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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그림자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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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888회 작성일13-06-21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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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계획하셨던 여러가지 축복들을 발견하기 위해 구약의 역사에 나오는 그림자적인 사건들을 더듬어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고 유익한 일이다. 그것들 중에 요셉의 생애는 하나님에 의해 그려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다. 부활의 빛이 그 그림 위를 비추이면, 그림 전체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요셉이 자신을 그의 형들에게 알릴 때까지 그는 사실상 거의 20년 동안이나 죽어 있었다. 그의 부친 야곱이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오랫동안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며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창 37:34,35)고 말한 이후 실로 20년 동안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후 야곱은 이렇게 고백했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창 46:30). 이 요셉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두가지 사실인 죽음과 부활의 모습을 본다.
창세기 37장에 나오는 요셉의 꿈에서 우리는 만물의 으뜸되시는 그리스도의 뛰어나신 모습을 볼 수 있다. 밭의 곡식단들과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그에게 절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9,10).

요셉의 뛰어남은 형들의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같이 예수의 뛰어남은 유대인들의 미움을 불러 일으켰다.
요셉의 형들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라고 말했듯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마 21:38)라고 말했다.
요셉은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그들의 마음의 악함이 드러났다.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지고 앉아서 음식을 먹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앉아서 큰 안식일을 지켰다. 요셉은 은 20에 팔리었고 예수께서는 은 30에 팔리셨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이 그림처럼 요셉은 이삭과 같이 실제로 죽지 않았으니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귀하신 예수께서는 깊은 수렁에 빠졌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이삭은 제단 위에 놓여졌으나 살림을 받으며, 요셉도 구덩이에 던져졌으나 살림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죽는데까지 내어주셨다.
요셉이 그의 형들한테서 학대를 받았으나 그처럼 아주 버림받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아주 버림당하여 크게 소리지르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 어찌하여 그분은 그처럼 십자가에서 버림받아야 했을까? 어찌하여 여호와께서는 그분으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을까? 그분의 영혼을 "속건제물"(贖愆祭物)로 드리게 하신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요셉의 고난은 자기의 뜻을 이기지 못하여 왔던 것이요, 예수님의 죽음은 스스로 자원하여 바친 희생이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참으로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그 큰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림으로 그를 제거하였다. 예수님께서 살해당하심으로 세상은 그를 제거하였다. 요셉의 형들의 속임수와 거짓말은 요셉을 거의 잊어버릴 정도로 오랫동안 매우 성공적이었다. 만일 그때까지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다만 죽은 자던가 없었던 자로 기억될 뿐이었다.
오, 참혹한 어두움의 세상이여! 그대들은 생명의 주를 살해하고 문명을 자랑하며 그대들의 기만과 거짓말로 훌륭하게 성공해왔다. 그러나 그대들의 운명의 날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대들의 일곱 해 풍년이 곧 지나가고 일곱 해 겹치는 환란이 곧 닥쳐올 것이다. 만일 그대들이 예수님을 기억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죽은 자, 또는 없었던 자로 생각한다. 오, 그대 버림받은 세상이여! 머지않아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두려운 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요셉의 역사로 돌아가 보자. 요셉이 그의 형들과 양을 먹일 때는 17세의 소년이었으나 애굽왕 바로 앞에 나설 때는 30세가 된 성인이었다. 역시 일곱 해의 풍년이 흘러갔고 20년 동안 잔인한 형들의 험악한 죄는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그날은 닥쳐왔다.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이런 일이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풍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죄는 잊어버리게 된다. 탕자가 사치스레 살고 있을 동안 그가 죄를 깨달았다거나 그의 부친의 집을 생각했다는 말을 우리는 전혀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탕진하고 흉년이 들었을 때 그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그의 부친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일곱 해의 풍년이 끝나고 일곱 해 흉년이 시작되었다. 그 탕자가 자기의 부친 집의 양식이 생각났듯이, 야곱은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알게 되어 요셉의 열 형들을 그곳에 내려보내어 곡식을 사다가 먹고 살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다루기 시작할 때 우선 그의 양심의 본바탕에 있는 죄를 들추어내신다.
요셉이 애굽의 온 땅을 총리하게 되어 그들이 요셉에게 가지 않으면 안되었으니 이는 하늘 아래 누구도 그들에게 양식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영혼이 예수께 이끌림 받아 나아가야 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은 그들을 보고 형들인 줄 알았으나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20년 동안에 그들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는 심한 뉘우침이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처음 주님 앞에 나올 때 구원받아야겠다는 욕망만큼 자기의 죄를 온전히 고백하지는 못한다.
요셉이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죄의 문제는 그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 허물 많은 양심의 끊어진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야 한다.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제 그들의 항변(抗辯)을 들어보라.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로서 독실한 자니…." 그들은 자신들이 버리고 죽게 한 그의 앞에 서서 여전히 자신들이 독실(篤實)한 사람들이라고 버티고 있다. 참으로 오늘날의 세상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다. 인간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고도 율법을 지키는 체한다.
요셉의 형제들은 "우리는 형제가 열둘인데 말째는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라고 했다. 그때 그 양심의 줄은 좀더 잡아당겨져야 했다. "너희들이 만약 사람을 보내어 그 말째 아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면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하며 곡식을 주기는커녕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깨우친 영혼을 심하게 다루어 구원을 얻기커녕 그 불쌍한 영혼이 요셉의 감옥에서 괴로움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만이 그 요셉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문이다.
삼일 후에 요셉은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말째를 데려와 너희의 진실을 입증하라"고 말하며 한 사람을 인질(人質)로 삼고 그들을 놓아주었다. 죄값이 준 쓰라린 괴로움이 사무쳤던 것이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마음에 말할 수 없는 비통이 일어났다. 양심의 죄책이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 회개가 아니며 아직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요셉은 그들에게 엄숙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사랑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그들은 그가 요셉인줄 전혀 알지 못했다. 요셉이 통역을 세워서 그들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방법이 공포로 떨고 있는 죄인에게 아무리 엄격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모두가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던 사실을 생각해 보라.

형제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갇히게 되었고 그들은 자루 가득 곡식을 얻었다. 모든 일은 끝난 것 같이 보였다. 그들은 곡식을 얻어가지고 그 이상한 총리를 떠나갔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종종 일어나는 한 순간의 구출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확실히 어떤 축복을 받았을 것이며 아마도 당신의 마음은, 그들의 자루가 곡식으로 가득 찼던 것 같이 그 축복으로 가득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 온전히 회개한 것이 아니다. 죄의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상태이며 아직도 당신은 참되고 온전하게 돌이킨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객점에서 그 자루를 풀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돈이 여전히 자루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민은 전보다 더욱 커졌다.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그렇다. 당신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조차도 어떤 환경이, 그 자루의 입을 열었을 때처럼 들이닥친다. 죄의 기억이 산같이 밀어닥치면 마음은 이내 무너지고 만다. 양심이 하나님의 임재의 빛 속으로 이끌려 들어갈 때 마음과 육은 무너진다. 이와 같은 때에 사단은 속삭인다. "너는 하나님의 원수이다. 너는 악하고 악한 죄인이다." 이같은 치명적인 속삭임이 영혼에 일어날 때 우리는 사단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슬프게도 사람들은 사단이 하는 거짓말을 그대로 삼켜버린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있는 부친에게로 돌아갔다. 비탄에 잠겨있던 노인 야곱은 그동안의 이야기를 듣고 더욱 슬픔의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고 야곱은 말했다. 이 모든 일이 자기를 위한 것인 줄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은 오직 요셉의 죽음뿐이었다.

그 땅에 기근은 더욱 심해졌다. 그들은 그 애굽 총리에게 다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괴로움에 허덕이는 불쌍한 영혼이여, 당신은 예수께로 가야한다.
무서운 양심의 괴로움! 야곱은 베냐민을 단념해야 했다. 유다가 영원히 보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만 예수의 죽음만을 아는 영혼의 체험일 것이다. 그런데 그 노인 야곱은 그들이 그곳에 가야 한다면, 그 땅의 아름다운 소산물인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야자와 파단향과 갑절의 돈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마치 가인의 종교와 같은 것으로 가인은 인간이 땅에서 가꾼 가장 아름다운 소산물을 하나님이 원하시는줄 알았다. 그들이 요셉의 심정을 모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노인 야곱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새롭게 결심하고 새롭게 노력했다. 적은 향유, 적은 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선물을 자기고 갔으나 도리어 요셉으로부터 잔치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총리의 집으로 데려가자 그들은 몹시 무서워했다.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을 벌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런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을 벌하기는커녕 오히려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고 하면서 물로 발을 씻게 하였다. 요셉이 정오에 집에 들어서자 그들은 다시 엎드려 그에게 절했다.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지금까지 생존하시냐?" 요셉의 심정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생존해 계신다고 대답하며 머리 숙여 절했다. 그러나 요셉이 그토록 사랑하던 동생 베냐민을 보고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는 그는 급히 밖으로 나가 울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표현이다. 오, 독자여!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그리워하시는 그 심정을 안다면!
요셉은 그때까지 정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음식을 배설한 자리에 앉았다. 아,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 보라.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그들은 다시 죄를 잊어버리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 당신은 죄를 일순간 잊어버리고 주의 상에서 즐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죄를 잊어버리는 것과 사함받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의 자루는 다시 채워졌다. 축복은 반복되었으나 아직도 죄를 영원히 버리는 것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곡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애굽 사람 몇이 뒤쫓아 와서 그들의 자루를 뒤졌다. 총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잔을 그들이 가져갔다는 것이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잔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을 확실히 무너뜨렸다.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아. 그 때 그와 같은 죄에 대한 압도적인 가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정직하다고 버티던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굴복하고 말았다.
유다가 그의 동생 대신 인질이 되겠다고 자청해서 나섰다.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진 이후로 비로소 그들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에게도 어느 정도 그와 같은 고통과 슬픔과 가책이 일어났을 것이나 그에게는 참 뉘우침과 회개가 없었다.
무엇이 그들을 변하게 했는가? 창세기 45장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정직함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시인하고 끌려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총리가 "나는 요셉이라"고 말했을 때 그 형제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놀람을 상상할 수 없다. 아, 놀라운 마음의 변화! 그들의 마음 속의 모든 생각은 변했다. 그들이 구덩이 속으로 던졌던 그 요셉이, 그들이 죽었다고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그 요셉이 살아서 애굽의 국무총리로 그들 앞에 나타났으니, 그들은 말을 못하고 근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나타남에 몹시 당황해 했다.
지난날의 죄를 처벌한다면 그들에게 사형언도라도 내렸겠지만 요셉은 은혜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했다.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죽었다고 생각한 요셉이 살아서 자신을 나타냈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켰고 그들로 요셉의 본심을 알게 만들었다.
이것은 죽으셨으나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소의 사울에게 나타나셨던 것과 같은 것이다. 사울은 그의 마음이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도를 좇는 사람들에 대하여 증오로 가득 차서 그들을 살해할 사명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중이었다. 홀연히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둘러 비추이며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그에게 말하였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사울은 놀라서 대답하였다. "주여, 뉘시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6:14,15).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나는 요셉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나타나 "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다. 그 효과는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울은 "나는 예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의 마음의 모든 생각이 변했다.
형제들의 마음을 변화시킨 것이 살아있는 요셉의 나타남이었던 것같이 살아나신 예수님의 계시만이 회개하지 못하고 있는 자에게 참된 회개를 가져온다.
"그들이 가까이 가니…." 하나님께로 이끌려 나온 불쌍한 죄인의 축복된 자리이다.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당신이 하나님께 거역하여 범죄했지만 정작 당신이 가까이 가야 할 분은 바로 당신 곁에 계신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죄를 알고 계신다. 당신에게 있는 의를 요구하지 않고 당신이 죄인인 것을 자백하기를 원하신다. 그분 앞에 그 모든 죄를 자백하라. 그분은 당신이 정직할 수 없는 것을 아시며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신다.
요셉이 이야기한 것을 들어보자.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이것은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표상으로서 참으로 귀한 고백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에 관해서 이같이 말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행 2:23,24). 그리고 베드로는 이것이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바라고 증거하였다. 참으로 이것은 모든 성경 속에 있는 목적이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졌으나 하나님은 애굽의 주가 되게 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하나님은 그분을 하늘과 땅의 주가 되게 하셨다.
이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었다면 예수님을 인류의 죄를 위해 죽게 하사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은혜의 그 놀라우신 경륜은 얼마나 더 큰 것인가!
나는 부활 속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설명할 방도를 거의 알지 못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어떤 정원사가 말라 죽게 된 포도나무 한 그루를 가졌는데 그는 그 나무에서 도저히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을 잘 아는 그는 열매를 얻으려고 새 포도나무 그루터기를 하나 가져왔다. 그는 옛 포도나무를 개량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제하여 버리고 새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렇다. 아담 안의 옛 포도나무는 죄로 시들어버렸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을 보시며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을 아신다. 인간은 죄로 파멸되어 시들어 죽은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오랫동안 생각지 않고 있던 진리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은 그 옛 포도나무를 개량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것을 제거해 버리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것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은 하나님께서 새 포도나무를 심으신 것과 같다. 인간은 그 옛 포도나무를 개량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큰 과오를 범하는 것은 없다.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 안에 이 영광스러운 새 창조의 시작이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께로 났기 때문이다(고후 5:14∼18 참조).

만일 요셉이 애굽에 보냄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기근으로 죽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으심이 없었더라면 온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였을 것이다. 그분이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가 되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멸망했을 것이다. 그분의 보혈 이외에 아무것도 죄를 속할 수 없다. 살아나신 그분의 생명 이외에 아무것도 생명을 줄 수 없었던 바 그분은 죽으심으로 죽음을 멸하셨다.
살아난 요셉에게서 흘러나오는 이 그림 속에 있는 모든 축복을 주목해 보자. 그가 애굽의 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들을 완전히 용서해 주었다.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목을 안고 우니…." 이것은 용서의 확실한 증거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고센 땅에 거하는 지상축복을 받게 되었다. 은혜는 죄를 사하여줄 뿐 아니라 그들의 죄 위에 넘쳐난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하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살아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줄만큼 악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안전과 기쁨을 위하여, 그 큰 구원으로 당신을 구원하시려는 특별한 경륜으로 창세 전에 십자가의 죽음을 예정하셨던 것을 잘 생각해 보라.
당신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간에 온전한 계약으로 이루어진 그 십자가의 놀라운 죽음을 깊이 고찰해 보라. 하나님이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고 독생자 예수님이 당신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죽으셔서 당신을 한 온전한 새 창조로 드러나게 하셨으니 거기는 죄라는 것이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죽음의 병, 또는 타락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더이상 죄가 해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축복된 사실이다. 아, 엄청나게 놀라운 은혜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역사)이 이처럼 요셉의 역사에 그림자로 나타나 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차디찬 무덤에 누으셨던 예수님이 지금 그 새 창조의 머리이신 바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뛰어난 분이시다.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 23). 영세 전부터 감취었던 영원한 비밀이며 하나님의 비할 바 없는 승리이다. 이방의 불쌍한 죽은 죄인들을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이다.
옛 창조를 바라보고 나서 새 창조를 바라보라. 시작인 아담으로부터 그 끝인 십자가를 바라보라(십자가를 멸시한 자들의 또 하나의 끝이 있으니 유황 불못이다). 이제 하늘의 거룩한 새 창조인 죽은 자 가운데서의 첫 열매, 그 시작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 생명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영혼마다 신령한 몸으로 충만하게 한 것을 생각해 보라.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 왔을 때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새 창조 안에서의 하나님의 기쁨은 어떠할까? 하나님의 존전에서의 회개하는 한 영혼에 대한 기쁨은 큰 것이다. 그런데 빛나는 부활의 아침에, 그 구름 한점 없는 그 아침에, 머지않은 그 때, 구속받은 온 교회는 주를 영접하러 일어날 것이다. 아, 그때 주어질 티없는 기쁨의 광경이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무한한 기쁨, 그분의 영원하신 안식을 가지게 되실 것이다. 아, 빛나고 영광스러운 전망인 그 아름다운 창조를 내 영혼은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모든 사람의 눈에 비추일 것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황홀케 할 것이다. 당신을 위하여 죽으신 사랑하시는 그분이, 당신이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가신 그분이 그 빛나는 처소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길을 재촉하여 가라! 이 세상 헛된 영화가 어찌 당신의 것이랴?

요셉의 형제들이 그의 마음을 오해하여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라고 말했을 때 요셉은 슬퍼했다. 사단은 자주 자주 그 어둡게 하는 의심으로 속삭인다. "아마도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네 죄에 합당하게 너를 다룰 것이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사랑 속에 그대로 온전히 쉬지 못하고 있었다. 이같은 경우가 우리에게도 흔히 일어난다. 그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온전한 이끌림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옛 성품이 죄 속에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몹시도 고민한다. 우리는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악하고 온전히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의지하던 옛 자아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벗어버릴 때 예수님의 사랑은 여전히 동일하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은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는가? 그분을 진정 알고 예수님에 대한 당신의 마음의 생각이 변하였는가? 요셉의 형제들처럼 언젠가 그분 앞에서 당신 자신을 깨달아 안 적이 있는가? 당신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었는가? 그렇다면 그분이 말씀하신대로 당신은 영생을 가졌다.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은 결코 정죄받지 않는다. 이제 당신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이처럼 그리스도께로 이끌림받아 나아가기까지는 그 누구도 참된 회개를 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신은 예수님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으니 어떤 사람의 마음도 예수님의 마음처럼 자비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 당신의 죄를 예수님께 자백하였는가? 바로 그분께로 당신은 이끌림 받아 나아왔는가?
의심에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이여, 죄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을 아름답게 비유한 이 귀한 그림을 다시 바라보라.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계신다.

요셉이 자신을 그의 형제에게 알리려 할 때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게 했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을 즉각 변하게 했으니 그의 용서해주는 사랑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그러나 요셉이 말했다. "근심하지 마소서."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표상이었다.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 가운데 서서 자신을 알리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러자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다. 이에 대한 주 예수님의 인자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라. "어찌하여 무서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눅 24:36∼39). 그리스도께서는 고난받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던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당신은 이 주님을 믿고 있는가? 속죄함, 온전하고 영원하고 확실한 속죄함이 당신에게 전해진 것이다. 잃어버린 우리 죄인에 대한 얼마나 큰 사랑인고! 요셉이 한마디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은 것같이 주 예수께서는 조금도 우리를 탓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정도로 인간의 행위가 악하며 그분을 받아들이기를 계속 거절하리만큼 우리의 죄가 악할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온전한 사랑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분의 못 박힌 손과 발을 바라보라. 아, 우리의 죄가 그분으로 하여금 고통과 죽음을 맛보게 하지 않았는가? 그분의 죽음이 우리에게 그 영원한 평강을 주신다.
형제들의 평강은 요셉이 그들에게 준 평강이었던 것이다. 요셉의 마음에는 그들에게 안심을 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와같이 예수께서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강을 얻도록 죽으셨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는 것은 우리의 행복한 감정이 아니요 예수님의 그 보혈인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화평을 만드셨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요셉이 형제들 앞에서 통곡했다. 이것은 형제들의 강팍한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가혹한 진노를 받아 마땅하나 요셉은 그들에게 너그러운 사랑을 베풀었다.
의심에 젖어 지쳐있는 불쌍한 영혼이여, 그 아버지가 돌아오는 탕자를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지 않았던가! 거기에는 단 한마디의 꾸짖음도 탓함도 없었다. 아,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 무거운 죄짐에 허덕이고 있는 불쌍한 영혼에게 나타나실 때 그의 마음은 놀라운 변화가 온다. 그 사죄하시는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분의 존전에서 추호도 의심없는 온전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고통으로 많은 사람을 살려주셨다면 어찌 예수님의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많은 무리를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생명과 영광으로 인도하려 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이며 그분의 가장 큰 역사이다. 그분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을 때 그 안에서 우리에게 역사하신 그 크신 역사를 우리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하나님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주신 바로 그 자리는 주께서 자기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주신 자리임을 깨닫는 것보다 더 확신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요셉은 바로왕 앞에 자신의 형제들을 알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당신은 이 놀라운 사랑, 이 놀라운 능력을 믿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분과 함께 살리심을 받아 그분과 영원히 하나가 되어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기근으로 굶주렸고 죄로 짓눌렸으며 적은 양식을 찾아 헤매었던 요셉의 형제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창세기 45장을 재삼 읽어보고 요셉의 무한한 자비를 생각해 보라. 온전한 사죄와 풍성한 접대로 그들의 용모가 달라졌다. 그의 앞에서 누리는 그들의 기쁨! 참으로 구걸하던 행인들이 이제 요셉의 형제가 되고 그와 함께 후사가 되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이 그림은 신자가 지금 처하고 있는 신령한 관계를 나타내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제까지 외인이요 하나님도 없는 자요, 행위로 말미암아 원수가 되어 죄를 잊으려고 하다가 죄책으로 떨며 비참한 굶주림 속에 있는 죄인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존전에, 그 은혜의 자리에 끌려나온 것이다.

한번은 내가 요셉에 관한 이 설교를 했을 때 어떤 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저는 확실히 요셉이 그 형제들을 사랑했던 것같이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진정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것만이 당신에게 평강을 줄 것이며 하나님은 당신에게 요셉의 형제들보다 더 나은 공로가 없을지라도 순전한 은혜로 당신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더욱 그분은 의로우시지만 예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무한하신 사랑을 당신에게 베푸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자여, 당신의 상태와 신분에 이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하기 위해 당신의 죄에 마땅히 내려져야 할 그 무서운 심판이 그 의로우신 분인 예수께 먼저 내려져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하나님께로 인도함을 얻게 하는 놀라운 변화!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으나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은 예수로 말미암아 이끌리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새 존재이며 새 창조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는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시다(골 1:18).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롬 8:16,17). 새 창조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자리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곳이다. 부활하신 주님과 교회가 일체인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실제이다.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는 그의 뼈 중의 뼈이요 살 중에 살이라." 오 놀라우신 은혜여! "찬송하리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 2:6).
이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이라면 이제 우리의 행동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 버림받았던 요셉이 제때에 애굽의 총리로 나타났던 것과 같이, 확실히 버림받은 예수님도 곧 찬란한 영광 중에 하늘과 땅의 주로 나타나실 것이다. 틀림없이 이 표상처럼 그분이 그 형제(유대인)들에게 알려질 것인바 그들은 그들이 찌른 예수님을 바라보며 말할 것이다. "네 두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그들이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는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들의 회개는 요셉의 형제들의 변화처럼 갑자기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의 지상 축복과 영광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교회의 하늘 영광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못한다. 그때에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심같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요 17:23 참조).

찬양 받으실 예수님, 믿음으로 우리는 당신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것을 봅니다. 속히 오셔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소서. 오 주여, 모든 무릎이 당신께 꿇을 것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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