첫열매가 나타났을때에 여기에서도 (칠칠절) 오순절은 부분적인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의 결과들도 완전히 성취되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순절이 어느정도 의심의 여지없는 성취와 그 표면상의 성취를 이루었다하더라도 그 결과는 아직도 진행중이며 계속하여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나 초막절의 모형은 어떤 의미에서도 결코 성취도 어진적이 없읍니다. 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광야를 와전히 벗어나서 그들 자신의 땅으로 인도되어와서 그들의 그 복된 입성을 큰소리로 찬양하며 기념할 그때에 성취되기 위하여 초막절은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채로 보존되고 있읍니다.
 
이러한 명절들에 일어났던 그 환경이나 분위기 들을 통하여서도 그 명절들의 성취된 사실 여부를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유월절과 유월절에 이어 행해지는 절기 때에는 흠도 점도 없는한 이 어린양은 어떠한 흠도 없는 어린양 이어야 하고 그리스도 그자신을 희생제물을 드리심과 정확하게 일치하며 첫이삭 한단은 우리주님의 부활하심에 터지지 않은 예물 즉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 (고전15:20) 를 나타 냅니다.한편 오순절에도 누룩을 섞어서 구운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어 드리는 한예물이 만들어 집니다. 이 모형의 성취속에서 우리는 이 두예물 즉 오순절예물과 속죄의 날에 드려진 예물사이에 놀라운 대조를 보게 됩니다. 성령계서는 이 예물의 모양을 갖고 제자들에게 강림 하였읍니다 그러나 질그릇 속에 담길 능력의 큰것에 누룩이 들어 있읍니다. 다시말하면 능력의 크신것이 본성이 타락한 것과 썪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누룩이 있는 과자라는 말입니다. 전자의 절기 즉 초실절에서 예물은 누룩이 있는것이 아니라 누룩이 없는 예물 즉 (곡물의) 첫이삭 한단이었읍니다. 이 예물은 어떠한 옵점도 한점의 죄도 없으신 주님, 어떤(부패)타락도 보지 않으신 주님 그리고 주님안에는 어떤 누룩도 썪여있지 않은 우리 주님의 예물 되심을 놀라울정도로 잘 예표하고 있읍니다.
 
유월절 어린양에게 어떤 모양으로든지 흠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어떤 속죄함도 존재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월절 어린양이 결점이 없이 완전무결한 상태로 희생제물로 들여 졌으면 이 예물은 흠이 없기 때문에 열납되어졌읍니다.
 
아직도 장차 기념되어져야할 초막절은 그땅의 소산물이 거두어 들여 졌을때 그 일곱번째 달의 제 십오일날에 가나안 땅에서 지켜질 것입니다. 그때는 곡식과 포도의 수확이 끝난 후입니다. 이때에 보여 주는것은 성도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 (고후5:2) 즉 성도들의 부활한 뭄을 입고서 "구름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 (살전4:17) 할 그때에 세상 마지막 장면속에 있을 성취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교회의 그 모든 적들로 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은 그때의 교회에게 기쁨과 안식과 충만함의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까운 장래에 다가오는 그리고 명백하게 성취되지 않은 모형인 초막절에 주님께서 올라가시는 일에 관여하여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요7:3-4) 하고 빈정거렸읍니다.
 
우리 주님을 믿지 않았던 주님의 형제들의 이런 빈정거림은 우리 주님에게 압박이 되어 "자신을 세상에 나타 내소서" (요7:4) 즉 "주님 당신을 나타내소서" 하는 말로 강요 하다시피 하였읍니다. 주의 형제들은 주님께서 행한 주장들을 관철하기에 적당한 그때에 주님을 드러내시는 일을 행하시기를 원했읍니다. 즉 주님을 그와 같은때에 주님을 드러내시라고 주님에게 제의하면서 주님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드러내시는 일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의 때는 아직이르지 아니하였노라" (요7:6) 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이 말은 주님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 내실 주님의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인 성도들에게는 기쁨이 되고 주를 믿지 않는 경건치 아니한자들에게는 공포의 순간이 될 그 때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계1:7) 그때에 주님은 주님 자신을 드러 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이 인자가 구름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이때는 주님께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실 바로 그때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주님께서 오셔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심으로 이세상을 당황케 하시지는 않으셨읍니다. 이사실은 죄가운데 있는 세상에 대하여는 자비요 -주님의 진실로 오래 참으심이며- 인내의 바로 그 극치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진실로 오시는 그때에는 주님께서 범죄한 모두와 불공정한 행위를한 모두 즉 죄를 행하거나 사랑한 모두를 주님의 통치 영역 밖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그러면 왜 그리하십니까? 왜냐하면 주님은 거룩 그자체 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죄를 바라볼 수도 없으십니다. 즉 주님이 계시는 곳에는 죄가 그 거할 처소를 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주님이 오시면 가공할 정도의 멸망의 마당비가 거짓된 것들의 모든 피난처와 거룩함에 반대하는 모든 것들을 말끔히 청소하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인내심은 비교적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의 형제들의 제안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시고 그때 당시에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하셨읍니다. 즉 주님의 때가 아니라고 하신것이 바로 지금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란 바로 저들 오늘날 성도들의 구원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다면 오늘날 성도들은 거두어 들여 저서 또하나의 왕국으로 결코 옮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거두어 들여 나와져야할 자들도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저들을 기다리며 저들에게 간청 하면서까지 주님께로 나와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할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오늘날의 성도들은 이 명절날에 주님께서 행하신것 처럼, 올라가셔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7:37) 고 선포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요7:30) 그 명절에 자신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시지 않으셨던것은 아직도 장차 거두어 들여져 들어와야할 성도들을 위하여 세상과 성도들과 참으로 복되고도 복된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올라가시긴 하였지만 비밀리에 올라가셨읍니다.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7:8) 라고 하신 우리주님의 바로 이 말씀은 광야 가운데 있었지만 지금은 그 광야를 빠져 나와서 기뻐하며 자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식이 존재할때 그때는 이미 의심의 여지없는 성취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요7:4) 하는 말은 주님의 형제들의 요구이었읍니다. 이 요청을 주님께서는 거절하였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셔야만 하기전까지 주님께서는 비밀리에 올라 가셔서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여 주님께 나아와 우리주님의 자비를 함께 나누어 가지도록 그 명절에서 가르치셨읍니다.
 
주의 표적이 사람들에게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였으며 그 영향의 결과로 바리새인들은 분노하여 주님을 잡으려고 관원들을 보냈읍니다.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더 있다가" (요7:33)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에게 빛이 있는 동안에 저들에게 그 빛을 믿으며 빛가운데서 걸으며 그렇게 구원 받기를 청하는것처럼, 여기 이 말씀에 주님이 갖고계신 독특한 사랑의 표시가 있읍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어서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요7:34) 라고 말을 더하셨읍니다. 너희가 나를 만나서 기뻐할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지금은 너희가 악의에차서 증오심으로 그리고 적의로 가득차서 나를 찾고 있지만 어떠한 아주 다른 동기에서 나를 만나려고 애쓸 그때가 올 것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태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곳에 올수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요13:33) 라고 주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주님의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재의 위치가 이와같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현재 명백하게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은 곳에 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계시는 그곳에는 아직 저들이 올수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와같은 일이 고통스럽고 또한 비통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현재 경험하고 있는 일이란 것이 사실입니다. 비록 자비로운 주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상하기는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읍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두신 "그것"의 성실하심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주님과 함께 할 것이다 하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저들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이 바라마지 않는 그러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일야말로 그리스도의 존전에 있게될 즉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주님" (계1:5)을 바라보게될 다시말하면 "그의 계신 그대로 볼" (요일3:2) 그와같이될 하나님백성들의 영광스러운 소망을 형성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자들 이라고 한다면 이일이야말로 우리가 바라고 있는 그 모든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이땅에 사는동안에 진실로 우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 곧 복된 보혜사가 계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의 가르침과 교훈하심을 통하여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을 더바라며 아버지 하나님을 더사모하여 우리 주예수님을 더 소망하도록 인도함을 받읍니다. 그리고 또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애정이 예수님을 향하도록 인도함을 받으며 또한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임재를 바라도록 인도함을 받읍니다. 즉 우리가 살고있는 이땅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실로 우리의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그곳 즉 만저보아서 느낄수 있는 대상의 경우에라도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 대상이 있는 곳에 있기를 몹시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랑이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의 애정을 우리 심령 가운데서 끌어내어 예수님께로 향하도록 인도함을 맏읍니다. 그리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8:22)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오늘날 현재의 성도들에게 합당한 진리라는 사실을 실질적이면서도 고통스럽게 우리들로 하여금 의식하지 않을수 없도록 인도함을 받읍니다.
 
이제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묻노니 여러분들은 참으로 비통한 마음으로 그리도스의 이 말씀에 대한 인정과 지각에 이른 적이 있읍니까? 여러분은 이 "약탈을 당한 성읍" (사24:10) 안에 있는 것의 모든 현존하는 체제와 완전히 구별된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읍니까? 심지어 애정과 욕망을 추구하는것에서도 이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 있다라는 사실도 의식하고 있읍니까? 즉 여러분의 애정이 이미 떠나버리신 주님 그리고 세상이 사랑한 어두움에 세상 그자신을 맡긴 바로 그 세상이 쫓아 내버린 주님에게 완전히 도취되어 넋이 나가 있을 정도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읍니까? 여러분은 밤이 깊은 줄을 의식하고 있읍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낮이 즉 주님이 나타나시는 영광스러운 그날이 가까이 왔음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비록 주님께서 지금까지 주님 자신을 공개적으로 세상에 나타내시는 것을 억제하셨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의 심령 가운데 주님 자신을 나타내셔서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땅에 계시지 않는 주님을 이땅에서 만져서 알수 있고 현존하는 모든 대상과 기쁘고 즐겁게 해 주는 모든것보다 더 기뻐하며더 자랑으로 여기며 더 사랑하도록하신 주님 그 새벽별을 믿는자는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밤에 속한자들은 물론 아니며 또한 어두움에 속한 자들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들은 빛의 자녀로 행하고 있읍니까? 우리는 지금의 때가 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읍니다. 왜냐하면 "의로운 해"(말4:2)가 지금 현재 분명히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은 감추어져 있고 주님의 빛은 최고의 영적 시각을 가진 형제의 눈에서 조차도 희미하게 보여지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의 바라는 모든 것들은 다시금 되 돌아오는 이 빛을 향하여 몸을 완전히 돌려 열열히 그곳을 향하여 있는 것입니까?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시130:6) 우리가 이 빛을 더 기다리고 있습니까: 거듭 말씀 드리거니와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우리가 이 빛을 더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형제여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는 이 질문은, 우리가 이땅에 계시지 않는 주님을 의지하고 살고있는 현재의 우리의 상태를 분명하게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지금 현재 이땅에 계시지 않는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존재인가하는 이 의문에 대한 이해 즉 이 의문에 대한 영적이해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의문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친히 대답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9:5) 우리의 빛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는것은 아니지만 주님은 오실것입니다. 샛별은 날이 샐때까지 숨어 있읍니다. 그러나 일단 새벽이되면 "의로운 해가 떠 올라서 치료하는광선을 발하리니" (말4:2) 말씀과 같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 일이야말로 믿는자가 서둘러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일입니다. 이 믿는자는 그날을 갈망하고 있읍니다. 밤은 믿는자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물론 밤은 믿는자의 행복은 더더욱 아닙니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살전5:7) 하는 말씀에는 자는자들은 밤에 잡니다 그러나 믿는자는 밤에 속하지 아니 합니다. 그러므로 밤에 속한 것들로 부터 아무런 기쁨도 얻을수가 없읍니다. 믿는자는 현재 이와같은 입장에 놓여 영광을 기다리며 그 자신에게 이 영광을 얻도록하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잇읍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자는 자기안에 증거가 있고 " (요일5:10)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올라 가시고 있는 이 큰 명절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역사 가운데 있었던 몇번의 축제가운데 아주 기억에 남을만한 것이었읍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마무리하는데 더이상 아무 부족이 없을때 즉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되었을때 그때에도 똑같이 마침 일곱째 달의 명절이었읍니다. 이명절은 그 백성들이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 (왕상8:66) 하였던 "한 성회(聖會)" (역하7:9) 였습니다. (*역자주: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 되었을 때를 예표함) 또한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되었다가 저들의 땅으로 돌아왔을때 그때에도 율법책으로부터 정확하게 이 명절이 지켜져야할 바로 그 기간 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읍니다. 우리는 느혜미야8장에서 유대백성들이 "크게 즐거워하며" (느8:17) 이 명절을 기념한 사실을 알수있습니다. (*역자주: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환란을 통과 하였을 때를 예표함)
 
모형이 문자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도 성취되어지기 위하여 영적인 전이 완성되어질 그때를 고대하여야만 합니다. 다시말하면 모든 보배로운 산돌이 제자리에 노여질 그때와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슥4:7)할 그때를 고대하여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믿는 자들이 우리 자신의 집으로 가는 것을 더이상 막을것이 없는 그때를 그리고 우리 영혼들이 이미 광야를 벗어나와 서 있음에 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가득차 있을 그때를 고대 하여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자들은 아직은 그곳에 와 있지 않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준비하셨고 또 놀라웁게도 우리에게 주신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광야가운데 있을 동안에 우리 영혼들을 위로해 주는것과 쉼을 주는 것이 될수 있는 그것입니다. 즉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요7:38) 할때 "생수의 강"을 준비하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믿는자에게는 이 "생수의 강"이 놓여져있고서야 비로소 "생명수 샘"과 한몸이라는 시원한 일체감을 갖게 됩니다. 광야에서 줄곧 길고도 고된 행군을 진행하는 동안 무엇으로 이스라엘자녀들이 시원함을 얻었겠읍니까? 하나님의 명령이 모세에게 임하였고 반석을 내리치신 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땅에 강같이 흘렀으니" (시105:41)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광야에서도 생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 생수가 저들이 소망의 땅에 이를때까지 저들을 충족시켜 준 것입니다. 그와같이 주예수님이 내리침을 당하신즉 여기 이 광야에 있는 동안 주의 백성에게 시원함과 힘을 주시기 위해 허락한 모든 생명수 시냇물이 바로 그 반석에서 흘러 나옵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직도 여러분 믿는자들에게 계시지 않다는 사실이 얼마나 슬픈일이라 할지라도 여러분 믿는자들이 공급과 위로를 구하며 이 두들겨 맞은 이곳 반석위에서 쉬고 있는 동안에 여러분의 부족은 늘 공급될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주께서 시원함을 주는 은혜에 대한 영적인 이해로 충만케 하실수 있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 믿는자들을 주님과 하나되게 하셔서 그분안에 있는 샘물 즉 고갈되지 않는 샘물이 여러분안에 내주하고 있어 광야에서 조차도 계속 흘러나와 끊임없이 시냇물을 이루게 하십니다. 즉 영적인 시원함을 준다는 사실을 기쁘게 아는 그곳에 이 샘물이 머물러 있는것이 아니라 이 영적인 시원함을 기쁘게 아는 그곳으로 이 샘물이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떠나시고난 후에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바로 그것입니다. 즉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7:39) 예수님께서 주님이 계시지 않는 이 땅에서도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주의 충만함에 참예하는자로 만드심이 이와 같으신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이 모든 기쁨을 다 누리고 있지는 않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광야가 바로 우리의 등 뒤쪽에 남겨져 있을때 그때야말로 주의 백성들은 주의 모든 기쁨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성령께서는 주의 백성들이 아직도 안식의 땅에 있지 않다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시면서도 여기 아래에 있는 이 땅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생수의 강" (요7:38) 이 흘러 나오도록 하셔서 저들의 부족함을 보상할수있는 모든것으로 주의 백성들에게 채워주십니다. 즉 이일이야말로 성령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곧 성령의 임재하심이 이와같이 체험되도록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자신의 것에서 잠깐동안 계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속해서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7) 라고 말씀하였읍니다. 여러분 믿는자들은 주가 계시지 않더라도 주님을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는자들은 곧 주님께서 여러분안에 내주하게 하심으로 여러분 믿는자들에게서 생수가 흘러나게 할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명절 마지막날에 주님께서 하신 바로 그 약속이며 "그를 믿는자의 받을" (요7:39) 그 성령님의 약속인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완수하시고 난후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영광의 그의 안식에 들어가시고 난후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에 대한 증인으로서 오늘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는 말입니다. 즉 일렀으되"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 (요7:39) 하는말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이와같은 성령은 한 영혼이 새로 태어날 때 주어지는 것으로 혼돈되어 왔읍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새로 태어날 때 (*역자 주: 구원을 선물로(엡2:8)) 받는 것하고는 완벽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아래와같이 말할때 이사실을 명백하게 설명합니다. 즉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갈4:6) 라는 말씀이 이 사실을 명백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너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인 고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는자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과의 현재의 교제를 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영혼으로 하여금 성령께서 그안에서 증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영광의 실재를 누리는 기쁨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주예수의 인자되심과 그분의 사역과 임무를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행하신 것으로 묵상하도록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주예수의 인자되심과 그의 사역과 임무를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행하신 것으로 묵상하도록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죄를 담당하여 죄를 고백하고 속죄를 이루셨다는 그와같은 구속을 위하여,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히1:3) 저들이 믿고난후에 저들에게 주어진 "그 본체의 형상" (히1:3) 으로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하면 약속의 성령은 믿기 위해서 주어지는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4) 할 때의 우리의 기업에 보증을 삼기위하여 약속의 성령이 주어집니다. 즉 "그안에서 또한 믿어" (엡1:13) 주어진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1:13) 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심으로 생겨난 결과입니다. 즉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1;13) 이 약속의 성령은 외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은 결과의 산물이 아니라 저들안에 있는 즉 다시말하면 저들안에 내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주한다는 이 말은"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3:16) 에 잘 나타타 있읍니다. 그리고 이약속의 성령께서는 우리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인격을 갖고 계시는데 이와같이 약속의 성령의 인격도 역시 분명히 말씀을 통하여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여지껏 우리가 경험해 왔던 것 이상의 어떤 것으로서 이 약속의 성령에 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곳있는데 이 약속의 성령은 본문 말씀속에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요7:39) 고 하실때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셨다고 분명하게 있읍니다. 그리고 먼저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않은데 대하여 본문에서 지적한 이유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요7:39) 입니다. 이 성령은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기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때 믿는자에게 주어지는 이 선물은 성령의 인치심이 됩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인치심은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사역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다 이루신 사역 즉 그의 부활하심과 그의 승천하심 그리고 그의 영광을 받으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하늘에 속한 것들을 이해하고 알게 됩니다. 이 복된 보혜사 성령께서는 광야에 있는 우리에게 시원함을 주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믿는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것을 알게하며, 우리 믿는자들의 마음에 들어와 내주하심으로 이 큰 하늘에 속한 것들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요일3:1) 즉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을 받으심으로 부터 이 영광을 받으심을 증거하여 아버지의 영을 우리 믿는자들의 마음에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영광가운데 계시다가 오신 이 아버지의 영께서 자신이 이전에 친히 누리셨던 그 모든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 아버지의 영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그리스도의 선물로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아버지의 사랑의 교제와 위로를 알게하면서 우리가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이와같은 교제에 대하여 당당히 누릴 자격이 있는자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여기 이땅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 축복의 정도를 모르고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같을줄" (요일3:2) 아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들이 심지어 우리가 광야에 있을때에도 성령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알고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이 모든것들은 아버지의 사랑의 당연한 결과 입니다.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갈4:7) 즉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가운데 보내"(갈4:6) 셨읍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에 관한 그 어떠한 것이라도 인지할수 있는 것은 진실로 우리가 아들의 지위에 있을 때에라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17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속에 "아버지게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3) 그리고 다시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6) 라고 언급되었듯이 우리와 아버지 자신 사이에 존속하는 일체감에관한 그 어떠한 것이라도 인지할수 있는 것은 진실로 우리가 아들의 지위에 있을 때에라야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나의 큰 진리가 있는데 이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경건치 아니한자" (롬5:6, 롬4:5) 들을 구원 하실 목적 뿐아니라 저들을 주님의 아버지의 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총속으로 즉 아버지의 사랑속에 아버지 자신과 함께 있는 축복 즉 영광속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있어 주와 같은 공동의 후사가 되는 축복으로 불러 모으실 복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앗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나타 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 (요일3:2) 입니다. 이 일의 완전한 성취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게 드러내게 될 한몸의 축복, 즉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사랑을 직접 의식하여 누리는 일에 참예한자로서 축복, 다시말하면 우리 주님과 동일한 영광에 참예한자로서의 축복으로 불려 나올 그날에 보여지게될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곳에 나와 함께 있어" (요17:24)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읍니다. 즉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잇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게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17:24) 라고 예수님게서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읍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직 그 자신의 본질적인 신성만을 제외하고는 그가 가지고 계시는 모든것은 바로 주의 백성들의 것인 것입니다. 그 모든 영광과 축복이 주의 백성들의 것이란 말입니다. 진실로 축복된 일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깨우쳐 주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성령께서 '그 영광'이 저들을 위하여 저들이 있는 그곳에도 있다는 사실을 지금 현재 알수있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때문에 한 그리스도인 의 영혼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게 됩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자신이 아직도 광야에서 빠져 나와 있지 않다라는 실질적인 체험 즉 그가 아직도 영광중에 있지 않다는 실제적 체험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인을 시원하게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여기 이땅에서 사는동안 주안에 있는 이 그리스도인에게 옛날 광야에서 주신것과 같은 바로 그"생수" (요4:10,요7:38) 를 주십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와 저들이 일체감을 갖고 또한 하나가 됨으로서 필연적으로 물이 그곳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7:38) 하는 본문 말씀처럼되는 것입니다. 즉 이말은 생명수 샘에 연합됨으로 믿자자의 영혼으로부터 축복의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믿는자들의 마음가운데 성령께서 나누어 줄수있는 그 사랑의 일천분의 한조각만이라도 갖일수 있다고만 한다면 심지어 이 사막 가운데에서도 여러분 믿는자들 안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의 충만함과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충만함과 그리스도의 기쁨이 넘치는 충만함에 대한 우리의 증인이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됨으로 여러분 믿는자들의 감사가 차고 넘치게 될것입니다.
 
형제들이여 그리스도의 기쁨의 충만함에대한 내적증거에 대하여 어떠한 증거가 있다면 우리는 언제 이 그리스도의 기쁨이 넘치는 증거를 보게 되는 것입니까? 주를 위하여 한 구별된 백성이며 주안에서 항상 기쁘하고 있는자들은 어디에 있읍니까?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살전5:5) 할때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한 증거가 어디에 있읍니까? 심지어 우리 믿는자들이 남들에게 그렇게 알려져 있듯이 우리가 알아야할 그날이 올때까지 우리 믿는자들이 심지어 여기 이땅에서 놀랄만한 축복을 받고 있는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오! 우리가 증거합시다, 즉 첫열매로서 그리스도께서 주의 영광가운데로 들어가실 뿐아니라 과거의 수확과 현대 모든 성도들의(거두어들임)수확이 성취되고 그때 그리스도의 영광과 기쁨이 충만할 그날이 올때까지 그렇게 증거하자는 말입니다. 주님은 영광과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나타나시어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 (사53:11) 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사53:11) 즉 그리스도의 영광과 기쁨이 충만한 그곳에 저들 믿는자들 모두가 있고 각자는 자기 주님의 기쁨속으로 들어가 있을것입니다. 이와같은 현실이 도래할때까지 저들 믿는자들에게 그때에 무엇이 일어날는지 보여주고 있는 성령-그 "성령의전" (고전3:16) 이 되는 저들 믿는자들은 어떤식으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저들 믿는자들을 위해 지팡이로 내리치심을 당하셔서 저들에게로부터도 "생수의 강" (요7:38) 이 흘러나게 하신 주님을 아는 지식을 어떻게 실제로 저들 믿는자들이 이용해야 합니까?
 
형제들이여 본인이 여러분 형제들에게 묻노니 여러분 형제들께서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있읍니까? 여러분 형제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이라는게 이러한 생수들에 둘러싸여 있다고하는 특별한 장소를 찾는것과 같은것입니까? 여러분들이 교제하고자 하는것들과 바라는것들이 이런 순수한 시냇물들과 동화되어질 수 있고 또 동요없이 오염없이 함께 흘러가고 있읍니까?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이 성령을 거부하는 모든것들에게 여러분이 동화됨으로 인하여 제한을 받고 있지는 않읍니까?
 
형제들이여 본인이 여러분 형제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심지의 주께서 이땅에 계시지 않음을 알고 있는 중에라도 여러분 가운데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일어나는 이 기쁨이 존재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주님께서 가까이 닥아오고 계심을 묵상함으로 여러분 안에 있는 샘물이 넘쳐나고 있읍니까? 또는 질문 드리는 일조차도 슬픈 일이지만 형제들이여 여러분들은 육신의 일을 탐닉하여 성령을 근심시키고는 있지 않읍니까? 성령께서 혐오하는 그러한것들에 빠져있는, 그리고 성령을 시험하여 여러분들을 비천하고 황폐한 상태로 남겨두는 "옛 사람" (엡4:22,골3:9,롬6:6) 을 기쁘게 해줌으로 여러분 안에있는 그의 충만함을 위로 가운데 아는 지식을 여러분 믿는 자들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박탈해 버리지는 않았읍니까? 감각적인 것에 집착하고 추구하는 일이 있는곳에서는 이 일이 심지어 때때로 이기는하나 마치 우리 가운데 성령이 전혀 계시지 않은것처럼 필연적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계속하여 생명도 기력도 없도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는자들 중에 더러 성령님을 실제로 근심시키는 일이 없읍니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이 영광을 찬미함으로부터 이렇게 충만함, 아니, 이렇게 넘치는 충만함이 여러분안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읍니까? 여러분들은 어찌하여 이 사실을 의식하고 있지 못합니까? 오직 여러분들이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믿음안에 있건 아니건 간에 어두움과 죽음, 아니, 진실로 의심하는것들이 나오게된 것입니다. 어두움에 이르고 빛을 품을 수 없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따름으로서 이 모든것들이 생겨 나오게된다는 말입니다.
 
온 사방에있는 모든 이들에게 성령이 넘쳐 흘러 들어갑니다. 이때 성령이 그가운데 한사람에게 흘러 들어 가게되며 이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성령은 "생수의 강" (요7:38) 과 같이 넘쳐 흐르고 있는 것읍니다. 성령은 좋은 토양에 들어가 있을수도 있고 또한 메마른 모래 토양위에 있을수도 있읍니다만 그런경우에도 여전히 성령님의 품성 과 권능은 계속하여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오! 형제들이여 우리 자신들의 일관성없는 행동때문에 또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모든것들을 사랑하기때문에 이 신의 성품을 가진 성령님의 기쁨과 위로를 얼마나 많이 상실하고 있읍니까?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라는 말씀은 하나의 엄숙한 진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자이면서도 성령님의 마음에 대하여 외인인 채로 남아 있을수 있는것이 가능한 일이며 또한 여러분이 이 큰 선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 낼수 없다는 것이 또한 가능한 일이겠읍니까? 여러분들에게 성령이 없으면 여러분들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 여러분은 아직 여러분의 죄 가운데 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슬프고도 엄숙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확실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속임을 받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르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도 들어갈수도 없다' (요3:3, 3:5) 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아버지의 약속인 이 선물을 나누어 가진자가 될것을 구하도록 하여야겠읍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다른 길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되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요6:63)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믿을수 있는 능력을 주실때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 (요4:14) 로서 그리고 항상 흐르는 생수의 강으로서 성령께서 여러분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원수 갚는 날이 오기전에 그리고 가라지와 악한 일꾼들과 함께 여러분들이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 되기 전에 여러분들은 확신 가운데 믿음을 소유한 자가 될 것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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