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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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142회 작성일13-06-20 17:25본문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5)
작성자:알프레드 P. 깁스
제5장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적인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Ⅲ.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구주되신 주님으로부터 그토록 긴급한 문제인 이 거듭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대답이 얼마나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것인지도 보게 될 것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거듭남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수단에 의해 이루질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 (2) 하나님의 성령, (3)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과 그 행하신 역사에 대한 믿음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며, 이 세 가지가 믿는 죄인의 거듭남 곧 중생의 역사에 있어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이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징으로 물이라고 하는 표상, 혹은 모형을 사용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언급하신 물을 가리켜 침례 예식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침례를 받음으로써 사람이 거듭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침례를 받지 않고도 경건하고 헌신된 삶을 살았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존중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이것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물"이 문자 그대로 물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분별도 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 부분과 또 다른 부분에서 그렇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다른 가르침에 대해서는 헛되이 성경을 상고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여기의 물이 문자적인 물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다른 부분을 읽어보면 분명해지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25절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또한 히브리서 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혹은 생명을 주며) 운동력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침례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정의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다만 단순히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벧전 3:21)으로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약 1:18)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침례는 이미 거듭난 사람만을 위한 것입니다. 침례는 그 상징하는 의미에 있어서 매우 아름답고 유익한 예식으로, 곧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있어서 하나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침례는 결코 거듭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침례는 이미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만 필요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침례받을 당시 했던 말은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해줍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행 10:47) 따라서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는 사람만이, 거듭난 결과로 물로써 침례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물은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징, 혹은 모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편 119편 9절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cleanse) 하리이까?" 그리고 나서 그에 대한 답변이 주어집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6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구절을 대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상징인 물이 어떻게 거듭나는 역사에 사용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징으로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것에 대해 이미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 물이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로써 자신이 볼 수 없는 부분인 사람의 얼굴에 묻는 때나 오물을 씻어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을 갈망하는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게될 때,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구원의 길에 대한 자신의 오해라고 하는 때와 오물을 그 마음으로부터 씻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깨어나면서, 아직 깊은 잠에서 덜 깬 몽롱한 상태에서, 세면대로 가서, 우리의 눈에서 "잠"을 씻어버리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상쾌해집니까! 하나님께 속한 것과 영적인 실체에 대한 오랜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물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이러한 영적인 것들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주어지면, 그 얼마나 마음이 후련해지겠습니까!
어쩌면 독자 가운데는 이 소책자를 읽기 시작할 때, 거듭남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그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모호하거나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자신의 선한 행위를 통해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거나, 또는 종교적인 노력을 통해 중생하고자 했을지 모릅니다. 지금 대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인용하고, 또 적용해본 결과, 오해로 빚어진 모호했던 문제가 분명해지고, 과연 거듭남이란 무엇인지, 또 그 복된 실제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영적인 안목이 뚜렷하게 열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물로 상징된 하나님의 말씀의 작용이 이제 분명히 이해되었을 줄로 압니다.
"이처럼 보배롭고 진귀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 손에 들려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다윗은 이에 대해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10장 13절에서 17절까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는 구절을 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명을 주신 이유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복음은 첫째,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한 말씀에 계시하셨듯이, 범죄하고, 무력하고, 그리고 지옥 가기에 마땅한 죄인들의 모든 필요를 마련하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둘째,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아드님을 선물로 주심으로써 입증하신 이야기입니다. 셋째,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 모든 회개하고 믿는 죄인들의 구원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킨 이야기입니다. 넷째, 하나님이 마련하신 "쉽고, 간단하며, 안전이 보장된 구원의 길"로써, 죄인들은 복음을 통해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이루신 역사를 믿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이제 동일한 성경을 통해서 이러한 복된 사실을 확신하게 되고, 이후로부터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시 119:105)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인도를 구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요컨대,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에 대한 다음의 지혜로운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혜를 얻고자 하면 읽고, 안전하고자 하면 믿고, 거룩하고자 하면 순종하라".
이전 단락에서 간단히 언급했던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모든 사람이 알기를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욱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다룰 주제는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인간의 상태는 죄악되고, 무력하며, 또한 절망적임
이 내용이 우리 자신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못됩니다. 더군다나 악성종양의 고통으로 인해 병원을 찾은 환자가 자신의 병명조차 모르지만, 치료의 가능성을 발견한 노련하고 정직한 의사가 진단을 내릴 때, 그것을 듣는 환자의 마음도 즐겁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환자의 상태에 대한 설명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환자가 의사의 진단에 잘 따르고, 수술에 동의하게 되면, 삶을 연장할 수 있는 큰 혜택을 맛보게 되어 오히려 환자에게 유쾌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직하게 범죄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영원한 형벌의 위험 가운데 처해있는 자신의 필요를 직시하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자신의 범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받기를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각 개인이 죄악된 본성, 즉 "육신"을 소유한 채 세상에 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본성은 자신의 부모로부터 획득한 것이고, 그 부모는 그의 부모에게, 그 부모는 또 그의 부모에게… 이런 식으로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곧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 죄악된 본성을 처음으로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죄악된 본성이 죄악된 생각이나 죄악된 행동, 그리고 죄악된 말과 태도로 나타나기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거짓말이나, 도둑질, 불순종하는 것, 또는 못된 성질 등에 대해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아이들에게 최상의 가정환경이나 엄한 가정교육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모든 인류를 죄인으로 정하신 것이 불공평하다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한 하나님이십니다. 또다른 사람, 곧 그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셔서, 육신의 몸을 입게 하심으로써, 아담이 세상에 가지고 들어온 것을 지고 가게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모든 범죄한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의지할 때,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시며, 구원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담의 죄로 인해 잃어버린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통해서 그 이상의 혜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행위(실천)에 의해서도 죄인입니다.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의 차이를 알게 되면서, 사람은 고의로 그릇된 것을 선택합니다. 진실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자기 마음에 깨끗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들은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각 사람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로마서 3장 19-2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아직 거듭난 일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순간 당신에 대해 내리신 평결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차근차근 읽어봅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람이 범하는 죄의 가증함과 횟수에 있어 정도의 차이를 인정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결과적으로 유죄라는 점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 법정에 두 사람이 서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한 사람은 살인죄로 기소되었고, 또다른 사람은 절도죄로 기소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판사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고, 법에 정한 바에 따라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확실히 두 사람이 범한 범죄의 정도의 차이가 크게 달랐지만, 둘 다 유죄라고 하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세상에서 정한 법을 어긴 범죄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에서 하나님이 죄인에게 내린 평결에 대한 진술을 조심스럽게 살펴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죄인들의 입술로부터 듣기를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솔직히 자백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해야 마땅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눅 15:21).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울부짖은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8:9-14).
하나님은 만일 범죄한 죄인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로 인해 죽으신 구주이심을 거절하였을 때 임하게 될 결과를 축소해서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엄중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이것은 죄인과 하나님의 영원한 분리를 의미합니다(롬 6:23). 또 말씀하시길, "아들을 순종치(믿지: KJV 참조)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목숨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입술로부터 친히 나온 말씀이며, 또한 영원한 형벌에 대해 참으로 엄중하게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24) 주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말씀하시길,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하셨고, 또한 주님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장소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말씀에서, 주님은 자기 죄 가운데 죽는 사람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눅 16:19-31).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모든 사람들이 장차 큰 법정에 서게 될 것이며, 자신의 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무섭고도 두려운 선고가 모든 사람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1-15). 독자 여러분은 이러한 엄중한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임박한 진노를 피하"(마 3:7, 23:33)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러한 말씀을 읽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의 죄와 그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해서 자신에게 경고해주지 않았다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계속)
♥알프레드 P. 깁스. 성경교사로서 많은 가르침을 전해 주었으며 대표적인 저술로는 <설교자와 그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의무 예배>, <주님의 만찬>, 등 그 외 다수가 이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적인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Ⅲ.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구주되신 주님으로부터 그토록 긴급한 문제인 이 거듭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대답이 얼마나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것인지도 보게 될 것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거듭남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수단에 의해 이루질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 (2) 하나님의 성령, (3)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과 그 행하신 역사에 대한 믿음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며, 이 세 가지가 믿는 죄인의 거듭남 곧 중생의 역사에 있어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이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징으로 물이라고 하는 표상, 혹은 모형을 사용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언급하신 물을 가리켜 침례 예식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침례를 받음으로써 사람이 거듭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침례를 받지 않고도 경건하고 헌신된 삶을 살았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존중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이것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물"이 문자 그대로 물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분별도 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 부분과 또 다른 부분에서 그렇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다른 가르침에 대해서는 헛되이 성경을 상고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여기의 물이 문자적인 물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다른 부분을 읽어보면 분명해지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25절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또한 히브리서 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혹은 생명을 주며) 운동력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침례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정의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다만 단순히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벧전 3:21)으로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약 1:18)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침례는 이미 거듭난 사람만을 위한 것입니다. 침례는 그 상징하는 의미에 있어서 매우 아름답고 유익한 예식으로, 곧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있어서 하나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침례는 결코 거듭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침례는 이미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만 필요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침례받을 당시 했던 말은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해줍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행 10:47) 따라서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는 사람만이, 거듭난 결과로 물로써 침례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물은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징, 혹은 모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편 119편 9절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cleanse) 하리이까?" 그리고 나서 그에 대한 답변이 주어집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6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구절을 대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상징인 물이 어떻게 거듭나는 역사에 사용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징으로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것에 대해 이미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 물이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로써 자신이 볼 수 없는 부분인 사람의 얼굴에 묻는 때나 오물을 씻어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을 갈망하는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게될 때,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구원의 길에 대한 자신의 오해라고 하는 때와 오물을 그 마음으로부터 씻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깨어나면서, 아직 깊은 잠에서 덜 깬 몽롱한 상태에서, 세면대로 가서, 우리의 눈에서 "잠"을 씻어버리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상쾌해집니까! 하나님께 속한 것과 영적인 실체에 대한 오랜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물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이러한 영적인 것들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주어지면, 그 얼마나 마음이 후련해지겠습니까!
어쩌면 독자 가운데는 이 소책자를 읽기 시작할 때, 거듭남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그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모호하거나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자신의 선한 행위를 통해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거나, 또는 종교적인 노력을 통해 중생하고자 했을지 모릅니다. 지금 대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인용하고, 또 적용해본 결과, 오해로 빚어진 모호했던 문제가 분명해지고, 과연 거듭남이란 무엇인지, 또 그 복된 실제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영적인 안목이 뚜렷하게 열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물로 상징된 하나님의 말씀의 작용이 이제 분명히 이해되었을 줄로 압니다.
"이처럼 보배롭고 진귀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 손에 들려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다윗은 이에 대해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10장 13절에서 17절까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는 구절을 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명을 주신 이유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복음은 첫째,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한 말씀에 계시하셨듯이, 범죄하고, 무력하고, 그리고 지옥 가기에 마땅한 죄인들의 모든 필요를 마련하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둘째,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아드님을 선물로 주심으로써 입증하신 이야기입니다. 셋째,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 모든 회개하고 믿는 죄인들의 구원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킨 이야기입니다. 넷째, 하나님이 마련하신 "쉽고, 간단하며, 안전이 보장된 구원의 길"로써, 죄인들은 복음을 통해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이루신 역사를 믿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이제 동일한 성경을 통해서 이러한 복된 사실을 확신하게 되고, 이후로부터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시 119:105)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인도를 구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요컨대,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에 대한 다음의 지혜로운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혜를 얻고자 하면 읽고, 안전하고자 하면 믿고, 거룩하고자 하면 순종하라".
이전 단락에서 간단히 언급했던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모든 사람이 알기를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욱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다룰 주제는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인간의 상태는 죄악되고, 무력하며, 또한 절망적임
이 내용이 우리 자신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못됩니다. 더군다나 악성종양의 고통으로 인해 병원을 찾은 환자가 자신의 병명조차 모르지만, 치료의 가능성을 발견한 노련하고 정직한 의사가 진단을 내릴 때, 그것을 듣는 환자의 마음도 즐겁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환자의 상태에 대한 설명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환자가 의사의 진단에 잘 따르고, 수술에 동의하게 되면, 삶을 연장할 수 있는 큰 혜택을 맛보게 되어 오히려 환자에게 유쾌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직하게 범죄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영원한 형벌의 위험 가운데 처해있는 자신의 필요를 직시하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자신의 범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받기를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각 개인이 죄악된 본성, 즉 "육신"을 소유한 채 세상에 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본성은 자신의 부모로부터 획득한 것이고, 그 부모는 그의 부모에게, 그 부모는 또 그의 부모에게… 이런 식으로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곧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 죄악된 본성을 처음으로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죄악된 본성이 죄악된 생각이나 죄악된 행동, 그리고 죄악된 말과 태도로 나타나기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거짓말이나, 도둑질, 불순종하는 것, 또는 못된 성질 등에 대해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아이들에게 최상의 가정환경이나 엄한 가정교육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모든 인류를 죄인으로 정하신 것이 불공평하다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한 하나님이십니다. 또다른 사람, 곧 그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셔서, 육신의 몸을 입게 하심으로써, 아담이 세상에 가지고 들어온 것을 지고 가게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모든 범죄한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의지할 때,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시며, 구원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담의 죄로 인해 잃어버린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통해서 그 이상의 혜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행위(실천)에 의해서도 죄인입니다.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의 차이를 알게 되면서, 사람은 고의로 그릇된 것을 선택합니다. 진실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자기 마음에 깨끗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들은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각 사람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로마서 3장 19-2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아직 거듭난 일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순간 당신에 대해 내리신 평결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차근차근 읽어봅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람이 범하는 죄의 가증함과 횟수에 있어 정도의 차이를 인정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결과적으로 유죄라는 점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 법정에 두 사람이 서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한 사람은 살인죄로 기소되었고, 또다른 사람은 절도죄로 기소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판사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고, 법에 정한 바에 따라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확실히 두 사람이 범한 범죄의 정도의 차이가 크게 달랐지만, 둘 다 유죄라고 하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세상에서 정한 법을 어긴 범죄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에서 하나님이 죄인에게 내린 평결에 대한 진술을 조심스럽게 살펴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죄인들의 입술로부터 듣기를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솔직히 자백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해야 마땅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눅 15:21).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울부짖은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8:9-14).
하나님은 만일 범죄한 죄인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로 인해 죽으신 구주이심을 거절하였을 때 임하게 될 결과를 축소해서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엄중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이것은 죄인과 하나님의 영원한 분리를 의미합니다(롬 6:23). 또 말씀하시길, "아들을 순종치(믿지: KJV 참조)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목숨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입술로부터 친히 나온 말씀이며, 또한 영원한 형벌에 대해 참으로 엄중하게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24) 주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말씀하시길,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하셨고, 또한 주님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장소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말씀에서, 주님은 자기 죄 가운데 죽는 사람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눅 16:19-31).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모든 사람들이 장차 큰 법정에 서게 될 것이며, 자신의 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무섭고도 두려운 선고가 모든 사람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1-15). 독자 여러분은 이러한 엄중한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임박한 진노를 피하"(마 3:7, 23:33)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러한 말씀을 읽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의 죄와 그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해서 자신에게 경고해주지 않았다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계속)
♥알프레드 P. 깁스. 성경교사로서 많은 가르침을 전해 주었으며 대표적인 저술로는 <설교자와 그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의무 예배>, <주님의 만찬>, 등 그 외 다수가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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