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3)
페이지 정보
조회920회 작성일13-06-20 17:19본문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4)
작성자:알프레드 P. 깁스
제4장
3. 사람이 왜 거듭나야 하는지에 대한 세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인 생명은 자연적인 출생을 통해서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은 자로, 또한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엡 2:1-3, 4:18)는 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2절에서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1) 영적인 죽음에 대한 정의
이제 다음의 용어를 정의해보고, 성경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과 "생명이 없느니라"고 기록된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육적인 생명이 의미하고 있지 않은 바에 대해서 설명하는 일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그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임을 상기시킨 후에,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았던 자들이었음을 더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육체적인 생명이 없는 몸은 이미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영적인 생명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육체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몸은 바로 시신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과 영적인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을 "허물과 죄로 죽은" 자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죽음에 대한 설명
이러한 사실에 대한 설명이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금지하신 나무를 먹지 말도록 하신 후에,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 선악과를 먹었을 때, 아담이 즉각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임을 당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은 그후에도 육체적으로는 수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날에 죽음을 경험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담은 바로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범죄한 부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분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창 3:8)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가 하나님이 선언하신 영적인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은 "주변 환경과의 교통이 중지되는 것"이라고 정의해왔습니다. 아담은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었고, 자기를 창조하신 분과 교제, 혹은 교통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죄가 이러한 교제를 파괴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죽음이 있었다는 것이 아담이 하나님과 분리되고, 따라서 교통이 중지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의 의미는 또한 탕자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탕자가 먼 타국에서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고, 방탕한 삶을 산 후에, 결국 회개에 이르게 된 탕자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면서 자기 죄를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팔을 벌려 그를 안고 즐거워하면서,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눅 15:24)라고 말했습니다. 그 탕자가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는 동안, 그는 자기 아버지께는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은 자기 죄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죽어 있으며", 또는 "생명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면, 한 구절을 더 소개해드리고자 하는데, 바로 디모데전서 5장 6절입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과 쾌락을 추구하는데 자신의 모든 힘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사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는 소경된 사람을 가리켜, "시력이 죽은 사람"이라고 하며, 귀먹은 사람은 "소리에 대해 죽은 사람", 그리고 중풍병자에 대해서는 "움직임이 죽은 사람"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잠자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세상 일에 대해 죽은 사람"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요구하십니다.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사 45:22). 그러나 사람은 볼 수가 없습니다. 왜 볼 수 없습니까? 바로 그는 소경이요, 시력이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 들을 수 없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귀머거리이며, 소리에 대해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사 30:21)고 권고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길로 행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중풍병자이며,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의 법 중에는 어떤 사람에게서 수년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고 연락할 길이 없으면 가족과 친척들에게 "죽은 자로 간주"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은 바로 자기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아무런 교통도 할 수 없는, 이른바 "죄 가운데 죽어" 있으며, 자신의 영적인 무덤으로부터 다시 일어날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3) 영적인 죽음은 영적인 생명을 필요로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드님이 죄 가운데 죽었던 자들에게 영적인 생명(곧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육신이 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요한복음 5장 25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리스도는 이러한 생명의 원천이시며, 또한 이 생명을 나눠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사람의 가장 큰 필요는 바로 영적인 생명이며, 이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 5:12). 따라서 사람의 나라에서 육체의 생명을 생산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인 것이 육체적인 출생이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적인 생명을 나눠주고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인 것이 영적인 출생, 곧 거듭남인 것입니다.
(4) 시체를 통한 예화
이 진리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또다른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제 시체 앞에 서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꽃과 같은 시기에 죽은 청년의 시체입니다. 골격이 좋고, 근육이 조화를 이룬 잘빠진 몸입니다. 그 얼굴은 매우 매력적이고, 그 이마는 매우 지적인 사람임을 잘 나타내고 있는듯 합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몸에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바로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죽어 있는 것입니다. 이 시체가 다시 일어나서 발로 걷고, 그 방을 걸어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생명을 얻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바로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그러한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a) 시체 측에서의 자기 노력으로는 그러한 기적이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시체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이보게, 일어나게. 자네가 바닥에 누워서 취하고 있는 자세가 얼마나 품위 없고, 격에 맞지 않는지 아는가? 자세를 바로 잡게! 마음을 정하고, 일어나 걷도록 최선을 다해보게! 어서 이리오게. 자네 몸속에는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더 고상한 본능에 따라 행하도록 하게! 자네 속에 잠재되어 있는 더 고상하고 차원 높은 가능성을 일깨우게!" 이러한 충고와 웅변이 이 시체에게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이러한 권면은 오늘날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많은 설교들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무익하고 생명이 없는 무력한 설교를 통해서는 거듭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과연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두 번째, (b) 심리학을 사용해서는 그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제 정신 분석 전문의에게 전화를 해서 과연 이 시체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십시오. 그는 심사숙고하면서 사례 보고서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 전문의는 자신의 심리학에 대한 엄청난 지식을 이용하여, 시체에 나타나고 있는 콤플렉스, 열등감, 우등감, 그리고 다양한 징후 등에 대한 자신의 습득된 노하우를 발휘해 봅니다. 그러나 그의 분석과 결론조차도 육체의 생명을 돌려놓는 일에 무력합니다. 정신 분석 전문의는 당황하게 되고, 죽음 앞에 무력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는 생명의 반응을 조사해보고 분석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다시 넣어 주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정신 분석가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생명이란 단순히 심리학을 적용한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출생에 필요한 것은 바로 죄인이 자신의 억제성향을 바로 잡고,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중생의 기적은 그 삶 가운데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c) 그 어떤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 예식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 어떤 종교의 성직자가 자신이 특별히 믿고 있는 성례와 예식을 가지고, 시체에게 나아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성직자는 우선 그 시체가 세례를 받았는지, 견진례는 받았는지, 또는 영성체를 받았거나, 어떤 교회에 가입했는지를 알고자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불확실하다면, 이 성직자는 시체에게 세례를 베풀고자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그 머리에 안수하고는 견진례를 베풀게 됩니다. 그후에 그는 그 시체의 입에 성체를 넣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성직자는 그 시체의 이름을 자신이 데리고 갈 교회의 교인 명부에 기록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시체에게 무슨 효력이 있을까요? 당신은 "아무런 효력도 없다"라고 바르게 대답할 것이 분명합니다.
매우 애석한 일은 우리가 단지 상상만 해본 종교적인 성직자가 육체적으로 죽은 시체에게 행한 일을, 허다한 목사들이 영적으로 죽은 수많은 죄인들에게 똑같이 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목사들은 그들이 세례를 받았고, 견진례를 받았고, 교회에 가입했으며, 또한 성찬을 나누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이제 크리스챤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세례(침례)와 만찬 예식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곧 거듭난 사람들, 따라서 영적인 생명을 현재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예식은 아무 소용도 없으며, 도리어 해로운 것입니다.
(5)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만 온다
자, 이제 전혀 새로운 사람이 시체에게 다가갑니다. 이 사람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서, 생명의 원천이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 예수님이 그 시체 곁에 서시면, 억지로 일으키고자 설득하거나, 심리학을 적용하면서 추이를 살펴보거나, 또는 종교 예식이나 의식을 행하려고 애쓰는 등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님이 전에 이 땅에 사셨을 때, 행하시던 대로 그 앞에 서시고, 시체의 생명없는 손을 들고, 단지 전능자의 한 마디 말씀으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고 말씀만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과 함께 생명이 그 시체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 젊은 사람이 발로 서고 걷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고 걷는 모습을 통해서 그가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실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해보면, 당신은 거듭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출생에 의해서 영적인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며, 또한 날 때부터 영적인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자기 노력이나, 심리학을 적용해보거나, 종교적인 예식 등은 영적인 생명을 얻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하고자 하시며 또한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철저히 무력하고, 소망도 없고,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들이 단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대속적인 사역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자신의 간절한 필요인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음의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영적인 생명은 한 분 인격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 인격이 바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길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독자들께서는 더 이상 자기 노력이나 종교적인 예식을 의지하지 마시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어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롬 6:23)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온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먼저 거듭남이 아닌 것에 대해 살펴보았고, 두 번째로 이미 언급하였지만 사람이 왜 거듭나야 하는지에 대한 세 가지 성경적인 이유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알프레드 P. 깁스. 성경교사로서 많은 가르침을 전해 주었으며 대표적인 저술로는 <설교자와 그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의무 예배>, <주님의 만찬>, 등 그외 다수가 이 있다.
3. 사람이 왜 거듭나야 하는지에 대한 세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인 생명은 자연적인 출생을 통해서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은 자로, 또한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엡 2:1-3, 4:18)는 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2절에서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1) 영적인 죽음에 대한 정의
이제 다음의 용어를 정의해보고, 성경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과 "생명이 없느니라"고 기록된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육적인 생명이 의미하고 있지 않은 바에 대해서 설명하는 일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그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임을 상기시킨 후에,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았던 자들이었음을 더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육체적인 생명이 없는 몸은 이미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영적인 생명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육체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몸은 바로 시신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과 영적인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을 "허물과 죄로 죽은" 자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죽음에 대한 설명
이러한 사실에 대한 설명이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금지하신 나무를 먹지 말도록 하신 후에,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 선악과를 먹었을 때, 아담이 즉각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임을 당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은 그후에도 육체적으로는 수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날에 죽음을 경험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담은 바로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범죄한 부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분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창 3:8)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가 하나님이 선언하신 영적인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은 "주변 환경과의 교통이 중지되는 것"이라고 정의해왔습니다. 아담은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었고, 자기를 창조하신 분과 교제, 혹은 교통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죄가 이러한 교제를 파괴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죽음이 있었다는 것이 아담이 하나님과 분리되고, 따라서 교통이 중지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의 의미는 또한 탕자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탕자가 먼 타국에서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고, 방탕한 삶을 산 후에, 결국 회개에 이르게 된 탕자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면서 자기 죄를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팔을 벌려 그를 안고 즐거워하면서,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눅 15:24)라고 말했습니다. 그 탕자가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는 동안, 그는 자기 아버지께는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은 자기 죄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죽어 있으며", 또는 "생명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면, 한 구절을 더 소개해드리고자 하는데, 바로 디모데전서 5장 6절입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과 쾌락을 추구하는데 자신의 모든 힘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사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는 소경된 사람을 가리켜, "시력이 죽은 사람"이라고 하며, 귀먹은 사람은 "소리에 대해 죽은 사람", 그리고 중풍병자에 대해서는 "움직임이 죽은 사람"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잠자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세상 일에 대해 죽은 사람"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요구하십니다.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사 45:22). 그러나 사람은 볼 수가 없습니다. 왜 볼 수 없습니까? 바로 그는 소경이요, 시력이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 들을 수 없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귀머거리이며, 소리에 대해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사 30:21)고 권고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길로 행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중풍병자이며,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의 법 중에는 어떤 사람에게서 수년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고 연락할 길이 없으면 가족과 친척들에게 "죽은 자로 간주"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은 바로 자기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아무런 교통도 할 수 없는, 이른바 "죄 가운데 죽어" 있으며, 자신의 영적인 무덤으로부터 다시 일어날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3) 영적인 죽음은 영적인 생명을 필요로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드님이 죄 가운데 죽었던 자들에게 영적인 생명(곧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육신이 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요한복음 5장 25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리스도는 이러한 생명의 원천이시며, 또한 이 생명을 나눠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사람의 가장 큰 필요는 바로 영적인 생명이며, 이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 5:12). 따라서 사람의 나라에서 육체의 생명을 생산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인 것이 육체적인 출생이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적인 생명을 나눠주고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인 것이 영적인 출생, 곧 거듭남인 것입니다.
(4) 시체를 통한 예화
이 진리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또다른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제 시체 앞에 서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꽃과 같은 시기에 죽은 청년의 시체입니다. 골격이 좋고, 근육이 조화를 이룬 잘빠진 몸입니다. 그 얼굴은 매우 매력적이고, 그 이마는 매우 지적인 사람임을 잘 나타내고 있는듯 합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몸에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바로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죽어 있는 것입니다. 이 시체가 다시 일어나서 발로 걷고, 그 방을 걸어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생명을 얻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바로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그러한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a) 시체 측에서의 자기 노력으로는 그러한 기적이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시체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이보게, 일어나게. 자네가 바닥에 누워서 취하고 있는 자세가 얼마나 품위 없고, 격에 맞지 않는지 아는가? 자세를 바로 잡게! 마음을 정하고, 일어나 걷도록 최선을 다해보게! 어서 이리오게. 자네 몸속에는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더 고상한 본능에 따라 행하도록 하게! 자네 속에 잠재되어 있는 더 고상하고 차원 높은 가능성을 일깨우게!" 이러한 충고와 웅변이 이 시체에게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이러한 권면은 오늘날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많은 설교들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무익하고 생명이 없는 무력한 설교를 통해서는 거듭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과연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두 번째, (b) 심리학을 사용해서는 그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제 정신 분석 전문의에게 전화를 해서 과연 이 시체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십시오. 그는 심사숙고하면서 사례 보고서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 전문의는 자신의 심리학에 대한 엄청난 지식을 이용하여, 시체에 나타나고 있는 콤플렉스, 열등감, 우등감, 그리고 다양한 징후 등에 대한 자신의 습득된 노하우를 발휘해 봅니다. 그러나 그의 분석과 결론조차도 육체의 생명을 돌려놓는 일에 무력합니다. 정신 분석 전문의는 당황하게 되고, 죽음 앞에 무력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는 생명의 반응을 조사해보고 분석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다시 넣어 주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정신 분석가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생명이란 단순히 심리학을 적용한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출생에 필요한 것은 바로 죄인이 자신의 억제성향을 바로 잡고,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중생의 기적은 그 삶 가운데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c) 그 어떤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 예식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 어떤 종교의 성직자가 자신이 특별히 믿고 있는 성례와 예식을 가지고, 시체에게 나아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성직자는 우선 그 시체가 세례를 받았는지, 견진례는 받았는지, 또는 영성체를 받았거나, 어떤 교회에 가입했는지를 알고자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불확실하다면, 이 성직자는 시체에게 세례를 베풀고자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그 머리에 안수하고는 견진례를 베풀게 됩니다. 그후에 그는 그 시체의 입에 성체를 넣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성직자는 그 시체의 이름을 자신이 데리고 갈 교회의 교인 명부에 기록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시체에게 무슨 효력이 있을까요? 당신은 "아무런 효력도 없다"라고 바르게 대답할 것이 분명합니다.
매우 애석한 일은 우리가 단지 상상만 해본 종교적인 성직자가 육체적으로 죽은 시체에게 행한 일을, 허다한 목사들이 영적으로 죽은 수많은 죄인들에게 똑같이 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목사들은 그들이 세례를 받았고, 견진례를 받았고, 교회에 가입했으며, 또한 성찬을 나누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이제 크리스챤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세례(침례)와 만찬 예식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곧 거듭난 사람들, 따라서 영적인 생명을 현재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예식은 아무 소용도 없으며, 도리어 해로운 것입니다.
(5)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만 온다
자, 이제 전혀 새로운 사람이 시체에게 다가갑니다. 이 사람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서, 생명의 원천이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 예수님이 그 시체 곁에 서시면, 억지로 일으키고자 설득하거나, 심리학을 적용하면서 추이를 살펴보거나, 또는 종교 예식이나 의식을 행하려고 애쓰는 등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님이 전에 이 땅에 사셨을 때, 행하시던 대로 그 앞에 서시고, 시체의 생명없는 손을 들고, 단지 전능자의 한 마디 말씀으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고 말씀만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과 함께 생명이 그 시체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 젊은 사람이 발로 서고 걷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고 걷는 모습을 통해서 그가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실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해보면, 당신은 거듭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출생에 의해서 영적인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며, 또한 날 때부터 영적인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자기 노력이나, 심리학을 적용해보거나, 종교적인 예식 등은 영적인 생명을 얻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하고자 하시며 또한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철저히 무력하고, 소망도 없고,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들이 단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대속적인 사역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자신의 간절한 필요인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음의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영적인 생명은 한 분 인격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 인격이 바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길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독자들께서는 더 이상 자기 노력이나 종교적인 예식을 의지하지 마시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어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롬 6:23)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온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먼저 거듭남이 아닌 것에 대해 살펴보았고, 두 번째로 이미 언급하였지만 사람이 왜 거듭나야 하는지에 대한 세 가지 성경적인 이유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알프레드 P. 깁스. 성경교사로서 많은 가르침을 전해 주었으며 대표적인 저술로는 <설교자와 그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의무 예배>, <주님의 만찬>, 등 그외 다수가 이 있다.
- 이전글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1) Jun-20 [Thu] / 2013
- 다음글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2) Jun-20 [Thu]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