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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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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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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746회 작성일13-06-21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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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은 누구인가? 또한 그의 아버지 엘가나는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 속해 있었는가? 사무엘의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만큼 이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사무엘은 레위 지파에 속했으며, 산채로 음부에 내려가는데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남은 고라의 후손이었다. 우리는 민수기 16장을 찾아보면 땅이 그 입을 벌려 고라와 그에게 속한 가속(家屬)과 다단과 아비람의 가족을 모두 삼켜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고라의 자녀들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죄에 내려진 그 무서운 심판에서 함께 멸망당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는다. "땅이 그 입을 열어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계가 되게 하였으나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민 26:10,11).

오늘날에 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교훈과 인도를 위해 사무엘과 그의 가족에 대해서 잠깐 동안 생각해보자.
사무엘은 `은혜와 자비'라는 뜻의 한나와 `하나님이 구속하셨다'라는 뜻의 엘가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당신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이 출생했는가? 당신은 하나님이 그 헤아릴 수 없는 값으로 친히 당신을 구속하셨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진정 당신은 그 음부로 내려가는 데서 구원받은 가족이라 할 수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공의(公義)의 심판으로 다루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혀를 서늘하게 할 물 한 방울을 달라고 외칠 신세에 처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목전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된다. 사무엘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모친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둔 지상의 유일한 처소로 가서 괴로워하면서 아이를 얻기를 기도했다(삼상 1장; 렘 7:12). 주님께서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여 아들을 주시자 그녀는 그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여 안식을 얻게 한 땅에서 자기 이름을 두기로 택한 곳이다. 바로 그곳으로 사무엘을 데리고 갔던 것이다.
사무엘은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로 희생제사를 드려 하나님께 드려진바 된 젖을 갓뗀 어린아이였으며 또한 경배자였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 구별된 자로서 구별된 곳에 나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삶을 사는가?
사무엘은 주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실로)에서 주께 헌신되었는데 그곳은 그들에게 거의 잊혀져 있던 곳이었다. 한나는 그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갔을 뿐 아니라 주께로 데리고 갔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그곳으로 데리고 갈 뿐, 바로 주되시는 그분에게는 데리고 가지 않는다.
여기에서 어려움이 일어날 때 그들은 당황하며 말하기를 "모두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고 한다. 사무엘의 모친의 말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녀의 믿음의 놀라운 기도를 들어보자(삼상 2:1∼10). 주께서 친히 그녀의 영혼 앞에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주께서 그녀의 영혼에 충만케 되었다. 다른 누구도 있을 수 없었다. "여호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이와 같이 주 앞에 있는 영혼에게 그 시대나 이 시대의 인간의 그 오만한 자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찬양 받으실 주시여, 당신의 영광으로 비칠 때 모든 것이 사라지리니 모든 인간의 빛과 심지어 모든 창조된 빛도 사라져야 하나이다."
만일 우리가 주께서 어떻게 사람을 살리어 생명을 부여할까 묻는다면, 한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그리고 주께서 친히 데려가시려고 택한 그들은 누구인가?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지금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내신 대로 이 몇 말씀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보라. 온전히 모든 인간의 생각 밖의 것이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지식이 있다는 모든 사람들이 제 아무리 종교적이라 하더라도 타락한 인간성은 한 거대한 거름더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지식있다는 바리새인인 다소의 사울이 이것을 발견한 것은 놀랍다. 그의 모든 지식과 헤아릴 수 없는 우월성을 갖고 율법 아래 흠이 없는 그의 생활을 회고해 보면서 그는 말했다.

"내가…모든 것을…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오, 성직자들이여, 박사들이여, 신학자들이여, 사상가들이여, 당신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그 지저분한 거름더미를 깨끗하게 하려고 하였다! 당신들은 한나와 바울의 그 비결을 깨닫지 못하는가? 그 진리를 알지 못하는가?
한나는 거름더미의 빈핍한 자가 말하거나 행하는 것을 말하지 아니하고 에베소서 2장과 일치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말했다.
참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그분이 그들을 한 곳에서 데리고 나와 다른 곳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바, 거름더미에서 영광의 보좌를 상속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시는데 부족함이 없으시다. 내 영혼은 그분의 풍성하신 은혜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든 나라 중에서 구별하셨다. 또한 그분의 독생자를 그 구별된 나라 자기 백성에게 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랑하는 아들을 영접지 아니하고 그분을 죽였다.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그 반목하는 행위를 아셨고, 소용돌이치는 거름더미 위에 있는 인간을 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영광의 보좌에 계신 영화롭게 되신 아들을 바라보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영광의 보좌에 있는 나의 아들과 함께 상속받을 한 무리를 저 거름더미, 저 지저분한 곳에서 이끌어낼 것이다. 저 거름더미에 있는 가난하고 악하며 누더기를 입은 허물 많은 빈핍한 자들을 이끌어낼 것이다"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름 무더기에서 끌어올려 세워주신 그곳은 변치않는 순결과 영광스런 곳이다! 참으로 흠이 없는 거룩함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있기 위해 끌어올리신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에 대해 잘 표현하였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이 모든 것은 교회 곧 그 신부(新婦) 안에서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경륜이 이루어질 것임을 명심하라.
여러분은 "내 발이 멀리 미끄러져 나가 결국 잃어버린 자로 멸망하게 되지 않을는지, 그리하여 나의 주와 함께 영광의 보좌에 있게 되는 대신에 결국 잃어버리게 되어 지옥 밑바닥에 빠지게 되지 않을는지…" 한나에게 물어보고 싶을지 모른다. 영감받은 한나가 말한 것을 들어보자. "그가 거룩한 자들의(성도) 발을 지키실 것이요." 그렇다. "내가" 아니고 "그가" 성도의 발을 지키실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같이 말한다. "우리는 잃어버려질 수 있다. 그가 성도의 발을 지키시는데 실패할 수도 있다." 아아,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그분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그분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양 가운데 단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자주 일러주셨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7∼29).

이것은 값진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위해 교회를 모으고 계신, 곧 이 은혜시대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은 매우 위험한 교리"라고 말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 변함없으신 사랑 안에 위험이 있을까? 아직도 죄에 빠져있는 성직자를 생각해 보라. 그같은 자가 결국 안전하게 구원받아 영광의 보좌를 상속받게 될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저희는 나를 따르리니…." 거룩하고 참되신 그분을 따르면서 죄에 빠져 살 수 있겠는가? 사무엘의 모친이 어떻게 말하였는가?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끝없는 절망에서 잠잠해야 하는 흑암이란 아주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가 거기에서 이길 힘이 있을까?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바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당신이 성도이며 그분의 거룩한 자들 중의 하나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에게는 당신의 발을 지킬 힘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분의 사랑은 당신을 보존할만큼 능력이 크신 것이다.
사무엘상 1∼3장은 실로의 회복과 같이 성도가 그리스도에게 모이는 진리의 회복에 관하여 뚜렷하게 나타냈다. 한나의 고백은 회복된 그 진리의 순서를 놀랍게 설명해 놓았다. 사무엘상 2:8에서 대적하는 자들에게 내릴 환난이 오기 전에 거름더미의 빈핍한 자들이 영광의 보좌로 끌어올리울 것을 말했고 또한 10절에서 땅 끝까지 심판이 베풀어지고 그후 그 왕의 통치가 있을 것을 말했다.
1. 악한 죄인들을 끌어내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을 끌어내어 영광스러운 교회로 들어가게 한다.
2. 땅에 있는 주의 성도는 모두 절대적인 안전이 보장되었다.
3. 교회가 영광으로 끌어올리운 후에 환난시대가 온다.
4. 산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신다.

한나가 얼마나 깊이 이런 것들에 대해 말했는지, 또는 깨달았는지 우리가 말할 바가 아니다. 이것은 성령이 베드로로 말미암아 말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이 하나님의 경륜과 질서가 그 때까지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그 경륜과 질서가 잘 알려진바 되었다. 회의론자여, 그것이 계시되기 천년도 더 이전에 한나가 예표로써 이 모든 것을 노래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실로에서 부른 이 놀라운 찬송은 하나님의 감동에 대한 논박할 수 없는 증거이다.

더 깊이 공부해 가기 전에 사무엘을 데리고 간 실로에 대한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자. 성경에는 실로라는 낱말에 두가지 뜻이 있다. 창세기 49장 10절에는 실로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사람으로 표현된 여기 실로는 `그의 것이다', `그의 권세다'라는 뜻이다. 틀림없이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셨을 때, 즉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을 때, 그분은 그분에게로 백성을 모으는 권세가 있는 유일한 분이 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나 장차 있을 이스라엘의 모임과 천년왕국 백성들이나, 또 계시록 5장에서 하늘에 있는 보좌의 중심인 그분을 볼 때에 실로는 바로 그분 뿐이다.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분만이 실로이시며 그 이름을 취하시기에 합당하시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잊지 말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리고 두번째 의미의 실로는 한 장소를 말한다. 참 실로이신 주께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처음 그분에게로 모인 자들, 곧 그 모임을 형성하였다(행 2장). 여호수아 18장은 그와 같은 오순절에 관한 한 예표이다. 장소로서의 실로는 "평화로운", "고요함"이라는 뜻으로, 주가 계신 곳, 즉 평화로운 고요함이 있는 곳이다. 이것은 그분이 죽음에서 일어나셨을 때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그에게로 모인 제자들에게 살아나신 실로께서 하신 첫번째 말씀은 무엇이었던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그분은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분은 그 역사를 이루시어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하고 온전한 화평을 만드셨으므로 평강을 선언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신 것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평강을 알려주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실로는 처음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 택하셨던 곳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수 18:1). 바로 오순절을 묘사한 것이다. 신자들이 모두 함께 그분에게로, "그 권세가 있는" 곳으로 모였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모였던 것이 아니고 주께로 모였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높임받은 주도, 그에게로 모이는 실로도 아니다. 그는 사도요 장로였다.

이처럼 초기에는 모두가 실로, 즉 주님 앞에 모였다.
그때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었는데 여호수아는 이에 대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말했다.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려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이처럼 전도자들은 모두 자기의 소유를 향유(享有)하려고 파송되어 나갔다. 그들이 실로에서 보냄받아 나갔다가 돌아와서 실로에서 땅을 분배받았던 것이다(수 18:3∼10).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이와 같이 주께서 그들을 전도자로 보내어 평강과 죄사함을 전파하도록 하였다. 우리가 그분의 귀한 평강을 우리 영혼 깊숙이 누릴 때에만 죄사함의 확신으로 인한 평강의 고요함을 향유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그분의 은총을 충분히 받아드릴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바 현재 향유하고 있는 그 기업 안으로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일에 쓰임받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평화로운 존전에서 보내심 받는 것은 그분이 아버지에게 보내심 받아 우리에게 오신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를 묘사해 놓은 실로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는 것은 큰 축복이다. 교회의 슬픈 역사의 묘사로 예시된 실로의 나중 역사를 알아보자.
사사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삿 2:7∼13). 그러나 그 백성이 악을 행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슬픈 역사가 있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우리는 수백년 동안 하나님께서 처음에 그분의 이름을 두신 곳으로 택한 실로란 말을 듣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사들을 일으키셨다. 비록 그들 중 몇 사람은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돌보시고 건져주셨다. 드보라, 기드온, 입다, 그리고 삼손이 있었으나 그들 중에 누구도 실로를 말하지 아니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울과 그의 세대가 모두 죽은 후에 주님과 그분의 길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났다. 마귀는 변질된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께서 돌아보심으로 여러 사람을 일으키셨으며 그들을 통해서 교회를 그 모든 진리의 상실로 말미암아 당하게 될 온전한 파멸에서 구출하셨다.
교회는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를 참 실로로 알지 못했고 소유하지도 못했다. 아니, 오히려 가증스럽게도 교회의 중심이며 머리인 그분의 자리에 사람을 올려놓았던 것이었다. 그 종교개혁시대 역시 개혁자들 어느 누구도 교회는 그분에게로 모이며 그분의 것이라는 그 오랫동안 잃어버렸었던 교회의 유일한 참된 위치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많은 이교(異敎) 사상에서 빠져나왔으나 그 유일한 참된 중심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그분을 중심으로 두 세 사람이 온전한 평안 가운데 모이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교회와 세상을 혼합시킨 세속적 국가주의나 바벨론 교리를 대부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암흑시대 동안 그 나라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우상숭배가 기독교 집단에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그 암흑의 수세기 동안 그 참 실로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여전히 남겨 두셨던 것이다. 다음 구절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삿 18:31).
기독교 집단의 암흑시대 동안 참 교회 또한 그러하였다. 항상 그들은 그들이 만든 제단과 신상들을 세웠다. 그러나 그동안 그 유일한 참 교회 원리대로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그분 자신에게로, 그리고 그분 자신은 그분과 제사로 언약한 자들을 모으시는 권세가 있는 유일하신 참 실로이신 그리스도이심이 여전히 사실이었다. 틀림없이 알려지지 않은 소수의 사람이 그분의 복된 임재의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누릴 수 있었다. 비록 교회의 참 원리가 기독교 집단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주께서 남은 자들을 보존해 두셨던 것은 너무나 사실이다.
우리가 더 공부해 나가기 전에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참된 예배자들인가? 우리는 실로의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참으로 실로의 그 노래를 불러라! 당신은 교회가 임박한 심판의 정황(情況) 속에 있는 이때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고 하는가? 이는 한나가 실로의 그 노래를 불렀던 때와 똑같다. 그녀는 종달새와 같았다. 당신이 종달새에게 말하리라. "너는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니? 너는 땅 위에 안개가 끼어 있는 것을 보지 않느냐?" 종달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노래하는 뜻인데, 높이 높이 안개 위로 높이 푸른 창공으로 솟아 올라가리." 그처럼 한나는 창공으로 높이 올라 노래 불렀다. 그 성구들에는 기쁨이 넘쳐나 있다. 태양이 종달새의 하늘을 가득 채웠듯이 주께서 친히 한나의 영혼 속에서 충만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녀는 모이는 장소인 실로에서 기뻐하지 아니하고 실로이신 주 안에서 기뻐하였던 것이다. 그 장소를 만드신 이는 그분이시다.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삼상 2:1).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한 성도처럼 한나는 말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시니이다"(삼상 2:2). 우리는 너무나 빨리 이 복스런 자리에서 빠져나가 사람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한나에게는 주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 뛰어나신 분이다. 주님 외에 모든 것을 배제하는 노래였다.

그처럼 실로이신 예수께서 우리 영혼 앞에 계신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 그를 떠날 수 있을까? "주여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그분만이 우리에게 충분하며 그분 외에 누구도 허용할 수 없다는 우리의 행동을 보여주었는가? "여호와는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강한 자와 약한 자가 모두 그분 앞에 알려진다.
실로에 대한 글을 모두 읽어보라. 실로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다. "그는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그 무엇이 실로에서 부른 이 노래보다 더 분명하게 성령의 감동을 증거할 수 있었을까? 한나의 믿음과 노래는 당시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주제에 대한 것이었다. 그림자로 나타났던 그 교회는 그때까지 감취어 있었다(엡 3:9).
이제 어린 아이 사무엘을 생각해 보자. 그의 집은 엘리의 집과 아주 대조가 되는데 음부로 내려가는 곳에서 구원받은 후손이었다. 우리도 그 가족에 속하는가?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주를 기쁘시게 하며 그분 보시기에 합당하게 봉사하려고 성령을 의지하여 주를 섬기는 어린 아이 사무엘 같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지기를 바란다. 그것은 엘리보다 더 나은, 한마디로 오늘날의 직업적인 성직보다 나은 복된 천직이다. 우리는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 모든 참된 봉사를 주께 드리자. 참으로 우리는 영문 밖에 있다고 하면서 거짓 가르침과 연합하기를 허용한 자들이나, 또는 마지막 때의 모든 악을 행하는 영문 안에 있는 자들보다 나은 것이다. 그 어린 아이의 길은 매우 단순하다. 그 책임은 우리가 곧 깨닫게 될 것으로써 오늘날의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만일 이것이 당신과 나의 경우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수천명의 큰 집단에 속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홍수 이전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수천의 에녹이 있었다고 읽지 못했다. 주의 말씀은 당신에게 희귀하게 되었는가? 복된 말씀이 공격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당신에게 희귀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밤이 이르러 심한 어둠이 땅 위에 엄습했다. 그리하여 불신(不信)의 어두움을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다. 교회의 큰 빛인양 생각하는 자들은 스스로 어두움에 있는 자들이다. 늙은 엘리는 바로 그들을 나타낸다. 그는 자기 처소에 누워 있었는데 그의 눈은 점점 어두어 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상태가 아닌가? 우리 눈은 어두워 볼 수 없지는 않은가? 주께서 말씀하시나 우리는 듣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은 실로 엄숙한 순간이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었더니"(삼상 3:3). 오늘 이 순간도 그와 같은 때가 아닌가? 기독교계는, 사랑하며 받아들여야 할 그 진리를 거절하고 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여전히 머무르시며 영원히 빛을 비추실까? 자기들을 피로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있는 불신의 교계의 무리와, 그리고 그들을 좋아하는 기독교계의 종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바울은 말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1,12).
또한 베드로후서 2:1∼3까지 성령께서 증거하신 바를 읽어보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그때 엘리는 들을 귀를 가지지 못했었다. 지금도 엘리들은 여전히 들을 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참으로 주께서 엘리에게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3:7). 우리는 엘리의 아들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젖을 갓 뗀 어린 아이 사무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구주로 알 뿐만 아니라 오래지 않아 그분을 주로, 곧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주로서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우리는 그분과의 친밀성, 즉 실제적인 교통을 가지는 것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의 정해진 절차가 성령의 인도를 배제하는 곳에서는 그것이 기대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에게 모였다는 곳에서도 어린 아이 사무엘과 늙은 엘리의 이 교훈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께서 그 어린 아이에게 말씀하셨듯이 당신에게도 말씀하셨는가?
엘리의 집에 내릴 무서운 심판이 그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알려졌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 3:11,13).
더 나아가 가장 준엄한 다음 말씀을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3:14). 사람들에게 그처럼 경히 여김을 받고 있지만 이 원리를 어긴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보다 더 심한 것은 있을 수 없다. 당신이 비록 개인적으로는 그 악에서 벗어났지만 그 악을 행하는 자들과 연합하거나, 그 거짓 가르침을 주장하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하게 스스로 그 악의 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이 말씀들을 경히 여겨서는 안된다. 엘리의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많은 사람에 의해서 수호되어온 중요한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일 때문에 실로에는 심판이 내렸던 것이다.
그 어린 아이 사무엘은 엘리에게 모든 것을 소상히 알렸을 것은 틀림없다.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아무리 이야기하기 어려울지라도 진리는 온전히 알려져야 한다. 이것이 엘리의 잘못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라.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시니라"(3:18).

"사무엘이 자라매"라는 말씀이 반복된다. 특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와 반대 현상도 보게 된다. 마음에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라지 않는다. 거룩한 진리로서 영적 전진이 없는 것이다. 많은 열심과 행함이 있으나 주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시인한 또 하나의 다른 표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모든 사람이 주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록 어리고 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종들을 쓰시어 멀리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말이 들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빌라델비아 교회에 말씀하신 계시록 3장과 대조해 보면 그 이상 더 잘 부합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찬송받으실 주께서 친히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무엘에게도 꼭 이와 같이 참 실로이신 주께서 실로에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오늘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참으로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볼 때까지 그분은 우리에게 속삭일 것이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참으로 찬송 받으실 주께서는 이 마지막 날의 소용돌이치는 가운데서 그 유일한 안전의 평화로운 도피처이시다. 주께서는 아직도 두 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가운데서 자기를 나타내신다. 이것은 주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표인 것이다.
우리가 이 글을 끝맺기 전에 생각해보아야 할 논제가 하나 있다. 우리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아 음부로 내려가는데서 살아남은 고라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사무엘의 간단한 족보는 이같이 기록되어 있다.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숨의 현손이더라"(삼상 1:1). 이것을 역대상 6:22∼28까지에 대조해보면 그 족보는 고라에서 여로함의 아들 엘가나까지 그리고 사무엘과 그의 아들들 바스니(요엘)와 아비야까지 내려간다. 사무엘의 역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가 빛을 내고 있다.
사무엘상 8:1∼3을 읽어보자.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인간은 이렇다.
역대기에서 우리는 이 장면을 지나서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 "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 아들들이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저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 사무엘은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이 족보는 고라에게까지 미친다. 여호와를 찬송하는 인도자로 귀한 특권을 받았던 헤만은 사무엘의 손자였다.

더 나아가서 역대상 25장에서 우리는 헤만과 그의 형제들에 관한 것을 읽게 되는데 다윗은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이 복된 봉사를 특별히 구별해 놓았던 것이다. 아삽, 헤만, 여두둔, 그들은 수금을 가지고 예언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렸다.
그리고 우리는 사무엘의 증손의 이름들을 다시 읽게 된다. "하나님이 헤만에게 열네 아들과 세 딸을 주셨더라"(25:5). "이들이 다 그 아비의 수하에 속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서 노래하며 섬겼으며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수하에 속하였으니…"(25:6).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288명이나 되었다(25:7). 사무엘의 증손, 헤만의 아들들은 16명인데 그들이 각기 12명의 아들들을 가졌음으로 모두 192명이 된다. 여호와의 찬양하는 가장 귀한 가족 288명 가운데 192명이 사무엘의 자손 곧 고라의 자손인바 음부로 내려가는 데서 구원받은 가족인 것이다(민 16장, 26:9∼11).
한나(은혜와 자비)와 엘가나(하나님께서 구속하셨다)의 아들 사무엘의 역사는 그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값없이 주시는 은혜요 오묘한 자비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그 구속의 복된 표상이다. 이것은 빈약한 개요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너무나 충분하다.
음부에 내려가는 데서 구원받은 고라의 자손에서 태어난 아이였던 사무엘의 가족 가운데서 지은 시편들에서 누구도 그 특유한 흐뭇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시편 44,45,46,47편에서 황홀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모두가 사무엘의 자손들의 노래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읽을 때 음부로 내려가는 데서 구원받은 자들의 기쁨을 나타낸 것을 느끼며, 그 노래들은 그 음부로 산채로 내려가는데서 구원받은 자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우리 마음에 일러줄 것이다.

우리는 고라의 자손과 같다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는 실재로 음부에 내려가는 데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당신과 나는 그분의 은혜가 없었다면 그곳에 갔었을 것이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에 들어간 후에 거룩한 노래로 섬기는 그 노래 인도자들인 사무엘의 자손들이 노래를 불렀다. 교회가 곧 그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귀한 왕국에서 보좌 둘레에 앉게 될 것이다. 사울의 시대가 반드시 그 종말이 왔듯이 악한 자, 범죄한 인간의 시대도 종말이 오고야 말 것이다. 다윗 왕국이 지나가고 솔로몬 왕국이 세워졌듯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거룩하신 분의 왕국이 세워지고야 말 것이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6∼9).

다윗보다 크시고 솔로몬 보다 크신 이가 그 보좌에 앉게 될 것이다. 오직 합당하신 분이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이 세상에서 수욕을 당하셨고 그분을 섬긴다고 가장하는 자들에게 이용당하고 계신다. 그 다락방에는 주님을 배반한 유다가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오늘날은 수많은 유다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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