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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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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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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139회 작성일13-06-21 02:20

본문

성령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수르, 신, 르비딤 광야의 교훈을 살펴보기로 하자(출 15∼17장). 우리는 이것들이 분명하고도 엄숙한 귀한 교훈들을 제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수르 광야의 교훈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이 말씀은 비록 짧지만 매우 깊은 뜻이 있다. 죽음과 구원의 장소인 홍해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른지 사흘만에 그들은 물을 얻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십자가의 귀한 값을 헤아려 보았는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의 견지에서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처럼 가치없고 시시하게 보이는 것은 없을 것이다. 세상이 사도 바울에게 그러했고 사도 바울 또한 세상에 대해 그러했다.
사흘 길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살리심을 받은 성도가 들어가게 될 상태를 아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죽음에서 부활에 이른 그 사흘 길은 당신을 애굽, 즉 세상에서 영원히 갈라놓았다. 그러나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구속받은 자들이 물을 얻지 못하여 그렇게도 빨리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당신에게 매우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이것이 구속받은 자들에게 찾아오는 첫번째 교훈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고 죄사함을 받았다면, 광야의 여행길에서 물을 얻지 못한다고 하여 놀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당신이 구속받았다는 확실한 증거임을 나는 믿는다. 당신은 이러한 증거를 당신 안에서 찾을 수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세상 쾌락을 마시며 만족하고 있는가? 만일 당신이 후자에 속하였다면, 당신은 아직도 애굽에 있는 것이며 사단의 쇠사슬에 매여서 그가 끄는대로 끌려다니는 노예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오인으로 인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한때 그들을 그렇게 기쁘게 했던 것들이 이제는 더이상 만족을 주지 못한다. 수르 광야에서 "물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중대한 교훈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17).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당신은 세상으로부터 물을 얻으려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불평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수르 광야에서 있었던 두번째 사건도 역시 주목할 만한 귀중한 교훈이 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이것은 물을 얻지 못해서 애쓰는 것보다 더한 시련이었다. 이것은 어린 신자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며 장성한 신자에게도 일어난다. 우리는 어떤 일이 우리를 만족하게 해주리라고 그것을 꽉 붙잡지만 막상 손에 잡히는 것은 쓰디 쓴 실망뿐이다. 당신은 그것을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이 세상의 쾌락이나 부(富)나 명예를 얻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쓰디쓴 실망만 가슴에 안아본 경험은 없는가?
호화로운 파티에 초대되어 세속적인 사람들과 어울려 보지만 새 성품에 거슬리는 쓰디쓴 공허만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온 적은 없는가?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얻는다 해도 공허할 뿐이다. 그렇다. 과거에는 그 모든 것이 당신에게 만족을 주었기에 지금도 여전히 만족을 주리라고 기대했던 것들이 이제는 당신에게 쓰라림과 공허를 줄 뿐이다. 그렇다고 불평하지 말라. 이 세상은 우리를 만족시킬만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없는 광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한 나무가 있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아 2:3). 물론 그 나무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그늘에 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이생의 쓴 잔을 달게 할 수는 없다. 갓 태어난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맛은 얼마나 달콤한가!
수르 광야의 두번째 교훈도 매우 단순명료하다. 당신은 영적으로 어린 성도로서 인생이 쓰디쓴 물과 같은 것을 깨달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와 그분의 발 아래 앉아서 그분이 주시는 달콤함을 맛보라. 그분의 말씀은 송이꿀보다 더 달다.
이 세상 것들은 쓰디쓰지 않던가? 그리스도는 모든 나무가 열매없이 황량하게 서 있는 광야에서 당신에게 달콤한 열매를 가득 주시는 하나의 귀한 나무이시다.
그러면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그분의 훈계에 귀를 기울이라. 이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의 일임을 기억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이 모두 이루어 놓으신 그 구속에 대해서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신자라면 당신의 구속은 모두 이루어졌다. 당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축복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의 음성을 열심히 귀담아 듣는데 달려있는 것이다. 그분은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반석이시며 그분의 그늘은 온전히 보장된 곳이다. 그러므로 그분 발아래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열심히 귀담아 들으라! 그분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 율법 아래 있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한 아들로서 영으로 충만하여 거룩한 사랑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엘림은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 그 광야에서는 흐뭇한 녹색(綠色)지대였다.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것은 예수님에 관한 한 면을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써 그분을 중심으로 열두 사도와 칠십 제자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어느 모로 보든지 그분은 목마른 자가 와서 마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우리로 항상 생수의 샘 가까이 장막을 치게 하소서.



신 광야(출 16장)

행로의 발자욱마다 인간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나타나 있다. 신 광야에 이르자 온 회중이 원망하며 말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구나."
이것은 매우 악한 것이었다. 신자에게 엄습해오는 불신의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자, 이 불평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대하셨나 알아보자.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출 16:4). 참으로 놀라운 은혜이다.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날마다 `하늘양식'으로 먹이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 떡을 먹는 사건과 관련하여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 선포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안식을 함께 누렸다는 점이다. 이 안식은 율법 이전에 주어졌다. 이것은 처음 주어진 특권으로 계명이나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제 칠일에 안식했는데 이같은 기록이 지금까지 이곳 외에는 없다. 여기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아담 타락 이후로 모세까지 바로 이 장(章)까지 2,500여년간 성령께서 안식일 또는 그 어원(語源)이 될만한 어떤 형태의 말도 전혀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신 광야에서 있었던 사건은 온전한 은혜로써 그분의 구속된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혜의 원리에 따라,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 그들은 제 칠일에 안식했다. 그들이 율법 아래 있게 되었을 때는 성령께서 그 말씀을 절대로 되풀이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안식일에 쉬었다"고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구속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준 것을 잊지 말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이처럼 그들은 구속받았음으로 안식을 가졌으며 그들은 하늘의 만나를 모아 놓았으므로 쉬고 즐거워 하였다. 이것은 순전한 은혜의 원리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떡!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떡을 먹도록 독자들에게 깨달음을 주시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허물 많은 죄인에게 주시는 안식의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 그분은 그 귀한 어린양을 보시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4:25, 5:1).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이것이 평강을 준다. 이 평강은 순전히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안식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듯이 이 평강, 유일한 이 안식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모든 신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렇게 말하리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는 그 안식에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가?" 그 물음에 대해서 이 광야의 교훈은 하나의 진지한 해답이다. 만나는 생명의 떡인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애굽에서 구속받은 자는 그것을 먹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날마다 일정한 양(量)을 거두었던 것이다.

당신은 날마다 그 달콤한 만나인 그리스도, 즉 그분의 말씀을 거두어 들이고 있는가? 당신이 일용할 양식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면, 당신의 건강이 나빠졌다고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그 귀한 말씀에서 생명의 떡을 거두어 들일 시간이 없다면, 당신의 영혼이 쇠약해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 이 주제에 관한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읽어보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이처럼 당신은 당신의 매일의 양식을 위해 그분께로 나아가겠는가?

히브리 사람은 각 사람의 식량대로 각각 한 오멜의 만나를 거두었다. 가장 많이 먹는 자도 부족함이 없었고 가장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었다. 어린양에 대해서도 만나와 마찬가지로 각 사람의 식량대로 거두어야 한다. 우리 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충족되는 것이다. 주일의 첫째 날 모여서 그분의 깨어진 몸을 나타내는 떡을 떼고, 그분의 흘리신 피를 나타내는 잔을 들어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은 틀림없는 큰 축복이다. 그러나 영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영혼에게 필요한 매일의 양식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6:3∼71을 읽어보라.

이 신령한 묘사는 매우 알기 쉽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떡을 내려주셨다. 그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거두어 들였다.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그 식량대로 거두었고",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오, 티없이 귀하신 그리스도, 그분은 세상이 보기에 그같이 작아서 멸시받았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침에 그 만나를 거둘 때에 성령께서 그 복된 말씀으로 우리 영혼에 예수님을 계시하는 것 같이, 이른 새벽의 이슬이 얼마나 신선함을 주었을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넉넉히 주셨기에 쉴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쉼을 주셨는가? 당신은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가? 안식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충분한 만나를 거두어 들이지 않은 까닭이다. 더욱 더 말씀을 읽고 더욱 더 그리스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외쳤듯이 당신도 그렇게 외치리라.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당신의 양식,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는 그들에게 두 배의 식량을 주셨으므로 그들은 안식할 수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선물로 말미암아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켰다. 그들은 명령이 아닌 은사로 말미암아 쉬게 되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행위가 아닌 은혜로 말미암아 쉬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믿지 아니하고 만나를 얻으러 나갔으나 얻지 못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사로부터 떠나 방황하게 될 때는 언제든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안식을 가지는 것과 안식하는 것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화평을 가지는 것과 그 평화를 누리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당신은 하나님 안에서 그 흐뭇한 안식을 누리려는가? 그러면 그리스도로 양육받도록 그 만나를 거두어 들이라.
당신은 안식을 원하는가? 당신에게 인치신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만나의 맛은 꿀을 섞어 만든 과자와 같았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무엇이 그리스도와의 그 영적 교제보다 더욱 달콤하게 하는 것이 있을까?



르비딤 광야

르비딤 광야 역시 물이 없었다. 아아, 육신은 이것을 견디기가 얼마나 힘든가! 발자욱마다 물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이 광야의 행로이다. 귀하신 우리 주의 행로를 생각해 보고 그분의 종 바울이 이르는 성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행 20장). 순례자들이여, 우리가 주께 참되면 참될수록 더욱더 어려운 것이 우리의 행로인 것이다.
아직 그 백성이 율법 아래 있기 전이므로 주께서 온전하신 은혜로 그들의 심한 불평을 충족시키셨다. 호렙산 반석을 쳐서 모든 백성이 마시도록 물이 나오게 하였다. 모세는 그곳 이름을 맛사(다툼과 시험)라고 불렀다. 어린 순례자여, 당신의 마음에 불평이 일어나려고 할 때, 이 행로를 단념하고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사단이 속삭일 때, 물통의 물이 말랐을 때, 당신이 시험과 다툼 속에 잠기려 할 때, 당신의 생각이 혼동되었을 때, 아아, 사단이 조금도 당신을 놓아주려고 하지 않을 때, 만사가 당신에게 원수같이 보일 때, 그 때에는 당신을 위하여 내리침을 당한 그 반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참으로 그같은 때에 예수님께로 눈을 돌리라. 우리가 당한 슬픔이 그분의 슬픔과 같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그분의 사랑하는 것과 같은가? 당신은 당신의 마음에 악한 불신의 생각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놀랠 것이다.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이것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기 이전, 은혜 아래 남아 있을 때 일어난 처음이자 단 한번의 싸움이므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우리로서는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 나는 르비딤에서의 싸움을 악령들에게 대한 우리의 투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싸운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르비딤에서 일어났던 싸움은 육정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닥치는 유혹을 묘사한 것으로 본다. 그것은 그들이 말한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의심하는 순간 일어난 것이다.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 의심하는 것보다 더 원수를 강하게 하는 것은 없으며, 또한 그가 우리와 같이 하는가, 아니 하는가 의심하는 것보다 더 원수에게 힘을 주는 것은 없다.
어린 그리스도인이여, 르비딤의 이 싸움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당신은 비록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만나인 그리스도로 기꺼이 양육받을지라도, 당신의 옛 성품인 정욕은 여전히 악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그냥 머물러 있었더라면 이 아말렉과의 싸움은 없었을 것이다. 당신이 새 성품을 가지지 않았다면 당신은 이 옛 성품과 불뿜는 갈등이 있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그분이 원치 않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도 원치 않으신다.
르비딤을 지날 때에 일어나는 몇 가지 유혹을 어린 순례자는 경계해야 한다. 특별히 "죄 없는 온전함"이라는 길로 연결된 넓은 곳을 조심하라. 이 길은 불신으로 인도한다. 어떤이는 당신의 옛 성품이 변했으며 당신의 육신에는 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그럴듯한 미혹이며 잠시 동안 당신을 헛된 보장으로 잠재울 것이다. 그러나 아말렉이 이르러 싸울 때(나는 가끔 사단이 이같은 미혹된 자와 싸워야 할 것을 더 잘 알줄 생각하지만), 사단이 강한 유혹을 가지고 나타날 때 당신 속에는 아직도 그 악한 본성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당신은 뜻밖에도 강한 유혹으로 전복되는 것 같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 유혹에 실패한다면, 그때에는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그 원수의 치명적인 공격이 있을 것이다. 이 어두운 불신이 당신의 영혼을 점령했다면 당신의 싸울 힘은 어디에 있는가?
르비딤의 싸움, 그리스도의 젊은 병사들을 위한 금과 같은 교훈이 담겨있는 출애굽기 17:8∼16을 주의깊게 읽어보라. 어떤 교사들은, 시험받을 때 가장 안전한 방법은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 중요한 가르침에 있어서 이처럼 하나님의 가르침과 사람의 가르침이 상반되는 것은 없다. 사람은 말한다. "당신은 삶의 규례인 그 율법 아래서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지 아니하면 죄가 반드시 당신을 주관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것(율법)은 죽게 하는 직분이며 이제는 도말되었느니라"(고후 3:7∼14 참조).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어린 순례자들이여, 당신이 사람의 가르침을 좇는다면 율법 아래 종의 멍에를 지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하나님의 가르침과 사람의 가르침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면 문제는 르비딤을 통과할 때, 즉 불같은 시험, 무서운 죄들을 범하도록 시험할 때, 그 율법이 나를 도와주지 못하고 오히려 로마서 7:7∼15에 기록된 바와 같이 더욱 정욕을 자극시키는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면 육신의 정욕을 이기는 원리는 무엇인가?
곤경에 처한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귀한 해답을 제시해 주는 그 아말렉과의 싸움을 바라보라.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참호를 판다든가 또는 전술(戰術)을 과시하지 않았다. 모세는 말했다.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모세와 아론과 홀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은 손을 하늘을 향해 높이 들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라." 승리하는 믿음의 거룩한 원리를 보라. 이것이 이스라엘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의 원리 아래 있을 때 싸운 유일한 싸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특별히 값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지금까지 걸어온 광야의 행로를 회고해 보고 당신의 생활에도 과연 그런 광경이 있었는가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거저 당신의 손을 하나님께 들고, 다만 믿음으로 그분을 의지하였을 때 승리하였을 것이고 반면에 당신의 손을 내리고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였을 때에는 죄가 승리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믿음의 원리가 시험에서 승리하는 능력있는 수단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가 결심을 하면 꼭 실패하지만 하나님만 바라보면 승리한다. 시험당할 때 르비딤의 싸움을 기억하라. 당신의 마음을 열어 믿음의 외침이 하나님께 상달되게 하라. 아마 당신은 "내 마음은 너무나 무겁다"고 말하리라. 그처럼 모세의 팔은 피곤하였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홀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이 구절에는 시련 속에 있는 신자들을 계속 붙들어 주는 진리가 담겨 있다. 시련의 때에 당신을 지탱해 주는 큰 돌, 만세 반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어떠한 시험이 닥쳐도 당신의 발은 절대로 동요되지 않는 반석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저 변하기 쉬운 모래들, 즉 오늘은 반석 위에 서 있다가 내일은 넘어져 잃어버려지는 불신의 생각들을 조심하라. 이 극심한 시험의 때에 그 거짓 교리보다 더 하나님의 자녀들을 약하게 하는 것은 없다.

독자여, 당신이 구속받았다면 그것은 영원한 구속이요, 당신이 생명을 가졌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당신이 반석 위에 섰다면 아무도 당신을 영원히 거기서 빼앗아 갈 수 없다.

더우기 모세의 피곤한 팔을 들고 있게 하기 위해서 아론과 홀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그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의로움이 되시고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자가 되신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하나님의 힘이 시험의 때를 만난 우리를 이중으로 붙들고 계신다. 하나님의 높임받는 그 아드님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간구하시면서 믿음의 손을 붙들고 계시며, 다른 한편으로 여기 땅에서는 성령께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그러나 비참하게도 내어던짐 받을 수 있으며, 아말렉에게 기습당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그 정욕과 시험이 다 소멸된 줄 생각하며 햇빛 비취는 밝은 면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당신의 눈을 항상 예수님에게만 고정시킨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결심한 후 모든 것이 순조로울 수 있지만, 원수의 갑작스러운 공격은 당신을 심히도 놀라게 해서 당신의 손을 늘어뜨리게 하고 아말렉, 즉 당신의 육신 속에 잠복해 있는 죄들이 승리할 것이다. 당신은 사단의 선제 공격에 실패한 일이 있는가? 당신은 아마 "나는 그렇게 될 줄 전혀 예기치 못했는데 회개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를 범해왔으므로 지금 퍽 우울하다"고 말할 것이다. 대낮의 밝음이 한밤중과 같이 캄캄하게 된 것 같을 것이다. 사단은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그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야. 하늘에 가버린 그 대제사장은 지금 너를 위해 간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성령이 너를 위해 지금 간구하고 있지 않아."

의심에 빠진 불쌍한 자여, 원수의 말을 듣지 말라! 만세 반석이 당신을 위해 열려있지 않는가? 그분의 보혈은 당신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에 충분하며 또한 그 죄를 모두 씻어버린게 아닌가? 사도 요한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 문제에 대해서 이같이 쓴 것을 보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요일 2:1,2)

당신은 과연 그분의 자녀인가? 그런데도 죄를 범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아버지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생각해 보라. 우리의 대언자인 그분을 바라보며 당신을 위한 그분의 간구하심을 들어보라. 그분이 자신의 피를 가지고 간구하시는 이 말씀은 당신에게 얼마나 합당한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이것은 확실히 당신으로 죄를 범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치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죄를 범하면 하늘에 계신 당신의 대언자를 앎으로 믿음의 팔을 다시 들라. 비록 전에 아말렉에게 패했을지라도, 이제는 도리어 그를 이기게 되리라.
그런데 당신은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죄를 범했다면 결과적으로 성령을 근심케 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성령이 나를 떠나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령께서는 예수의 피의 댓가로서 당신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히 10장, 엡 1장). 그러므로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떠나신다면 이는 예수님의 피의 가치가 소멸된 것을 뜻하는 것이다. 당신은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를 인치신 성령님을 너무 자주 슬프게 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가장 큰 진리 중 하나가 이 중대한 사실임을 깨달았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그 뜻을 말했다(고전 3:16,17). 시험이 몰아칠 때 이것을 생각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6:15∼20에서도 이것을 매우 중대하게 강조한 것을 생각해 보라.

이 모든 것을 주의해 성경을 잘 살펴보고 이것들이 사실임을 확인해 보라. 우리는 경계해야 할 힘센 원수가 있으며,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얽매려는 시험에 둘려싸여 있으며, 더욱 우리는 아직도 값을 지불해야 할 치명적이고 가증스러운 정욕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비록 작은 시험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가 서 있는 이 반석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되며, 또 부활하신 주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우리의 대언자로 계시다는 것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기를 결코 쉬지 않으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과 아말렉 사이에는 결코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당신과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신의 정욕 간에도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당신이 비록 아말렉에게 패하여 범죄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당신을 위해 아버지께 간구하는 대언자를 보여주실 것이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실패한 죄를 아버지께 고백하면 그분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당신의 모든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당신을 깨끗케 하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죄가 당신을 이겼을지라도 아버지께 고백하는 것을 잊지 말라. 이후로는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승리하는 믿음을 주시기를 바란다.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처럼 르비딤의 싸움은 죄와 세상을 이기는 복된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만일 독자가 율법의 원리에 따라 싸우면 패할 것이나 믿음의 원리에 따라 싸우면 승리할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을 의지하려고 당신의 팔을 내리우든지, 아니면 주님을 의지하려고 팔을 드는데 따라 패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한다.
이 행로의 많은 부문을 더듬어 본 독자의 심령과 양심에 호소하는 바는 하나님만 바라보면 우리에게 승리가 있지만, 우리가 최선을 다하려고 결심한다면 실패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들의 짧은 생애를 하나님께 거룩하고 복된 헌신으로 드리지 않으려는가? 육신은 도저히 확신할 수 없다. 결코 그것을 신뢰하지 말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어디에서든지! 당신이 성령의 전인 것과 그분이 당신을 위해 간구하시는 것과 살아계신 대제사장이 당신의 대언자이신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편이시다. 비록 그분이 징계하실지라도 이는 당신을 사랑하시는 까닭이다. 우리는 한순간도 시험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과 그분을 의지하며 지내는 것을 잊지 말라. 만나와 안식이 있은 후에 곧 시험과 아말렉이 이르렀다. 풍성한 축복의 때에, 하늘 만나인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할 때, 우리는 위험에 더욱 가까이 있는 것이다. 풍성과 안식이 너무도 갑자기 가혹한 불의 시험으로 변하였다. 오, 경계하며 기도하고 의지하고 있으라.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유 24,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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