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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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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789회 작성일13-06-21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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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P. 깁스
왜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당신은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다소 이상한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자의 질문하는 의도를 모르셨거나 또는 "구원받다"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도로변의 빌딩이나 간판에 "예수께서 구원하십니다"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말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또 "구원받다"나 "구원"이란 말들이 자주 나오는 책자를 받아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에 대해서 아주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매우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밝히 알려 드리는 데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구원받다"와 "구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구원"이란 말은 임박한 위험으로부터 구출 또는 구조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수영을 할 줄 모르는 한 사람이 강물에 빠져 익사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할 때, 스스로 헤엄쳐 나오려는 모든 노력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런데 능숙하게 수영을 할 줄 아는 어떤 사람이 그의 위험을 보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그를 물에서 구해준다면, 구조 받은 사람이 후에 그의 경험을 얘기할 때 "익사의 위험으로부터 구원받은" 자로서 그것을 얘기할 것이고, 그를 구조해 준 사람을 "구원자"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이란 말은 곧 위기, 구원자, 그리고 구출의 개념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에게 보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구원에 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구원자", "구원받다", "구원"이란 말들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 "구원자"는 물론 구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구원받는" 자들은 그들의 위험으로부터 구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그 구출의 시작으로부터 끝날 때까지의 전체 과정을 말합니다.

성경이 구원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언급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위험에 처해 있고, 그 위험으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는 그 위험이 무엇이며 왜 우리가 그 위험에서 구원받아야 하는가를 성경 말씀에서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우리 모두는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 죄의 본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부모로 부터 그것을 유전 받았으며, 그들은 또 그들의 부모로부터 유전 받았고…, 그것은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는 "본성"에 의해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실제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가 말하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행동하는 것'을 행합니다. 즉 우리 내부의 본성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고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 말은 그의 생애를 통해 친절함과 같은 특성들이 잘 드러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의 타고난 성품은 그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작은 벵갈 호랑이 새끼는 매우 예쁘고, 새끼 고양이만큼이나 위험하지 않습니다. 이 어린 호랑이는 어릴 동안에는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비록 어리다 해도 그 속에는 피를 갈망하는 호랑이의 타고난 성품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나운 성품은 그것이 성장함에 따라 그의 행동들에 의해서 증명되고, 곧 정글에서 공포의 존재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필요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 진정한 본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는 한 때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칠 수 없던, 사랑스런 아기였던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되었습니다. 무엇이 이 어린아이들을 위험한 범죄자로 만들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들 속에 있던 죄의 본성이 방해받지 않고 발달하여 마음속의 생각들과, 입술에서 나간 말과, 생활 속에서 행해지는 행동들과, 그리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태도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은 우리가 어떻게 태어날 때부터 이런 죄악된 본성에 사로잡히게 되었는가를 말해줍니다. 첫번째 사람이며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었을 때, 자기뿐 아니라 그에게서 이어져 내려올 온 인류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즉 아담은 모든 사람을 그와 함께 그의 타락 속으로 끌어 내렸던 것입니다. 아담은, 그의 불순종으로 그가 얻게 된 죄의 본성을 자손들에게 전달했으며, 그의 자손들은 또 그들의 자손들에게……, 이렇게 전달하기를 현재까지 계속해 온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 각자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만드는 죄스러운 본성을 갖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우리는 죄인이 되기 위해서 죄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제 확실히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은 로마서 5장 12절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당신의 국적이 당신이 태어날 당시 부모의 국적에 의해서 결정된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영적인 상태는, 죄인들이었던 당신의 부모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조금더 예를 들겠습니다. 개는 '개가 되려고' 짖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이기 때문에' 짖습니다. 말은 '말'이 되려고' 히힝거리며 우는 것이 아니고, 단지 '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인간은 '죄인 되기 위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개는 짖는 것이 그의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에 짖습니다. 말은 그의 타고난 본성대로 그렇게 웁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거짓말하는 것, 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것, 성내는 것, 남의 것을 취하는 것, 악한 생각을 하는 것, 악한 말을 하는 것 등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타고난 본성의 깊은 뿌리에 있는 그것들은, 후에 그들의 행실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나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과나무이기 때문에, 사과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의 뿌리의 어떠함은 그 결실하는 열매에 의해서 드러납니다. 어떤 사과나무는 크기가 겨우 10cm밖에 안 되고, 한 개의 사과도 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수년 후 크게 자라 수백 개의 사과가 열렸을 때와 마찬가지의 '사과나무'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그 안에 죄의 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다만 그 '죄의 열매'(즉 생활 속의 죄악된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들)가 열리기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5절, 예레미야 13장 23절, 17장 9,10절, 이사야 53장 6절, 그리고 마가복음 7장 21 -23절을 읽어보십시오.

둘째, 우리가 이 죄악된 본성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즉 '육신에 속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죄스러운 본성(보통 성경에서는 "육신"이라고 부릅니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과, 그분의 길에 전혀 합해지지 않습니다. 이 본성대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원수되어, 하나님을 거스르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은 싫어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 깊게 들어보십시오,

"육신의 생각(또는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7,8).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간단히 말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구원받지 못했다면, 온 생애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죄스러운 본성의 지배하에서 사는 삶은, 하나님께 대해 쓸모 없이 버려진 인생입니다.

"육신"(flesh)이란 단어의 마지막 글자(H)를 떼어내고 나머지를 거꾸로 나열해서 보면, 그 뜻이 가장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즉 "S-E-L-F"(자기)가 됩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기"(self)를 기쁘게 하는 생활, 또는 '육신에 속한' 삶을 살 때 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 당시에 가장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 중 하나였던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요한복음 3:1 -16)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그 이유는 확실합니다. 니고데모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이었지만 아직도 '육신 안'에, 즉 타고난 본성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육체의) 출생을 통해 우리는 "육체의 생명"과 "사람에게 속한 본성"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속한 삶'을 살 수 있게는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죄인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생명, 즉 "영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신의 성품"에 참여케 하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로마서 14:17)라고 말씀하신 '영에 속한 세계'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생명을 얻음으로써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육체의 생명과 사람에게 속한 자연적인 본성을 받는 것을 "출생"이라고 하는 것처럼 영의 생명과 신의 성품을 받는 것을 성경에서는 "중생(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 베드로후서 1장 3,4절을 보십시오.

이 중생은 "육신"이라는 부패한 옛 성품을 교화하거나 개선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옛 성품은 개선되거나 바뀌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라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만일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잘 가꾸어서 포도와 무화과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가령 그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가져다가 온실 안의 이상적인 조건과 기름진 토양에서 잘 가꾸어 포도와 무화과를 수확하려 한다고 합시다. 이 실험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당신도 정확한 답을 아실 것 입니다. 그가 이를 통해 얻는 것은, '잘 가꾸어진 가시덤불과 엉겅퀴' 뿐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태복음 7'16)
라고 하셨을 때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중생(거듭남)이란 믿는 자에게 전혀 새로운 성품(즉 하나닝의 성품)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이 성품은 믿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게 하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 안에서 만족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믿는 자는, 그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므로 그 삶이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습니다. 로마서 8장 9절, 에베소서 1장 13절, 4장 30절, 갈라디아서 5장 16-23절을 얽어보십시오,

이제 당신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 보십시오. "나는 진정 거듭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노력과, 결심과, 종교적 훈련과, 선행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내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억하십시오. 주 예수께서는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종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 도덕적인 삶을 살든 그렇지 않든, 지식인이든 학문이 없는 자든지, 젊었거나 나이 들었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에, 당신은 '거듭나야 합니다(로마서 8:7,8).

셋째, 우리는 실제 행위로써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수없이 많이 고의적이고 의도적으로 잘못된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기를 택해 왔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은 정직하게, 이 말이 진실되다는 것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지난 며칠간이나 단 몇 주, 또는 몇 개월간의 생활만 되돌아보더라도, 당신이 여러 경우에 여러 가지 방범으로 죄를 지은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 가운데 남아 있도록 허용해 온 모든 더러운 생각들, 거짓말, 다른 사람을 거스르는 행동, 모든 합당치 못한 태도, 이 외에 당신이 행했던 기타 모든 잘못된 행동들은 하나님께 대한 죄 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어떤 분들은 이런 것들을 기억해 내는 것이 불쾌하기 때문에 위의 사항들을 점검하지 않은 채 생략하고 넘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실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비록 어떤 사실들이 불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정면으로 대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자기를 맡기고 자세한 진찰을 받아 무서운 질병이 드러나게 되지만, 한편 의사에게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너무 일찍 찾아온 예기치 못했던 죽음으로부터 구함을 받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한 의사입니다., 그분의 진찰을 받고 그 진단의 정확함을 깨달아,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신 대로 자신이 범죄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만이 베풀어주실 수 있는 치료함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를 그분의 손에 맡기는 것이 현명합니다.

성경은 물체의 이면에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엑스레이와 같은 것입니다. 성경의 각 페이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속속들이 아시며 우리는 그분에게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나다. 성경에서 다음 말씀들을 주의 깊게 읽으시고, '모든 사람'에 대해, 특히 '당신 개인'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 보십시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다 지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10-18,23).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당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요? 당신은 당신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죄를 미워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당신이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어떤 대단한 범죄자나, 다른 사람들만큼 크게 죄짓지 않았다는 것이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림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같은 종류의 죄를 짓거나, 또는 똑같은 정도로 죄를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죄를 지었다는 사길은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잠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가운데에 표적이 있는 네모 난 과녁이 있습니다. 50m 떨어진 곳에 세 소년이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각은 과녁의 중심에다가 화살을 쏩니다. 첫번째 소년은 과녁을 완전히 빗나갔고, 두번째 소년은 과녁의 가장자리를 겨우 맞추었고, 세번째 소년은 표적에서 5cm 정도 떨어진 곳에 화살을 맞추었습니다. 자, 어느 소년이 표적을 맞추는데 성공했을까요?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과녁의 중심에 못미쳤습니다. 누가 과녁의 중심에 더 가까이 맞추고, 더 멀리 맞추고 한 차이이지, 표적에 명중시키지 못한 것은 실제로 서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과녁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맞는 절대 완전의 기준을 말합니다. 그분의 율법에 나타난 그 기준을 보십시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누가복음 10:27).

누가 진실로 이 모든 기준을 만족시켜, 과녁에 명중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법의 빛에 비추어 보면 볼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서 그만큼 더 멀리 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음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든지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실제 행위로써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말이든, 생각이든, 행동이든, 마음의 태도이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그분 앞에 죄인인 것을 인정하시겠습니까? 당신이 수없이 많이 잘못된 것, 더러운 것들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해왔다는 것을 인정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자기 죄에 대한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고, 탕자와 같이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누가복음 15:21)라고 고백하며, 또 세리처럼 울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18:13)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혜입니다. 죄를 감추거나, 핑계대거나, 그다지 중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 하거나, 또는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부르거나, 다른 이들을 원망하거나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정직하고 솔직하게 대면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태복음 9:13),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10)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또 다음 구절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 디도서 3장 3절, 전도서 7장 20절, 시편 14편 1 -3절, 잠언 28장 13절.

넸째, 하나님께서는 죄를 반드시 벌하시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시므로 어떤 모양, 어떤 형태의 죄도 싫어하시며, 그것을 반드시 벌하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말씀에서 "너희는 나의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지 말라"(예레미야 44:4)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분은 또 우리에게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하박국 1"13)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준엄한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에스겔 18:20).


이 세상 법률이 범법자를 공의롭게 다스려야 하듯이, 어떤 죄인이 만일 그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죽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와 죄인에게 반드시 심판을 내리십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한복음 8:21,2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나라 문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멍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니라"(요한계시록 21:27)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죄의 오점도 하늘나라를 어둡게 하지 못합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깨끗하게 씻음 받은 상태이어야만 합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죄 속에서 죽는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소망이 없으며 대신에 영원한 슬픔이 있는 바깥 어두운 곳에서 통곡하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엄중히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43-48절, 마태복음 25장 30,41,46절, 누가복음 16장 19-31절을 읽어보십시오.

이런 슬픈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하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많으신 구세주 그분께서 그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거저 주시는 구원을 무시하거나 거부하거나 멸시하는 이들을 기다리는 무서운 운명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너희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고 하신 분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그분에게서 분리되는 것과 죄로 가득한 상태로 사망하는 것이 얼마나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위험인가를 충실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이제는 분명히 각각의 독자께서 진지하게 다음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으셔야 합니다.

"내 죄 가운데서 죽게 되면 내게 임할 그 두려운 결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 장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기쁜 소식" - 알프레드 깁스 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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