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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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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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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893회 작성일13-06-21 02:18

본문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려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훈계를 위해 기록된 느헤미야서에 있는 교훈을 살펴보자.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서 이 책을 살펴본다면 주님께서는 이 책을 통해 현재와 관련된 여러가지 사건들에 관해 많은 교훈을 주실 것이다.

느헤미야 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된다. 그는 유대의 남은 자의 상태와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죄를 자복(自服)하며 기도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능력으로 구속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파멸에 이른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 여호와께 간절히 탄원하고 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느 1:11).

그는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과 크신 왕의 성의 상태를 듣고 통렬히 가슴 아파하며 여호와를 떠난 그들의 악한 죄악을 온전히 자복하고 있다.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다.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교회의 현 상태에 대해 생각하며 죄를 자복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주님의 피로 사신 백성을 위해 슬퍼하며 통곡하고 기도해 본 일이 있는가? 우리는 이에 대해 논쟁만 하려 하지 말고 주님 앞에 앉아서 세상의 포로가 된 오늘날의 교회와 초대 교회의 상태를 비교해 보라. 하나님께서 처음 성령으로 교회를 세우셨을 때 거기에는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는 성별의 벽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성벽은 훼파되고 무너지지 않았는가? 그 옛 도성에 있던 모든 집들이 견고하고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한 예루살렘을 형성하고 있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다함께 한 몸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었다"(행 5:13).
당신은 주님 앞에 앉아 교회가 포로되었던 암흑시대를 돌이켜 보라. 그때 성별의 벽은 훼파되고 무너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의 마음을 강하게 연단하여 장래의 사역을 준비시키신 것처럼 다른 일꾼들도 그와같은 방법으로 친히 준비시키시고 특별한 사역을 위해 일으키신다.

1장에서 하나님 앞에 깊숙히 엎드림과 연단이 있은 후 2장에서는 그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흥왕을 위한 사랑의 거룩한 열망과 활동을 볼 수 있다.
2장에서 우리는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과 그의 동료들은 계속 느헤미야를 대적하여 성벽을 중건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떤 자들이며 결국 누구를 대표하는 인물들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호론 사람과 암몬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들로서 그 당시 이스라엘 땅에 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활동적이었으며 허풍을 떨었으며 자신들의 권력을 교활하게 행사하는 자들이었지만 이스라엘에 속한 백성들은 아니었다.
이와같이 오늘날 소위 교회라 불리는 곳에는 실제로 하나님께 대하여 외인이요 전혀 하나님의 참된 교회에 속해있지 않으면서도 활동적이며 허풍을 떨며 거만하고 교활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갈망하는 사람들과, 성도들을 돌보는 사람들과, 참된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는 성별의 벽을 세우는 사람들의 원수요 훼방자들인 것이다.
이제 이와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곱가지 적대행위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2: 10).
이처럼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를 흥왕케 하려는 참된 일꾼들을 일으키셨을 때 많은 무리들이 심히 근심했던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위클리프(Wycliffe), 후스(Huss), 루터(Luther)와 같은 일꾼들을 일으키셨을 때 소위 성직자라는 무리들의 근심이 얼마나 컸을까!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한 그와같은 일곱가지 특징들을 우리는 특별히 지난 세기 동안 찾아볼 수 있다. 모든 교파주의를 떠나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부흥을 원했던 일꾼들을 하나님이 일으키셨을 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근심거리가 되었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느헤미야가 했던 것처럼 수년 전에 몇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와 엎드렸다. 그들은 교회가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 있음을 보고 엎드려 자복하고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부흥케 하려는 선한 열망을 불어 넣으셨다.
느헤미야가 밤에 일어났을 때 그와 함께 한 사람은 몇 사람밖에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 속에 무엇을 보여주셨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느헤미야와 함께 짐승을 타고 예루살렘 성을 한바퀴 돌아보자. 용정(龍井)에서 분문(糞門)에 이르는 동안 모든 성벽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파괴된 교회의 내부와 벽들이 똑같은 상태에 있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의 지배 아래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성경은 이것을 모두 분명히 예언했었다. 오늘날의 기독교계의 상태가 성경에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딤후 3장과 벧후 2:1∼9을 보라. 계 17, 18장에는 그 극도에 달하고 있다). 교회가, 버림받은 그리스도에 대한 빛나는 증인으로서 초대교회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회복되리라는 암시가 전혀 없다. 다만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을 붙들고 그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미약한 남은 자들을 보게 될 뿐이다.

그 당시 느헤미야가 짐승을 타고 예루살렘 성 주위를 돌아다녔던 것처럼(2:11∼16) 당신도 기독교계를 한 번 돌아다녀 보라. 카톨릭이나 개신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그분의 존전에서 그 모든 정경(情景)들을 살펴 보라.
느헤미야는 절망 가운데 그 손을 늘어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을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고 백성들을 격려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그를 도우셨으므로 백성들은 대답했다. "일어나 건축하자."
이렇게 되자 두번째 형태의 반대가 일어났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첫번째 형태의 방해는 대적들의 근심이었는데 그 두번째 형태의 방해는 비웃음이었다.
그 당시 유다의 남은 백성들은 소수로서 극히 미약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거룩한 도성이 성별의 벽으로 둘러싸이는 것을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그 도성이 그들에게 그처럼 소중했다면 하나님의 교회의 신성한 울타리가 성도들에게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느헤미야가 그 남은 백성들을 분기시켜서 성벽을 쌓게 했던 것처럼 성령님도 각 처소에 있는 적은 무리를 분기시키셔서 오랫동안 훼파되었던 그 벽을 다시 세우고 계신다.
오, 그러나 얼마나 많은 현대판 산발랏들이 그것을 비웃고 업신여기고 있는지! "당신들과 같은 적은 무리들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들은 한때 근심했고 이제는 비웃는다.
3장에서는 성벽이 건축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적은 무리들이 각기 자기 위치에서 성을 중수(重修) 하고 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일어나고 있는 상태를 잘 묘사한 그림이 아닌가! 주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 곧 하나의 하나님의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인 곳마다 적은 무리들이 성별의 벽을 쌓고 있으며 하늘의 건축자께서는 능란한 석공처럼 각 조각들을 잘 짜맞추고 계신다. 그 일은 바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선한 손이 그 남겨진 연약한 백성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배타적이라 불릴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당신은 반드시 그 배타적인 담을 쌓아야만 한다. 안에 있는 것을 보존하고 밖에 있는 것을 배척하지 않으려면 구태여 벽을 쌓고 문짝을 달아 빗장을 지를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교파주의를 배척함이 없이는 도저히 한 몸된 복된 진리를 진지하게 받아드릴 수 없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나서 어떻게 이단들의 다른 신들에게 관대할 수 있겠는가?
4장에서는 세번째 형태의 방해를 보게 된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근심과 비웃음이 있었고 성을 건축하자 이제는 크게 분노한다. 불행하게도 오늘날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성벽을 중건하는 백성들에 대한 산발랏의 분노가 아무리 컸다 해도 참된 중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모여든 영혼들의 신령한 울타리에 대한 저들의 가혹한 증오만큼은 못했을 것이다. 저들은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 "뭐라고? 우리 교파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않는 모든 무리들을 배척한다고?"
"산발랏이…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저들도 역시 산발랏처럼 말한다. "이 미약한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하려는가?" 아, 성벽을 쌓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마리아 군대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미약한 그리스도인들도 거대한 기독교 집단의 군대에 비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이 분노는 네번째 형태의 방해로 이어진다. 산발랏이 유다 백성을 조롱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이와같이 그 원수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심히 증오하며 경시하고 조롱한다. 이것 역시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현상이다.
그러나 대적들의 근심과 비웃음, 분노와 조롱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되어 나아간다. 영혼들은 그 신성한 울타리 안에 있는 귀하신 선한 목자 그리스도에게로 계속 모여들고 있다. 거기에서는 그리스도만이 높임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는 모든 것은 배척을 받는다.
이제 산발랏과 그의 무리는 무엇을 했는가? 다섯번째의 형태의 방해가 나타난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소란하게 하자 하기로…"(4:7,8).
우리는 지금까지 대적들의 근심, 비웃음, 분노, 조롱을 보아왔는데 이제는 싸움, 즉 하나님의 사역에 반대하는 심한 공격을 보게 된다. 이것도 역시 현 시대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기독교 집단의 모든 교파들이 다 함께 연합하여 그 성별의 벽을 더 이상 건축하지 못하도록 싸움을 걸고 공격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산발랏과 그 무리들이 함께 의논하여 유다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자주 달려들어 쳤듯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원수들이 잠입해 들어가 악한 소문을 퍼뜨리며 그 사역을 어떻게 해서든지 멈추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 배후에는 공중의 권세잡은 악한 영이 역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이 여전히 계속되었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 적대 행위가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붙들게 되고 그 역사는 더욱 진행될 것이다.
5장은 매우 심각한 장면이다. 남은 백성들의 실패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조금도 없다. 오, 하지만 그 찬양받으실 그분께로 우리를 모아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셨다면 아무도 그분께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아버지께서는 실패하는 사람에게로 영혼들을 모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아들에게로 모으시고 계신 것이다.
인간들은 스스로 로마, 영국, 스코틀랜드 등 무수한 집단의 교회를 만들어냈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잃어졌던 진리를 다시 회복시키셨는데 그것은 곧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과 오직 그리스도만을 그 중심으로 인정한다는 진리이다. 인간의 집단과 구별하는 그 성별의 벽이 세워지고 있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 기독교 진영이 있는 반면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성별된 울타리 안에 모인 거룩한 무리들이 있는 것이다.
이제 여섯번째 형태의 방해를 주목해 보기로 하자. 느헤미야가 성을 건축한다는 소식을 듣고 산발랏과 그의 무리들이 무엇을 하였는가?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그러자 느헤미야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6:2,3)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근심, 비웃음, 분노, 조롱 그리고 싸움과 같은 다섯가지 형태의 방해를 보아왔는데 이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교활이라는 형태의 방해를 보게 된다. 그들의 말은 마치 "너무 그렇게 속이 좁고 배타적으로 놀지 말고 너희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오노 평지 한 촌으로 내려오라 우리가 거기서 서로 만나 타협하자"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산발랏은 한두번이 아니고 네번씩이나 그의 사자를 보내어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종들을 꾀어 그들의 배타심을 포기하게 하고 그들의 성벽을 떠나 낮은 수준의 오노 평지로 내려오게 하려고 힘썼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속 그들을 지키셨다. "저희가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보내되 나는 여전히 대답하였더니"(6:4). 하나님을 위해 타협하지 않는 것은 느헤미야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큰 일이었다.
산발랏은 자기 생각대로 그의 사자에게 다섯번째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내왔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게셈)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평강 가운데 거하는 자답게 분명하게 대답했다. "너의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만일 느헤미야 자신이 자기 마음대로 교만하여 이같이 행했다면 그야말로 편협하여 접근할 수 없는 비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행동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이보다 더 아름답고 충성된 것이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운동에 관한 묘사가 아닌가? 그리스도께 모인 몇몇 미약한 성도의 거룩한 담이 있다. 그리고 희랍, 로마, 프로테스탄트의 큰 진영이 있다. 느헤미야 시대 당시 아직도 많은 유다 사람이 사로잡혀 있었던 것같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큰 진영에 잡혀 있다.
이같이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벧후 2:1∼3).

이토록 무섭게 묘사해 놓은 예표가 우리 목전에서 성취되었다. 그것이 비록 오늘날 가장 존경받는 직업의 하나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 아닌가?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호색하는 길을 따르고 있다. 당신이 좀 더 사마리아의 현대적 진영의 기록을 알려면 디모데후서 3장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 진영에서도 역사하여 많은 영혼이 구원받은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 그분은 희랍에서, 바벨론에서, 로마에서 역사하실 수 있다.
사단은 옛날 산발랏과 같이 이런 환경을 이용해서 오노 평지로 내려오라고 반복하여 유혹하고 있다. "당신의 편협한 배타성을 버리고 공장(工匠)으로 내려오라. 우리를 시인하면서도 여전히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붙잡을 수 있다. 다만 그곳에서 나오라. 만일 당신이 내려와서 우리를 시인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역시 우리와 같은 예루살렘에 있는 한 종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배타적이다. 자, 내려와서 우리와 함께 의논하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성별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그것은 너의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교파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로 모아 놓은 자들, 곧 주의 이름과 그 영광만을 구하는 자들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마리아의 군대와 함께 하면서 동시에 중건(重建)된 성의 거룩한 울타리 안에 있는 적은 무리와도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
데 교회(프로테스탄트 주의)에서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분에게로 간 자들, 곧 빌라델비아 교회(계 3장)에 있는 미약한 자들에게는 그 거룩한 울타리가 있었다. 그러나 귀하신 주께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는, 자신을 온통 자랑하는 라오디게아 교회 집단이 있다.
당신은 다수와 부요함을 자랑하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 집단 안에 있는가? 그렇다면 아직도 당신은 그분의 능욕을 지고 그분께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당신에게 명백하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영문 밖에 있는 그리스도께로 모인 성도가 어찌 내려가서 오노 평지의 공장(工匠)들을 시인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오노 평지의 수많은 공장(工匠)들도 나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는 크다. 느헤미야로 말미암아 하셨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진영에서 구별되어 예루살렘 성 안에 남은 자들은, 기독교 집단의 진영에서 구별되어 그리스도에게로 모인 영혼들보다는 못한 것이었다. 이같이 모인 그들은 그리스도께 더욱 참된 것이었다. 그분 주위에 모이는 것이 유일하고 참된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포기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일곱번째 형태의 방해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내부에 있는 위험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사단의 교활성을 말한다. 산발랏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의 집에서 함께 만난다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성전의 문을 닫는 것은 우리의 등불을 말 아래 감추는 것과 같다. 그 유혹은 우리의 선한 간증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우리는 그 일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줄 확신하고 낙심하거나 위축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가장 큰 위험은 거짓 형제들로부터 왔던 것이다. "깨달은즉 저는 하나님의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6:12).
그 원수는 성이 건축된 것을 알았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6:16). 그러나 그 안에 거짓 형제들이 있었다. "유대의 귀인들조차도 여러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저희에게 이르렀으니… 유다에서 저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겉으로는 그리스도에게로 모이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유다 사람들이 잡혼(雜婚)을 했던 것처럼 주님 안에 있는 몇 형제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릇된 교리와 섞으려 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이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며 또한 큰 시련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고 이에 대해 놀라지 말아야겠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30).

이와같은 자들은 바른 길을 찾아 나오는 영혼들에게 크나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께로 모여든 성도들은 오늘날의 가장 큰 위험이라 할 수 있는 그와같은 그릇된 연합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일곱가지 형태의 방해를 알아보았다. 원수의 근심(2:10), 비웃음(2:19), 분노(4:1), 조롱(4:3), 싸움(4:8), 교활하게 밖으로 끌어내려는 것(5:1∼9), 내부에 있는 위험(6: 10).
여러분도 이렇게 말하리라. "나도 지금까지 그와같은 방해들을 많이 보아왔어."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을 막는 방해가 아무리 컸을지라도 성벽은 마침내 완성되었듯이 성도가 그리스도에게 모였고 성곽이 세워졌으며 문짝들이 달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지키도록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일으키셨다. 거듭되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로 모이는 거룩한 가르침을 보존해 주신 것이다. 모든 찬양을 주님께 드리자!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우리의 대적 산발랏은 그 힘이 훼파되었지만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다. 이 일곱 방해, 즉 거듭되는 방해는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 성별의 벽은 결국 완성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만일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때와 같이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 모아놓았고 또 만일 그들이 사람이 만든 모든 교파를 배격하며 유일한 하나님의 교회를 찾았다면 더구나 이런 출발점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순종하는 자녀들을 모두 받아드리도록 충분히 컸었다면 참으로 지금쯤은 그것이 넓게 확장되었을 것이다.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진리가 아닌가?"
하나님의 교회가 초대교회처럼 교회의 관리, 은사, 그리고 예배하는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모셨다면, 그렇다면 그곳은 그분이 거하시는 넓은 처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곳은 말씀을 따라 주를 경외하는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충분한 곳이 아닌가! 이 진리를 알게 될 때 인간이 만든 모든 교파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곳은 그렇게 넓고 그렇게 복된 자리인데 어찌해서 그 안에는 적은 무리가 있는가' 하고 물을지 모른다. 과연 그렇다. 어떤 도시에는 다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가 없는 데도 있고 또 다른 곳에는 그렇게 모이는 교회가 있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도 있다.
이런 경우는 예루살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이것이 7장에 있는 논제이다. 그 성의 광대함에 비해 그 안에는 거민이 적었으며 그 수효도 기록될 정도였으니 그들은 사로잡혀 갔던 사람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올라온 자들만 기록되어 있다(7:6∼60 참조).
사실은 많은 사람이 함께 올라왔었다.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돈과 임멜로부터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 종족과 보계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의 이름도 역시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방백(다스리는 자)이 저희에게 명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7:61∼65).
이 모든 것은 매우 중요한 교훈들이다.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혼합함으로 말미암아 그 국민성을 잃게 되었다면, 교회가 세상과 혼합함으로 그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거의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계보를 분명히 보여줄 수 없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계보를 보여줄 수 없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혼미 속에 빠져있는 것이다.
우리의 계보가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 지성물을 먹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 계신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가셨고 지금은 영광으로 관 쓰신 그분을 알아야 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아 우리의 의가 되시는, 우림과 둠밈을 가지신 그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분의 얼굴에는 우림과 둠밈, 즉 하나님의 빛과 온전함이 비취고 있다. 만일 당신의 구원이 확실치 않다면 어떻게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 첫째되는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결코 쉬지 말라. 당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나 살펴보라.

당신은 "과연 내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라. 당신의 죄가 모두 영원히 도말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을 의롭게 하시는 분이신가? 과연 당신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것이 절대로 없는가? 이제 당신이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 확실한가? 또한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게 된다면 그분이 자기와 항상 함께 있도록 당신을 데려갈 것이 확실한가?
당신은 이 모든 엄숙한 문제들을 당신 자신의 느낌이나 경험을 바라봄으로써 해결할 수는 없다. 다만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분을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매우 관심거리가 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그들이 성별된 성곽의 울타리에서 내려와 공장들과 혼합되지 않았지만 그들 상호간에는 벽이 없었다.
백성이 한 사람과 함께 모였다. 제사장 에스라가 그 회중 앞에 율법책을 가지고 나왔다. 그는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 앞에서 그 책을 읽었다. 뭇 백성은 그 책에 귀를 기울였다. 그 책은 하나님의 책이다. 에스라가 그 책을 펴서 읽자 백성들은 주를 송축하였고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달았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여"(8:8).
이것은 그리스도께 성별된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들은 반드시 성경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들은 책을 펴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 책을 알게 해야 한다. 그러면 손을 들고 머리 숙여 얼굴을 땅에 대고 주를 경배함이 있을 것이다. 방백 느헤미야에게 하셨던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깨닫게 해주신다면 주님 안에 있는 지식의 기쁨으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그들만 누렸는가? 아니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8:10). 그 말씀을 깨달은 모든 백성은 그렇게 하였다.
단지 우리 각 개인의 축복과 향상만을 추구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것은 영적 이기주의(利己主義)이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고 경험하는 것은 개인적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모두 먹어야 한다. 그 번제의 기름은 우리의 귀하신 예수님의 심오한 뜻과 애정과, 세상에서의 그분의 행위의 귀하심과, 그분의 변하지 않는 사랑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찬양 받으실 인품의 그윽한 향기가 하늘 높은 곳에 충만하지 않는가? 단 것을 마시고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아무것도 예비하지 못한 자에게 분깃을 보내는 것을 우리의 복된 사업으로 하자.
이것이 당신이 끊임없이 해야 할 일이다.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악한 것으로 당신을 중상모략하는 자에게도 해야 할 일이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모든 영적 선을 구하고 하나님의 온 교회에 분깃을 보내도록 하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이제 우리는 그들이 성경을 읽고서 그들에게 선포되었던 말씀을 깨달은 뚜렷한 효과를 알게 될 것이다.
둘째 날 모여서는 초막절에 관해 기록된 바를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칠월 절기에 초막에 거할지니라",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會)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이것은 아주 주목할만한 사실이 아닌가? 그들은 솔로몬 시대 이스라엘 전성기와 비교하면 한줌밖에 안되는 인구였지만 이 절기는 지금껏 이렇게 지켜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절기에 이스라엘이 초막에 거하는 것은 그 백성이 오랫동안 사모하고 있던 메시아의 천년통치를 기다리는 그 백성의 아름다운 상징이었다.
교회가 바울 시대 이후 하나님께서 오늘날 영문 밖의 그리스도에게로 그 미약한 남은 자들을 모을 때까지 초막절을 지켜보지 못한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바울 시대에 있었던 초대교회의 태도였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살전 1:9,10, 2:19, 3:13, 4:15∼18).
18세기 동안의 소위 교회사(敎會史)에서 우리는 이 초막절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볼 수가 없음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틀림없이 그 박해의 비참한 시대에는 그것이 조금 있었으나 세상이 박해를 그치자 곧 교회는 세속화되어 세상 속에, 아니 세상의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랑이 지체하고 있는 몇 세기 동안 교회는 잠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미약한 남은 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모아놓은 이후 최근의 몇 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성경은 우리가 배운 장에 기록된 바와 같은 위치와 결과를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 결과는 동일한 것이 아닌가? 교회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복된 소망이 회복되었고 초막절에 응하는 태도를 다시 한번 취하게 되었다. 그 모인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그 아들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되었으니 매우 큰 즐거움이 있게 되었다. 우리는 죄와 상관없이 구원에 이르게 할 그분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히 9:28, 요일 3:2).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무서운 침륜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그분의 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앎으로 큰 즐거움이 있으며 지금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그분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복된 특권이다. 오, 개선할 날의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여!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때 이스라엘이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그들의 모든 성읍에 선포했던 것처럼 주께서 우리로 기록된 것을 발견한 바를 거룩한 담력으로 알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 서로의 지적(知的) 교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또한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알게 하며 또한 하늘로부터 그분의 아들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게 하니 우리가 더 요구할 것이 무엇인가?
이처럼 그 성은 건축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즐거움은 그 인간의 증오를 보상받고 배타주의 비난을 씻은 것보다 더 큰 것이었다. 나는 그 성에 대해서 이 이상 더 연구해 가고자 하지 않지만 알려드려야 할 것이 한가지 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자기 만족, 자만, 자존심의 소산이다. 당신들은 참된 터 위에, 하나님의 거룩한 울타리 안에, 참 중심의 둘레에 있다고 하지만 지상에 있는 단 한 줌의 백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편협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자기 만족에서 온 소산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 당신의 생각은 잘못되었다. 9장을 읽어보라. 인간의 생각과 아주 대조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것은 자기 우월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스라엘 자손…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허물을 자복하고…." 그때 그들은 율법 책을 낭독하고,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아아,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분의 명령이다. 악으로부터의 성별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에 대한 혐오를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더 우리는 자백하게 되고, 놀랍게도 우리가 자백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분을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레위 사람이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자기를 살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된다.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이처럼 주 여호와는 그들의 영혼 앞에 계시게 되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허물과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시고 함께 하신 모든 것이 9장 전체에 빛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한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확실히 개인이든지 또는 주께 모인 성도의 모임이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더욱더 우리 육은 깨어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를 범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셨다. 참으로 깊고 참된 겸손은, 우리의 영혼과 불못 사이에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분께 모든 영광과 찬양을 드리자! 그분은 친히 그들을, 구속받은 자들을 위해 예비한 거룩한 처소로 데리고 가기에 합당하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이 모든 것은 확실히 오늘날의 우리를 위해 기록된 진리이다.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모임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터를 떠나 종교계에 있는가? 아니면 그 남은 자들처럼 초기에 있었던 교회의 터로 돌아왔는가? 당신은 느헤미야가 그 거룩한 성에 대하여 고민했듯이 기독교 집단의 현상태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교회만이 선을 찾을 수 있다고 알게 되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역사를 반대하는 거듭되는 일곱가지 훼방을 알고 있는가? 즉 대적들의 근심, 비웃음, 분노, 조롱, 싸움, 외부와 내부에서의 교활성에 대해 알고 있는가?
당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불확신 가운데 있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알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의 해결을 위해 성경을 열어 그 기록된 것을 깨닫고 그 살진 것을 먹고 그 단 것을 마시게 되었는가? 그러면 아무것도 예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분깃을 보내는 것이 당신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말씀을 상고함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도록 인도해주지 않았는가? 그 성별되는 증오의 성을 쌓은 까닭에 당신은 비난받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이 당신을 겸손하게 하여 주 앞에서 허물을 자복하고 그분을 경배하게 하였는가?
끝으로 하나님께서 그 남은 자들 앞에 계셨던 것처럼(9장 참조) 당신의 영혼 앞에 그분이 계신가? 당신의 영혼이 그 거룩한 성, 그리스도 안에서 쉬는 안식을 얻었는가?
그러면 이제 두로 사람을 주의하라. 그들이 성 안에 들어와 유혹케 하는 각종 물건을 팔 것이다. 성문을 굳게 닫아라. 그리하여 아무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안식을 깨뜨리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 안에 있는 당신의 즐거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는 마지막 장의 교훈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두로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 되겠지만 우리 하나님께는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분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을 묘사한 이같은 그림을 줄 수 있으시다. 그분만이 이같이 우리 발에 빛을 줄 수 있으시다. 진리인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를…. 주를 경외함으로 로마서 12:4,5, 16:7을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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