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
페이지 정보
조회787회 작성일13-06-21 02:15본문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그분의 말씀 안에서 자기 자신에 관하여 완전하고 신령한 계시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배우며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충만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성경 각 권에 있는 성령님의 뚜렷한 목적을 전혀 알지 못하므로 혼동 가운데 있다.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본다면 인용되고 있는 많은 성구들이 그 의미하는 바와는 아주 다른 의미로 인용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보통 로마서 3:21∼26에 있는 구절을 그리스도의 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중대하고도 심각한 혼동이 아닌가?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있는 것인지 또는 오신 후에 있는 것인지, 율법 외에 주어진 하나님의 의인지는 그 말씀이 나타낸 바와 같이 명백하다. 전혀 율법의 원리를 떠난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시면서도 그분 또한 의로울 수 있는 이 중대한 기본 진리를 많은 설교에서 들어볼 수가 없다.
우리는 나팔이 몹시도 불분명하게 불려진 "하나님의 의"라는 이 가장 중대한 진리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열심히 연구한 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뜻하는 바를 전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그리스도의 의와 혼동하고 있다. 나는 유식하고 재능있는 사람들을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그들과 하나님의 온 교회를 돕는데 있어서 이 주제를 분명히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그럼 하나님의 의는 무엇이며 그리스도의 의는 무엇인가?
의(義)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 인격과 행위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그 하나님의 의가 그분의 거룩한 속성과 완전한 조화를 이뤄야 한다. 어떻게 죄인에 대한 그분의 온전하신 사랑이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죄를 위한 구속 사역, 즉 십자가에서의 대속(代贖)이다. 찬양 받으실 하나님, 그분은 의로우시며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시다. 죄를 가까이하실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실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며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것임을 명심하자.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의(義)는 무엇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여러분은 아마도 성경에 "그리스도의 의"라고 정확하게 표현된 곳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후서 1:1에는 그것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이 땅을 밟았던 유일하고 완전하신 의의 사람이 나타나 있는데 곧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가 완전히 절대적으로 조화되었으며 그분의 삶과 일치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분의 그 순종은 그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게 했다. 그분은 죽어야만 했다. 한 사람의 순종이 모든 죄인에게 필요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을 의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던 것이다(롬 5:18,19).
그분은 이것을 행하기 위하여 흠없고 점없는 제물이 되셔야 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이처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우리가 확신하는바 죄인에게 내리는 율법의 모든 모형과 그림자, 모든 제사, 그 최종 요구와 저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끝났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의롭다 하시면서도 지극히 거룩하신 분으로 하늘 위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킨 것이 인간을 회복시키는 좋은 위치에 처하게 하며 또한 율법을 지킨 자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선하게 하는 것인가? 의가 이같이 율법을 지킴으로 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구속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목할 것은 또다른 어떤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구속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구속이란 무엇인가? 이제 다음을 더 읽어나가기 전에 종이 한 장을 취해서 구속에 대해서 당신이 아는 바를 적어보라. 특히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킴이 우리 구원의 절반이며 그분의 속죄 죽음이 또다른 절반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적어보라.
하나님께서 취하신 모형을 예로 들어보자. 다른 복음, 또는 거짓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애굽으로부터의 구속"에 관해 하나의 이색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출애굽기 5장에서 한가지 생각해 보자. 그들은 노예로서 혹독한 속박 가운데 있었는데 벽돌 만드는데 소용되는 짚이 없어서 요구한 만큼의 벽돌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들이 몹시 고통 가운데 있었을 때 그리스도의 모형인 모세가 그들에게 필요한 벽돌의 수효를 채워주었는가? 모세가 벽돌을 만들어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해야 할 법적 수효를 채우게 했는가? 구약이나 신약성경에서 이같은 생각을 나타낸 구절은 한 곳도 찾아볼 수 없다.
구속이란 죄와 사단의 노예되어 있는 사람을 개선하거나 개량하는 따위가 아니다. 애굽의 속박에 있는 노예를 그 위치에서 이끌어내어 온전히 새로운 위치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만 어린 양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 그분의 보혈로 말미암아 받은 우리의 현재적 구속이거나 장래 부활에 있을 우리 몸의 구속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 값을 이미 치렀으므로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의 신분으로 해방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속은 옛 사람을 개량하거나 선하게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스라엘이 죽음을 예표한 홍해를 건넜을 때 그들은 애굽의 벽돌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죽었다. 그들은 그 종의 상태에서 이끌려 나왔다. 이것이 신자로 하여금 여기 이 지상에서도 거룩하며 의로운 생활을 하게 하는 능력의 비결이 아니고 무엇인가?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롬 6:11) 신자는 그것에 대해 그렇게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 7:4).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이다. 사람의 방법은 그 반대이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께로 났다면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도록 그 율법과 혼인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네가 율법 지키기를 실패한 곳에서,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께서 너로 하여금 다시 율법을 지키도록 결심하게 해 줄 것이다." 어떤 영혼도 이같은 방법으로 평안함이나 구출함을 받을 수 없다. 로마서 7장 전부를 읽어보라. 여기에 바로 그와 같은 경우가 있는데 그는 중생하였으나 아직도 율법 아래 있으면서 몹시도 고민 가운데 자기 육신에 무슨 선한 것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에게 부과된 그 벽돌의 수효를 채우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육신 속에 선한 것이 조금도 없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한다. 그러나 그의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이것만이 온전한 구출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말하리라. "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값없이 주신 죄사함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그외 더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당신에게 전한 것을" 듣고 믿은 것은 축복이다. 복음의 이 부분만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확실한 증거로 아는 것은 매우 좋은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내어줌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목적인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다.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4: 24,25, 5:1).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사함을 얻는 것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또한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말했다(행 13:39).
우리가 신자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무엇인가?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당신은 확실히 당신에게 정죄함이 없기를 바라고 있는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당신은 "죄 많은 내 성품이 개선되어 하늘나라에 가기에 합당하게 되었으면 한다"고 말하려는가?
성경에는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한 곳이 전혀 없다. 그 반면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를 십자가로 보내셨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고후 5:21). 하나님의 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심과 동시에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많은 옛 본성이 못 박혀 죽게 하셨음을 볼 수 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와 함께 그 옛 사람을 영원히 제하여 버리고 신자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자리, 즉 둘째 사람인 마지막 아담 안으로 넣어주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이며,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 것이며, 또한 그분 안에서 이 모든 것이 되게 하신 것이다(엡 1:3∼7 참조).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하신 목적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깊이 생각해 보라. 그것은 단지 잃어버린 사람이 복귀되며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라. 우리가 육체로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 모세가 율법 아래서 그 벽돌의 수효를 채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난"(고후 5:16∼18) 것이다.
신자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하늘의 부르심의 값진 은총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며 원하는 것이 또 있을까?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있는 그 옛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의인 것이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자로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 내가 아니고 곧 그리스도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
예를 들어보자. 보통 로마서 3:21∼26에 있는 구절을 그리스도의 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중대하고도 심각한 혼동이 아닌가?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있는 것인지 또는 오신 후에 있는 것인지, 율법 외에 주어진 하나님의 의인지는 그 말씀이 나타낸 바와 같이 명백하다. 전혀 율법의 원리를 떠난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시면서도 그분 또한 의로울 수 있는 이 중대한 기본 진리를 많은 설교에서 들어볼 수가 없다.
우리는 나팔이 몹시도 불분명하게 불려진 "하나님의 의"라는 이 가장 중대한 진리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열심히 연구한 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뜻하는 바를 전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그리스도의 의와 혼동하고 있다. 나는 유식하고 재능있는 사람들을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그들과 하나님의 온 교회를 돕는데 있어서 이 주제를 분명히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그럼 하나님의 의는 무엇이며 그리스도의 의는 무엇인가?
의(義)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 인격과 행위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그 하나님의 의가 그분의 거룩한 속성과 완전한 조화를 이뤄야 한다. 어떻게 죄인에 대한 그분의 온전하신 사랑이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죄를 위한 구속 사역, 즉 십자가에서의 대속(代贖)이다. 찬양 받으실 하나님, 그분은 의로우시며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시다. 죄를 가까이하실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실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며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것임을 명심하자.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의(義)는 무엇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여러분은 아마도 성경에 "그리스도의 의"라고 정확하게 표현된 곳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후서 1:1에는 그것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이 땅을 밟았던 유일하고 완전하신 의의 사람이 나타나 있는데 곧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가 완전히 절대적으로 조화되었으며 그분의 삶과 일치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분의 그 순종은 그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게 했다. 그분은 죽어야만 했다. 한 사람의 순종이 모든 죄인에게 필요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을 의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던 것이다(롬 5:18,19).
그분은 이것을 행하기 위하여 흠없고 점없는 제물이 되셔야 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이처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우리가 확신하는바 죄인에게 내리는 율법의 모든 모형과 그림자, 모든 제사, 그 최종 요구와 저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끝났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의롭다 하시면서도 지극히 거룩하신 분으로 하늘 위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킨 것이 인간을 회복시키는 좋은 위치에 처하게 하며 또한 율법을 지킨 자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선하게 하는 것인가? 의가 이같이 율법을 지킴으로 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구속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목할 것은 또다른 어떤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구속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구속이란 무엇인가? 이제 다음을 더 읽어나가기 전에 종이 한 장을 취해서 구속에 대해서 당신이 아는 바를 적어보라. 특히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킴이 우리 구원의 절반이며 그분의 속죄 죽음이 또다른 절반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적어보라.
하나님께서 취하신 모형을 예로 들어보자. 다른 복음, 또는 거짓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애굽으로부터의 구속"에 관해 하나의 이색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출애굽기 5장에서 한가지 생각해 보자. 그들은 노예로서 혹독한 속박 가운데 있었는데 벽돌 만드는데 소용되는 짚이 없어서 요구한 만큼의 벽돌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들이 몹시 고통 가운데 있었을 때 그리스도의 모형인 모세가 그들에게 필요한 벽돌의 수효를 채워주었는가? 모세가 벽돌을 만들어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해야 할 법적 수효를 채우게 했는가? 구약이나 신약성경에서 이같은 생각을 나타낸 구절은 한 곳도 찾아볼 수 없다.
구속이란 죄와 사단의 노예되어 있는 사람을 개선하거나 개량하는 따위가 아니다. 애굽의 속박에 있는 노예를 그 위치에서 이끌어내어 온전히 새로운 위치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만 어린 양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 그분의 보혈로 말미암아 받은 우리의 현재적 구속이거나 장래 부활에 있을 우리 몸의 구속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 값을 이미 치렀으므로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의 신분으로 해방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속은 옛 사람을 개량하거나 선하게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스라엘이 죽음을 예표한 홍해를 건넜을 때 그들은 애굽의 벽돌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죽었다. 그들은 그 종의 상태에서 이끌려 나왔다. 이것이 신자로 하여금 여기 이 지상에서도 거룩하며 의로운 생활을 하게 하는 능력의 비결이 아니고 무엇인가?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롬 6:11) 신자는 그것에 대해 그렇게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 7:4).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이다. 사람의 방법은 그 반대이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께로 났다면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도록 그 율법과 혼인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네가 율법 지키기를 실패한 곳에서,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께서 너로 하여금 다시 율법을 지키도록 결심하게 해 줄 것이다." 어떤 영혼도 이같은 방법으로 평안함이나 구출함을 받을 수 없다. 로마서 7장 전부를 읽어보라. 여기에 바로 그와 같은 경우가 있는데 그는 중생하였으나 아직도 율법 아래 있으면서 몹시도 고민 가운데 자기 육신에 무슨 선한 것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에게 부과된 그 벽돌의 수효를 채우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육신 속에 선한 것이 조금도 없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한다. 그러나 그의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이것만이 온전한 구출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말하리라. "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값없이 주신 죄사함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그외 더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당신에게 전한 것을" 듣고 믿은 것은 축복이다. 복음의 이 부분만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확실한 증거로 아는 것은 매우 좋은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내어줌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목적인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다.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4: 24,25, 5:1).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사함을 얻는 것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또한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말했다(행 13:39).
우리가 신자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무엇인가?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당신은 확실히 당신에게 정죄함이 없기를 바라고 있는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당신은 "죄 많은 내 성품이 개선되어 하늘나라에 가기에 합당하게 되었으면 한다"고 말하려는가?
성경에는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한 곳이 전혀 없다. 그 반면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를 십자가로 보내셨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고후 5:21). 하나님의 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심과 동시에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많은 옛 본성이 못 박혀 죽게 하셨음을 볼 수 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와 함께 그 옛 사람을 영원히 제하여 버리고 신자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자리, 즉 둘째 사람인 마지막 아담 안으로 넣어주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이며,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 것이며, 또한 그분 안에서 이 모든 것이 되게 하신 것이다(엡 1:3∼7 참조).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하신 목적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깊이 생각해 보라. 그것은 단지 잃어버린 사람이 복귀되며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라. 우리가 육체로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 모세가 율법 아래서 그 벽돌의 수효를 채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난"(고후 5:16∼18) 것이다.
신자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하늘의 부르심의 값진 은총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며 원하는 것이 또 있을까?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있는 그 옛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의인 것이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자로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 내가 아니고 곧 그리스도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
- 이전글제비들은 가버리고 Jun-21 [Fri] / 2013
- 다음글잃어버린 죄인에게 전할 기쁜 소식 Jun-21 [Fri]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