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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뚝발이 므비보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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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2,040회 작성일13-06-21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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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어느 이른 아침에 나는 사무엘하 9장을 읽고 있었다. 한번 읽고나서 이 장은 두 발이 절뚝이는 한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인데 나에게는 아주 생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았는데 역시 아무 뜻도 찾아낼 수 없었다. 세번째 읽어가다가 나의 눈길은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신 말씀에 눈이 멈추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총을 묘사한 한폭의 그림"이라는 생각이 나의 마음 속을 스쳤다.
"아침 햇살이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풍경화와 같은 한 폭의 그림이 내 앞에 놓여진 것이 아닌가!"
시간이 흐를수록 이 그림의 감동은 나의 마음 속에 더해졌다. 나는 자주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는데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영혼들이 많았다.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낸 사무엘하 9장에서 우리는 "므비보셋"(은혜의 자녀)과 "시바"(자기의 의를 세우려는 사람)라는 두 인물을 볼 수 있다. 므비보셋의 상태는 하나님께 나아온 한 죄인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사무엘하 4:4을 보면 므비보셋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아들이며 그의 조부와 부친은 당시 전쟁에 나가 둘이 함께 죽었고 그는 피신하다 떨어져 절뚝발이가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줄곧 로드발에 숨어 살았는데 로드발은 "목초가 없는 곳"이란 뜻이다. 자기의 조부 사울이 다윗을 미워한 것을 아는 그는 틀림없이 다윗이 자기의 원수인줄 단정하고 그를 피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죄가 아담의 마음을 어둡게 하자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존전을 떠나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창 3:8). 이것이 바로 죄인된 우리의 상태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로 그는 하나님이 그의 원수인줄 단정하고 그분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렵고 떨리는 일로 생각한다. 당신도 이같은 생각 속에 머물러 있지 않는가?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신은 자신의 죄 때문에 두렵다고 할 것이다. 참으로 당신과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당신을 위해 내어주시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 당신의 모든 죄값을 다 치르신 것을 알게 된다면, 그 하나님은 당신이 나아갈 유일한 분이시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사무엘하 9장을 계속 살펴보자.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1절)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역사이다. 아무리 두 발이 다 저는 절뚝발이로써 온전히 타락한 아담의 자녀일지라도, 또한 그들이 아무리 먹을 것이 없는 메마른 땅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비는 베풀어지는 것이다. 아! 가련한 죄인들이여, 당신이 하나님을 떠나 숨으려고 애쓸지라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만한 것이 이 비참한 세상에는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지금껏 사단의 헛된 환영(幻影)을 따라 다녔는데, 아직도 당신의 가련한 심령이 쓰라린 실망으로 찢어지고 모든 것이 한낱 공허로 사라질 때까지 이 세상의 헛된 약속을 굳게 붙들겠는가? 나는 당신에게 결코 헛되이 약속하지 않으시는 한 분을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왕 앞에 불려나온 사울의 종 시바(자기의 의를 세우는 사람)는,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그는 로드발 암미엘의 집에 있는 절뚝발이"라고 보고했다(3,4절). 왕은 그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암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5절).
"데려오니"라는 말은 매우 귀중한 단어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나타낸 말이다. 우리가 늘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은 자기에게 합당한 자에게, 돌아올 댓가를 기대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르시다. 므비보셋은 그 은총을 받을만한 일을 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므비보셋이 먼저 해야할 일을 했기 때문에 그를 데리러 간 것이 아니다. 그 `은혜'가 바로 그가 있던 로드발로 그를 데리러 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불쌍한 죄인들이 있는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죄인들을 찾으러 오셨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우리를 찾으러 오신 것이다! 아직도 "사람이 먼저 자기의 할 일을 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바리새인들에게는 영원한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므비보셋은 자기의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절뚝발이였으므로 누군가 데려오지 않으면 올 수 없었다. 이와같이 우리도 그분께 데려감을 당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숨으려고 쓸데없이 애쓰다가 모두 멸망당할 것이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다윗의 생명을 노렸던 사울의 손자인 므비보셋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의 생명을 요구하는 심판의 준엄한 목소리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거기에 서 있는 모습은 바로 죄와 허물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의 존전에 끌려나와 공포에 떨고 있는 한 죄인의 모습이다. 그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므로 그에게 주어질 어떤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윗이 말한 것을 들어보기 전에 사무엘상에 나타난 사랑의 언약을 돌이켜 보자. 다윗왕 앞에 엎드려 있는 이 젊은이의 부친 요나단이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버리지 말라…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삼상 20:14,15,17).
당신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을 방문하여 고인(故人)이 된 옛 친구의 자녀들을 찾아본 일이 있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자기 발 앞에 엎드린 것을 보고 느꼈던 그 감정을 희미하게나마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말할 수 없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므비보셋이여!" 하고 그를 불렀다. 그는 공포에 떨면서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하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에게 베풀어질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하여는 전혀 예기치 못하고 있었다.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이것이 타락한 죄인의 생각이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종으로 드려 봉사한 수고의 댓가로 종국에는 구원받으려고 소망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심정에서 나오는 행위의 종교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제 다윗의 말을 들어보자. 탕자"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의 비유에서 나오는 아버지 같이 그는 므비보셋의 말을 막았다.

이것은 아무 조건이나 약정(約定)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같다.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순전히 거저 주시는 은혜이다.
"내가 반드시…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이것은 순전히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이다.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이것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늘 아버지의 측량할 수 없는 심정을 나타낸 그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거기에 어떤 책망이나 조건이 있었는가?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을 뿐이다(눅 15장).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가! 내가 지금 예수님에 대해 잘못 말하거나 하나님의 참 성품을 잘못 드러내고 있는가? 아니다. 그분이 그와 같이 잃어버린 죄인을 영접했던 것이다!
이것은 가련하게도 공포에 떨고 있는, 지옥 가기에 합당한 죄인들에게 하시는 그분의 말씀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두려워 말라 내가 반드시 예수를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고 하신다. 이것은 무조건 사랑이 넘치는 그분의 심정에서 흘러나오는 순전한 은혜인 것이다.

당신은 이같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4∼7).

당신은 "이것은 나의 분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두 발이 다 절뚝이는 이 젊은이에게, 그 치유 방법이나 아니면 가장 좋아 보이는 처방을 내려 그렇게 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치유 방법이나 처방에 대한 한마디도 없다. 그는 있는 그대로 왔으며 그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가 다윗에 대하여 그 마음 속에 의심을 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단은 불쌍한 죄인에게 하나님의 이 은총을 숨기려고 애쓰고 있다. 참으로 하나님을 알아보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지상의 어떤 사람이나 하늘의 어떤 성도가 필요한게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벌써 우리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충만되어 있는 것이다.

당신은 죄의 속박을 느끼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그분으로 하여금 당신을 구원하게 하는 방법에 관하여 쓴 장문(長文)의 책들을 읽고 스스로 혼돈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아마 어떤 사람은 당신에게 규례와 기독교 의식을 지켜야 구원의 소망을 갖는다고 가르치며,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당신을 용납하려면 당신은 이런 저런 체험을 가져야 한다고, 아무 효과없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으리라. 다시 말해서 그들이 당신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당신은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한쪽 발만 조금 저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부축이 약간만 필요하며 그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완쾌될 것이며 조만간 당신은 하늘나라에 갈 공로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이런 것으로 번민하며 당황하고 있다면 인간의 모든 사상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십자가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 당신이 자유롭게 되도록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기 위해 당신의 죄 때문에 고난 당하신 그분을 바라보라. 당신이 할 것이란 다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죄인에게 있어서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만큼 회개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없다.
값없이 주시는 이 은혜가 공포에 떨고 있는 므비보셋의 심정에 부어지자 그는 곧 이렇게 반응했다.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죄인이 무한한 은혜와 거룩함이 있는 곳에 끌려나왔다. 하나님의 참 성품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에게 계시되었다. 그는 거룩하신 사랑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은 것이다.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이 넘치는 은혜에 감동된 결과로 그는 땅에 엎드렸다. 이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회개"이다.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은 회개란 자신을 고상하게 하는 것, 즉 하나님의 마음이 영향을 받도록 자신이 개선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에게로 향하려면 우리의 선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윗은 은총을 베풀기 위해 마음의 변화가 필요했던가? 결코 아니다. 그의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 마음의 변화를 필요로 하실 수 있겠는가? 십자가는 멸망할 죄인들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당신이 지금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의 죽음에 나타난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았다면 당신에게서 온전한 마음의 변화를 즉각 일으켰을 것이다. 더욱 당신이 이 귀하신 사랑의 너그러움을 알면 알수록 당신은 더욱 그분 앞에 엎드리며 겸손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는 순간 당연히 받을 구원을 벌써 얻은 것이다.

그러면 종인 시바와 아들인 므비보셋을 잘 대조해 보자. 다윗이 시바를 불러 그에게 명하자 그는 모든 것을 수행하겠다고 동의했다. "내 주 왕께서 온갖 일을 종에게 명하신대로 종이 수행하겠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리석게도 시내산에서 바로 이같은 서약을 했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말로 서약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포기하고 율법주의로 돌아가고 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의 대부분이 그분의 자녀가 되는 대신에 그분의 종이 되려는 종교에 속해 있을 것이다.

그 아들(므비보셋)에게 순전한 은혜를 나타내신 다윗의 말은 그 종(시바)에게 한 말과는 엄청난 대조를 이룬다. "므비보셋이여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종에게는 은혜로 한 말이 한 마디도 없다. 반면에 아들에게는 명령으로 한 말이 한 마디도 없다. 한 사람은 법적 구속(救續)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하는 종살이요, 다른 한 사람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의 표시인 예배이다.

은혜의 자녀여, 당신의 분깃은 복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영생을 주셨다. 이제는 종이 아닌 왕자 중 하나요 왕의 식탁에서 먹는 자이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 당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항상 주의 상에 앉아 떡을 먹고 잔을 마시며 당신의 구원을 위해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과 흘리신 보혈을 기념하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항상 먹을 수 있도록 생명의 떡을 주셨다. 이제 당신은 그분의 자녀이므로 절대로 종의 신분이 될 수 없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롬 8:17).

이 놀라운 관계를 깨닫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큰 일이다. 당신은 종의 관계와 아들의 관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종은 항상 거하지 못하나 아들은 항상 거한다.

은혜는 원수의 자리에서 두려워 떠는 므비보셋에게 아무 조건없이 즉각 자녀의 신분의 모든 특권을 주었다. 우리는 그 은혜가 므비보셋을 온전히 겸손하게 했고, 그의 마음이 다윗에게 영원히 사로잡히게 했던 것을 알게 된다.
냉랭한 불신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다윗 왕에게 나아오기 전에는 보잘것없는 불쌍한 절뚝발이였다. 왕의 아들이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보잘것없는 불쌍한 절뚝발이이므로 왕의 상에 앉아서 그 특권을 결코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불쌍한 절뚝발이, 잃어버린 바 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오는 것은 은혜라고 인정하지만 그의 지속적이고 완전한 구원은 그 스스로의 행위와 순종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괴롭히는 문제이다. 그것이 만의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는 신자라면 자기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만일 나의 구원이 단 한 시간이라도 내 자신에 달려있다면 나는 구원받을 소망조차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자비를 나타내신 이 감동적인 그림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신자는 종종 시련의 때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믿지 않을 때와 동일하게 여전히 약한 것을 발견할 때 몹시 당황한다. 그러므로 그는 한 자녀로서 은혜 안에서 지탱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종으로 행하려고 애쓰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그의 가련한 절뚝발이 신세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어떤 분 아마 이런 것 때문에 몹시 시달림을 받아왔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자기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구나" 하며 자기의 온전치 못한 절뚝발이 행위를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그렇다! 당신은 당신의 그 절뚝이는 모습을 바라본다면 절대로 안식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들은 식탁 밑으로 집어넣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무한하신 은혜로 식탁 위에 차려놓은 것들을 바라보자. 그분은 그리스도를 기억하도록 우리 앞에 상을 차려놓으셨다. 우리가 가진 바 보잘것없는 절뚝이는 발이나, 우리가 해놓은 모든 것은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해결되어 내어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옛 자아는 그분 앞에서 이미 죽어 장사 지낸바 된 것으로 여기고 계신다. 이제 그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혀진 것을 보신다.
신자는 회개 이후에도 여전히 절뚝발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전에 가지지 못했던 새 생명과 새 성품을 가졌으며 또한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신다. 육이라 불리는 그의 옛 본성은 개선된 것 같을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 다만 신자가 소유할 것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만들어 주셨고 또 영원히 간직해 주시는 그 은혜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발들을 식탁 밑에 집어넣고 우리 앞에 베풀어 놓은 그 식탁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하심을 즐기자.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소망에 종지부를 찍고 그 옛 사람의 완전한 파멸을 보았을 때, 비로소 거룩한 생활의 능력이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분을 조용히 의지하며 뒤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의를 세우려는 그 육을 포기하기까지는 심한 몸부림이 있을 것이다(롬 7장 참조)

사무엘하 10장의 주제는 베푸신 은총을 거절한 결과인 심판에 대한 것이다. 이 죄악 세상에 하나님의 은총이 베풀어졌는데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가장 저주받을 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러나 이 엄숙한 말씀을 들으라.
"믿지 아니하는 자는…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7).
만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인 그분의 아들을 거절한다면 당신의 영원한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의 구원을 깨달은 사람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오늘날의 모든 사람의 모형인 이 두 사람의 역사를 잠시 추적해보고자 한다.

사무엘하 15장에서 우리는 압살롬의 반역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다윗 왕이 버림받아 예루살렘을 떠나갈 때, 버림받으신 예수께서 건너셨던 그 기드론 시내를 건넜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온 땅 사람들이 대성통곡하며 모든 인민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예수께서 버림받으셨던 그 밤에 그 시내를 건널 때 같이 건너갔던 몇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시간도 그분과 함께 깨어 있을 수 없었다.
30절에는 이같이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울며 올라가니라."
예수께서도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실 것을 내다보시고 그의 제자들을 이끌고 이 산으로 가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에서 일으키사 하늘에 올리심으로 세상에서 버림받은 그분을 영광으로 영접하셨다.
다윗왕이 버림받아 감람산 길로 올라간 후에 왕 앞에 나타난 시바의 성품을 사무엘하 16:1∼4에서 볼 수 있다. 시바는 왕을 크게 섬긴 것으로 나타나는데 나귀에 떡과 건포도와 과일과 포도주를 잔뜩 싣고 왕께 나아왔다. 다윗은 그에게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 왔느냐?"며 므비보셋의 처지를 물었다. 시바가 왕에게 고하기를 "그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며 자기 아비의 나라를 도로 찾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참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는 종교를 가진 사람은 시바와 같다. 외관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의 비밀을 알고 계신다. 시바에게 있어서 그 겉모양은 대단히 열정적이고 헌신하는 것같아 보였다. 아마도 그는 아름다운 말을 구사하며 근사한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위선이었다.
버림받았던 다윗왕이 돌아오는 날(삼하 19:24∼30) 므비보셋은 왕을 맞으러 나갔다. 그렇다. 버림받은 사랑하는 예수께서 돌아오시는 날 그분의 모든 은혜의 자녀들이, 잠자고 있는 자들이나 살아있는 자들이 그분을 맞으러 공중으로 올라갈 것이다(살전 4:15∼18). 므비보셋의 마음은 어떠했는가? 다음의 아름다운 말씀을 살펴보자. "므비보셋은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깍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다윗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그의 마음은 버림받은 그 왕에 대한 애정으로 고동치고 있었으며 사랑하는 그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애통하는 자리 외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자리라도 취하기에는 너무나 그의 애정이 깊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도 버림받으시던 밤에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셨던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19,20).

아, 우리는 버림받으신 주님의 심정에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고 있다. 므비보셋이 취하였던 자리, 우리가 사랑하는 주의 돌아오심을 기다리며 애통하고 있는 자리 외에 다른 어떤 자리라도 취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시바가 왕께 갖다 바친 그 실과와 떡과 포도주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이제 진실은 밝혀지게 된다. 나귀에 한 짐 가득 실과를 준비했던 사람은 므비보셋이었다. 그러나 그는 절뚝발이였던고로 시바가 그 나귀를 빼앗아 타고 왕 앞에 나타나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준비해 가지고 온 것처럼 위선의 가면을 쓰고 므비보셋을 모함했던 것이다.
그러면 은혜에 깊이 감동되었던 므비보셋의 말을 들어보자.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비의 온 집이 내 주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은혜가 주는 놀라운 확신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순전한 은혜로 당신을 그분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신 것을 온전히 확신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의 오심을 큰 기쁨으로 기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이에 대한 므비보셋의 대답은 매우 아름답다.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셨으니 저(시바)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므비보셋이 원했던 것은 그 밭이 아니다. 이제 그가 몹시도 원했던 것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자기에게 은총을 베푸셨던 분을 맞이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사로잡히게 했다. 그 밭이 문제가 아니다. 바울은 확실히 말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8).
우리는 더욱 므비보셋과 같아야 하며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강림하심을 기다리던 데살로니가 성도와 같아야 한다. 므비보셋은 절뚝발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왕의 그 은총을 온전한 확신으로 받아들여 그의 사랑의 실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가 돌아올 때까지 많은 비난을 참아가며 큰 인내로 그의 올라옴을 기다렸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 역시 능력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쁜 소식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여 큰 확신 가운데 인내해 가며 오히려 기쁨으로 그들의 원수들에게서 오는 모든 모욕과 환란을 참았다. 그같이 인내할 수 있었던 능력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들은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는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참 자녀는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비방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놀라운 날이 오고 있다. 우리가 기다리고 계신 그분이 속히 오실 것을 누가 전할 수 있겠는가?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 여기 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 22:20).

다윗왕이 돌아왔다면 다윗의 주가 되시는 예수께서 돌아오시지 않으시겠는가! 우리의 눈이 곧 그분을 보게 될 것이다. 오오, 빛나는 복된 소망이여! 우리의 소망은 예언의 말씀이 모두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이 아니다. 그것은 그 때에 해당한 자들에 대한 축복이다. 다만 그분의 아들 예수님의 피로 씻음받은 신자들이 보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소망은 주 예수님의 친히 나타나심이다.

이 아름다운 그림은 사무엘하 21장에 한폭이 더 펼쳐져 있다. 사울의 집에 내린 심판의 날에 대한 그림이다.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여기에서 이 은혜의 자녀의 역사는 끝난다. 그러면 머지않아 예수께서 돌아오셔서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영광을 누릴 것이다. 더욱 크고 흰 보좌가 설치될 것이며 아담의 타락한 모든 자손이 그 보좌 앞에 설 것인데 은혜의 권속에 들어간 자는 한 사람이라도 그 영원을 결정짓는 자리에 서지 않을 것이다.
지각없이 구원을 스스로 이루려고 애쓰는 죄인이여, 그 날에 어떻게 될 것인가? 율법을 지켰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가 바로 율법을 범한 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감히 우리의 행위로 그 보좌 앞에 설 수 있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자기 이웃보다 낫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위선자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단 한 사람도 예외일 수 없다. 어떤 사람도 자기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나는 죄인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그대로 해보라고 하라. 그러나 죄인은 사함을 받아야 한다. "피흘림이 있은즉 사함을 받았느니라."

"아,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 예수여,
당신은 당신의 백성이 죄로 말미암아 받을
그 진노와 저주와 심판을 다 가지고 가버리셨기에
이제 아무것도 가로막을 수 없는 그 은혜와 영원한 평강은
당신 안에서 안식하는 모든 영혼의 행복한 분깃이니이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라. "내가 반드시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그러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행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참으로 구원받은 믿음에서 얻어진 열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영의 봉사가 있을 것이다.
사람 앞에서 선하게 보이는 그 수많은 일들이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람이 자기 의를 세우려는 행위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잔뜩 짊어지고 있지만 실상은 그것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거절하는 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의 확신이 깊어질수록 더욱더 죄에 대한 당신의 증오도 깊어지며, 그리스도를 향한 당신의 온전한 믿음의 헌신은 가득하게 될 것이며, 더욱 진지하게 하늘로부터 그분의 돌아오심을 인내로써 기다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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