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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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957회 작성일13-06-21 02:21본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논하는 것과,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 교리를 변호하는 구절들을 찾아내어 논하는 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 생각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관심있는 문제들 중에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 주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는 사복음서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신 말씀을, 그리고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신 말씀을 살펴보자.
사복음서를 살펴보기 전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가브리엘의 말을 살펴보자.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 놀라운 구절에 있는 "…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처럼 문자 그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태어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다. 또한 하나님은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이제 사복음서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자. 먼저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일곱가지 비유를 소개하려고 한다.
첫번째는 씨뿌리는 비유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된 나라를 세우시기 전에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뿌리는 시대, 또는 전파하는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 네 부류 중 한 부류만이 구원받아 열매를 맺었다. "더러는 흙이 없는 돌 밭에 떨어지고",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다."
당신은 멸망하는 이 어느 하나에 속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 세상 헛된 염려와 부(富)를 조심하라.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으리라. "주 예수님은 이런 상태가 계속될 것을 가르치셨는가? 아니면 점차로 모든 사람이 말씀을 받게 되어 모두 구원받게 될 것을 가르치셨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번째 비유가 해답을 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의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그런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예수님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이 비유를 통해 온 세상이 개혁된다는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반대라는 것과, 또한 네 곳에 뿌려진 씨 가운데 오직 한 곳만 온전히 열매 맺었다는 것과, 악한 자와 의로운 자가 이 세상 끝까지 함께 자라가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악한 자는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세번째 겨자씨 비유는 교회가 크게 되었을 때 첫번째에 씨를 주어먹던 그 악한 자들이 그 나무가지에 와서 깃든다는 것이다.
네번째는 가루 속에 넣은 누룩 비유이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리라." 이 비유는 더 할 나위없이 비참하게 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교회가 너무나 세속화하여 이른바 기독교 집단은 온통 이 여자의 악한 누룩이 눈에 띠지 않게 역사해서 부풀어 오른 것이다. 성경에서 누룩은 항상 악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리새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 등이 있다.
다섯번째, 여섯번째, 그리고 일곱번째 비유들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밭 전부가 아닌 그 안에 있는 보화, 온 세상이 아닌 하나의 진주, 즉 하나님의 교회를 세상에서 데려가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그 큰 그물에 걸린 고기 중에 좋은 것과 못된 것이 있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마태복음 24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적은 무리 유대인 제자들에게 하신 알기 쉬운 가르침을 보게 된다. 이제까지 말씀해온 일곱가지 비유와 같은 주제이지만 비유가 아니고 다만 알기쉽게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 서두 몇 절에는 예수께서 유대 성전의 무너짐을 예언하셨는데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장차 그분의 왕국을 다스리러 오실 때 그분의 발이 설 곳인 감람산에 앉으셨다. 그때 제자들이 와서 조용히 물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사오리이까" 24:4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거기에는 단 한마디도 세상이 개선된다는 언급이 없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거짓 그리스도, 즉 미혹케 하는 자들, 난리와 난리의 소문, 기근, 온역, 지진, 핍박, 재난, 죽음, 죄악의 관영,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랑이 식어지고, 그 후에 끝이 오리라고 하셨다. 이 예언의 말씀 중에 많은 부분이 성취되었고, 아직도 성취되어져야 할 부분이 많다.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은 그분의 유대인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며 그리고 그 나라에 일어날 것에 대하여 특별히 지시한 바라는 것을 잊지 말라. 15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이것은 분명히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니엘 12:11∼13을 읽고 또 9:27과 대조해 보면 로마제국의 머리의 무서운 행동을 보게 되는데, 그 이레(一週)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며 그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설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의 증거를 믿는 경건한 유대 사람에게 매우 귀중한 말씀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순간 피하라는 신호로 알아야 한다. 그때에 그들은 그들의 옷을 가지러 집에 들어갈 시간 조차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창세로부터 그 때까지 없었고 그 후에도 없을 큰 환란이 일어난다.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유대인)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이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1,2).
분명히 멸망의 가증한 것을 거룩한 곳에 서는 것과 환란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께서 이것이 환난 직후에 일어날 것이라고 증거하셨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가장 확실한 것은 그 때에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께서 오시는 모습을 보고 통곡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이것이 바로 눈 앞에 있으니 매우 주목할 만하다. 비록 아직도 유대인이 이방에 흩어져 있을지라도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너무나 진지한 배려(配慮)이다. 이 세상은 여전히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있다.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때에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가장 엄숙한 경고가 내려져 있다.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한 종의 운명은 매우 두려울 것이다. 그도 역시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으나 그의 운명은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律)에 처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은 이와 같이 엄숙하다. 오 독자여, "내가 준비되어 주를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엄숙한 자문(自問)으로 일깨움 받으시기를 바란다.
마태복음 25장 전체가 역시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 열 처녀의 비유가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는 바대로 그분이 오실 때 모두가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에게 속하였다고 자처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못들어 간다. 졸며 잠들어 있는 자, 오, 믿는다고 자처하는 자여, 당신이 만일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말씀을 듣게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늘에 가 계시는 동안 그 시기에 관한 또 하나의 다른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종들 모두가 받은 달란트를 활용한 것이 아니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주께서 오실 때 그 살아있는 백성에 대한 심판이 매우 분명하게 말씀되어 있다. 당신이 유심히 읽어보면 여기에는 죽은 자의 심판이 없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반역한 그 슬픔의 밤에 그분이 대제사장 앞에 서셨을 때에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아, 인간은 항상 그분의 증거를 거절한다. 그 대제사장은 그것이 참람된 말이라고 하며, 그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였다(마 26:64,65 참조).
이제 마가복음 13장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그 엄숙한 경고의 말씀이 반복되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깨어 있어야 할 자는 문지기 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언제인지 모르므로 모두가 깨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주의 오심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생전에는 오시지 않을 테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주의 오심이 매우 가까움에는 틀림이 없다. 그분이 출타해 있는 이 밤(현시대)은 말씀하신 대로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저물 때", "밤중", "닭 울때" "새벽"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이 시대의 저녁에 해당하는 때는 이미 지났고, 밤중인 소위 암흑의 중세기도 지났고, 개혁을 일깨운 닭 울음도 지났다. 아, 새벽의 동이 터온다. 깨어 있으라! 날이 곧 밝아온다! 깨어서 준비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런데 아마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예수님이 복음의 전파로 말미암아 세상이 개선되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셨다면 이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친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누가복음을 주의깊이 읽어보고 거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을 들어보자(눅 12:35∼48). 여기에는 두 부류의 종들이 나온다. 인자가 오실 때 깨어있는 종들은 매우 복되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이르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는 악한 종, 특별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게" 된다고 했는데, 이 종은 매우 귀한 은총을 받은 유대 백성을 말한다. 어떤 나라가 그 나라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알았는가? 하나님의 진노의 추수 심판은 그 때에 그 은총받은 나라에 쏟아질 것이다. 그 나라의 운명은 주의 뜻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교의 나라보다 더욱 처참할 것이다. 확실히 이 경고의 말씀은 경히 여길 바가 아니다. 이 심판은 매우 가까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누가복음 17:24∼37을 보면 주께서 거절받으실 것을 아주 결정적으로 말씀하셨다. 이 거절받으심이 바로 인자의 오시기까지 계속된다. 그분을 거절함이 마치 노아와 롯의 때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세상이 개선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거리가 먼 생각이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누가복음 19:11∼27에 기록된 먼 나라에 간 어떤 귀인에 관한 비유에는 많은 백성이 그분을 미워할 것이라는 예언이 되풀이 되었고, 또 그들이 그분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그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그분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21장은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듣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날 줄 고대했던 백성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주께서는 많은 고난과 핍박의 시대가 있을 것을 알려주셨다. 이는 그들의 생각과 아주 달랐다. 그들은 모든 이방을 다스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20절에 있는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 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라는 말씀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빠져 있다. 그 백성들이 기대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마 하나님께서 이 성을 온 땅의 도성이 되게 하리라(사 2:1∼4)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안전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이미 이루어졌다.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을 때 그 유대인 제자들은 산으로 도망쳤다.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 나라가 땅 위에 임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같이 말하리라. "그같은 멸망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될 것임이니라'(사 11:9)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왕국 시대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한 시대가 오기 전에 있을 것에 대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자. 형벌의 날들이 유대에 임하여 그 나라에는 큰 재난이 있겠고 그 백성에게 진노가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21:20∼24까지에 있는 예언은 그 나라의 역사를 짧게 요약한 것으로서 우리 눈 앞에서 이미 다 이루어졌다. 저희는(유대인) 칼날에 죽임을 당하고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갔고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밟혔다. 18세기 동안 이상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당시에는 그분의 제자들 조차도 이것을 깨닫거나 믿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하고 물어본 것을 보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 오래 전에 이미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하시지 않으셨는가? 분명히 주께서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세상이 그때에 개선된다는 말인가?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된 대로 "큰 환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다. "민족들이… 곤난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니…",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러면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에서 우리는 이 천년왕국이 그리스도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기 전에 세워질 수 없다는 것 외에 무슨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때까지 유대에는 난리와 소란의 소문이 들릴 것이며 형벌의 날일 것이며 모든 이방에도 재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엄숙한 경고의 말씀인 21:34∼36을 주의해서 읽어보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헛된 안전과 평화의 구호에 속지 말라. "뜻 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아, 세상 장단 맞춰 춤추며 세상 향락에 도취되어 먹고 마시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 헛된 부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가지고 예리한 눈초리로 그것을 잡으려고 하는 자들도 있다. 이같은 자들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 주님은 더디 오신다"고 할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21:36).
이제는 요한복음 14:1∼3의 새로운 주제를 다루어 보자. 내가 이것을 새로운 주제라고 칭한 것은 창세기로부터 지금까지 살펴본 구절 중에 이같이 놀라운 사실이 온전히 계시된 곳을 찾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슬픈 밤에 찬양받으실 주님을 둘러 앉았던 제자들의 소망은 그분이 다스리게 될 예루살렘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12장에서 그 나라에 대하여 하신 그분의 마지막 말씀은 그분이 세상에 외로이 남겨두어야 될 택한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분의 마음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13장은 우리의 대제사장의 온유하신 은혜를 나타낸다. 동양에서는 종들이 대야에 물을 담아 손님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나 요한에게 물그릇을 들고 발을 씻기도록 하지 않으시고 귀하신 예수께서 스스로 그 모든 것을 하셨던 것이다. 곧 그분은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우리는 그분의 온유하신 마음을 깊이 깊이 알아야 한다.
갈보리의 구속 사역은 예수님께서 홀로 하신 것이다. 홀로 역사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발을 깨끗하게 씻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여, 당신은 참으로 귀하십니다. 당신은 구원의 주요 이를 온전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신자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바 깨끗하게 씻겨졌다. 그분은 지금도 당신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계신 것을 잊지 말라.
14장에 이르러서는 귀하신 예수께서 더 이상 자신의 놀라운 비밀을 숨기지 않으시고 그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알려 주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물론 이것은 새로운 것이었다. 그들은 그분이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예루살렘의 영광만 들었지 하늘 아버지의 집에 자기들의 처소가 예비된다는 것은 듣지 못했었다. 아, 그 볼품없는 죄인들이었던 어부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거할 처소를 가지게 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났으나 예수께서 자신의 피를 주심으로 우리를 하늘의 영광의 하나님께로 데려가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아버지의 집으로 가신 것이 확실한만큼 그분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친히 그분에게로 데리고 가실 것도 확실한 것을 분명히 기억해두라.
포효하는 전투 중에 있는 병사에게, 또는 폭풍 속에 처한 선원에게 그가 원하는 고향에 닿을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실로 놀라운 위안을 준다. 아무리 불같은 환난이 밀어닥치고 아무리 어두운 폭풍우가 닥쳐오더라도 그분이 임재하신 그 본향은 확실히 우리가 이를 곳이다. 냉랭한 세상에서 시달리는 고독한 과부와 고아 같은 형제들이여, 이것을 생각하라. 고난받는 자들이여, 기운을 내라! 잠시 후 당신들의 본향은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분깃이 아닌가! 당신의 정다운 본향, 주께서 계신 그곳은 복되게도 확실한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당신이 그분을 뵈올 때, 무서운 심판주로 그분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을 사랑하사 자기 피로 당신을 깨끗케 하신 그분이 당신을 영접하러 오신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아마 당신은, "합당한 사람만 그렇게 하시겠지" 할는지 모른다. 예수님이 그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하실 때 그 둘레에 앉아서 듣던 사람들은 이에 합당한 사람들이었을까? 주께서 그들의 모든 것을 아셨다. 이 영원한 사랑의 놀라운 비밀을 들은 그들 모두가 바로 그 밤에 그분을 버리고 도망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주께서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 영혼에 깊이 심어주시기를 바란다.
아마 당신은 "주께서 이처럼 그분의 오심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요한복음 21:18∼21을 보면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분명하게 나와 있다. 주님의 오심은 분명히 죽음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것을 말씀하시고 그 후에 그분은 또 다른 제자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오심이 믿는 자들의 죽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나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이 죽음을 뜻한다는 구절은 찾아보지 못했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 위해서 몸을 떠나는 것은 더 좋은 것으로써 매우 복된 것이다. 죄와 죽음의 몸을 떠나는 것이 더 좋은 것이지만 주의 오심과는 매우 다른 문제이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주께서 믿는 자들을 자기에게로 영접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 설명은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오심이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안에서 깨닫는 것은 주의 오심이 영적이냐, 육신적이냐를 분명히 증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사도행전 1:9∼11을 알아보자.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이처럼 확실한 말씀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바로 그 모습대로 하늘에 올라가셨는가? 아니면 몸은 무덤에 내버려두고 영만이 하늘에 올라가셨는가? 영혼만 올라가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은 헛된 것이며 우리가 믿는 것도 헛된 것이다(고전 15장 참조). 모든 것이 여기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그분이 우리의 대속자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또 우리의 증인으로서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셨다면 그렇다면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복음이 될 수 없다. 만일 나의 증인이 나를 위해 죽음에서 살아나지 못하고, 나의 증인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셨다면 나는 어찌 모든 것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부활이 영뿐이라는 희미한 생각조차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은 바로 그 복음의 근본을 흔들어 놓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은 영이 아니라고 설명하셨다.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만 있다는 영적 재림은 치명적인 오류이다. 세상에 계셨던 그대로 그분은 살아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분이 반드시 다시 세상에 오실 것이다. 유대 사람들이 묻기를 "네 두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할 것이 아닌가? 형제들이여, 우리를 위해서 찔리신 그 손들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분은 살아나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면 "주께서 다시 오심이 구약성경에 계시된 그 복된 천년왕국이 설립되기 전인지 아니면 그 후인지를 확실히 증거할 수 있는 구절이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할까?
사도행전 3:19∼21을 보라. 눈이 어두웠던 유대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는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라"고 하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보내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주님은 바로 그 왕국이 시작될 때 오실 것이다. 참으로 왕이 없이 어찌 왕국이 시작될 수 있을까? 성경은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악한 자와 의로운 자가 그 추수 시기 또는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은 그러한 악이 세상에 충만한 시대에 어떻게 땅 위에 의와 축복이 묘사된 선지자의 글이 모두 다 이루어져서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를 알게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말하자면 "…할 때까지"라는 구절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한 세상의 축복의 시대는 주님 재림 이전에는 절대로 생기지 아니하며 재림 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신 말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첫번째 구절로서 로마서 8:19∼23을 읽어보자. 이제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유대 나라 중심에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속받은 교회, 그 지체, 신자인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구절에는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다)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이 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를 기다리거나 또는 영에 있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우리는 의롭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과 화평을 가졌으므로(5:1), 몸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몸에 있으면서도 정죄함이 없다는 확신을 누리는 것(8:1), 이것은 우리 몸의 구속을 사모하며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언제 몸의 구속이 이뤄질까?
고린도전서 15:23∼25을 보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부활을 아주 명확하게 가르쳐 주신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들은 그분이 오실 때 부활하게 된다. 이것은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 뿐만 아니라 로마에 있는 모든 신자들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 예수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7). 모두 함께 부활한다고 하지 않고 "자기 차례대로"라고 한 것을 기억하라. 첫 열매인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이것은 복되고 확실한 증거이다! 그리고 "다음에는…"이라는 말에 1900여년 이상이라는 기간이 포함될 줄을 누가 생각했으랴? 여기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의 몸인 성도의 부활 사이(시간)가 1900여년 이상이나 더 지나오고 있다면 첫째 부활인 구원받은 자의 부활과 나머지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할 그들의 부활과의 사이는 확실히 천년이 될 것이 아닌가?(계 20장 참조)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주의 강림 때에 이뤄진다면 우리 살아남아서 죽음을 보지 않은 자들의 몸의 구속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스도 강림 때에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들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15:51,52). 이것과 부합되는 성령의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려고 한다. 우리가 서신서를 읽어갈 때 사도 시대 당시 여러 곳에서 신자들이 바로 이것을 기다렸던 것을 알게 된다. 영혼의 벌거벗은 상태가 아니고 복된 상태라고 바울이 말했다.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갈라디아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글이므로 이 주제에 관한 기록이 없다. 또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 받아 하늘 처소에 앉히운 교회의 정경을 나타낸 것으로써 물론 교회의 소망에 관한 이 주제에 대해서 말한 것이 없다.
그러나 빌립보서에서는 교회가 복음을 위해 더욱 수고하는 것을 보며 실망한 세상을 뚫고 전진하는 이 복된 소망 외에 다른 것이 나타나 있지 않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21).
초대 신자들의 복된 소망과, 오늘날 심판의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두려워 하는 자들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어머니가 여행갔다 돌아오실 때 창을 통해 내다보며 오래 기다리던 어린 자녀들이 달려가 안기울 그 품은 말할 수 없이 그리운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밖으로 뛰어나가 어머니를 맞아들이지 않는가! 자기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자녀들에게 폭군처럼 위협하는 어머니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땅에 두고 하늘로 떠나실 때 손을 들어서 그들을 전과 같이 축복하셨다. 그분은 그들을 떠나셨지만 떠나가신 그 모양 그대로 돌아오실 것이다. 그분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이 세상에는 무서운 심판자로 오신다.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이여,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을 거룩한 피로 깨끗하게 해주신 그분을 보게 될 것이며 그분의 축복의 손길이 있을 것이다. 당신을 그분의 피로 사서 이제 그분의 것이라고 요청하시는 구주로 오시는 그분을 생각해보라. 수치와 슬픔과 죄많은 당신의 몸이 순식간에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아주 놀라운 순간이다! 당신의 모든 눈물이 씻겨질 것이다.
그분의 얼굴을 대하며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어떠할까? 그분의 얼굴은 그 나무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실 때 괴로움으로 깊이 주름잡혔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당신이 공중으로 끌어올려졌을 때, 당신이 울며 기도하던 버린 자식이 그 자리에 함께 했다면, 가슴이 찢어지도록 이별하는 것이 슬펐던 사랑하던 자가 그곳에 함께 있다면, 아, 그 기쁨은 어떠할까?
세상의 냉랭한 찬서리를 느끼는 믿음의 과부들과 고아들이여, 그때에는 영원히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아, 세상 괴로움은 순간에 지나가며 그분의 임재 가운데 기쁨은 끝이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확실성은 매우 귀한 것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슬프게도 하나님의 교회가 이 복된 소망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우리가 데살로니가전서 1:9,10에서 보는 것처럼 사도 시대에는 이것이 어린 신자들의 즉각적인 소망이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처럼 어린 신자들이(데살로니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일년도 채 되지 않았다) 세상이 변하기를 기다리거나 또는 죽어서 주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하늘로부터의 주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들은 다른 소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세상에 크게 비춰지는 것들, 사람의 수가 늘어나고, 재단이 설립되고, 이른 바 그리스도의 성전이라는 우아한 건물 따위는 사도 바울의 생각에 아예 없었으며, 이것들은 그의 소망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것을 위해서 그는 밤낮 가리지 않고 수고했으며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 하였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 그에게 기쁨의 면류관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리스도의 오심이 실제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분의 오심에 대한 기다리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란다.
거룩한 삶을 위한 가장 힘있는 말씀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하던 사도 바울의 기도였다.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3). 이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사모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사역자의 열망이다. 바울은 밤낮으로 이것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모든 신자들이 그때에 거룩함에 흠이 없이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을 매우 어렵게 생각하며 "아직도 많은 말씀들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릴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로마제국이 재건되야 한다는 것을 들었고, 유대인들이 유대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들었으며, 그 불법의 사람이 예루살렘을 통치하러 나타나야 한다는 것도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이전에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 모든 사건들이 일어난 후에야 주님께서 오시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것이 아직 성취되지도 않았지 않는가?"
나중에 말하려고 하지만 틀림없이 로마제국은 재건된다. 유대인들이 본토로 돌아가게 되며 그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게 된다. 유럽은 어두움에 빠져들어가 다시 귀신들과 우상들을 섬기는 곳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음 말씀을 보면 모든 의문이 해소될 것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5∼17).
이제까지의 구절들은 예언의 진리를 점차적으로 밝힌 것으로 주의 오심의 일반적 의미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자세한 것이 나타나 있다. 사도 바울의 목적은 믿는 자들 가운데서 죽은 누군가로 인해 몹시 슬퍼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3주간 동안 가르침을 받은 어린 신자들이었음을 기억하라(행 17:2).
바울의 전도 방법이란 항상 옛 창조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어린 신자들도 그와 함께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얻었으므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이 충만하였던 것이다(살전 1장 참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갓 신자가 된 이방인들이 육신의 죽음을 보고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분명히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성도들의 부활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쓴 것으로 잠자는 자들이 잃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홀연히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고전 15장 참조).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우리가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차 일어날 어떤 사건보다 먼저 일어날 사건이다. 어느 누구도 잠자는 자와 살아있는 성도가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기 전에 다른 일들이 이뤄져야 한다는 말씀을 단 한 구절이라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예화 하나를 들겠다. 마치 세상이 그리스도를 반역하듯이 로더함 성에 그들의 황제를 반역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자. 이제 그 황제가 그의 전 군대를 이끌고 그 성을 멸하러 간다는 것을 알렸다. 그러나 그 성에는 백명 가량되는 충성스러운 그의 신하들이 있었다. 황제는 그들을 더비에서 영접하겠다고 전해 왔다. 더비에서 황제를 만날 수 있도록 그들을 데리러 온다는 것이며 그후에야 로더함에 있는 원수들을 공격하겠다는 것이다. 황제가 더비로 행차하는 시간은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그 신하들은 어느 때인가는 황제를 만나게 될 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제 그 황제가 실제로 그 성에 들어가기 전에 로더함에는 많은 일들, 참호를 파고, 포대를 쌓는 일 등등이 일어날 것이다.
이와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살해했으며 아직도 여전히 반역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그분의 신하이다. 그리고 그분의 신하들은 모두 그분이 오실 때 공중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나서 심판으로 운명지어진 이 세대에 신원의 날이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자들이 주를 만나기 위해 공중에 끌어 올리운다는 하나님의 영의 말씀대로 교회가 주와 함께 있기 위해 끌어 올리우는 주의 날을 기대해야 한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말한 것이다. 신자의 소망이 공중으로 끌어 올리워지는 것이므로 때와 시기에 관해서는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사실 성경에는 교회가 끌어 올리우는 날짜에 관해서는 말씀하신 일이 없다. 날짜들은 모두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교회가 들림받은 후에 신원의 날이 시작된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끝나고 신원의 날이 시작된다(사 61장 참조). 이것을 알고 있는 바울은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우리는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에게 핍박과 환난이 닥친 것과, 또 사도 바울이 보낸 것처럼 꾸미고 온 거짓 형제들이 "주의 날이 벌써 이르렀다"고 전하여 그들에게 괴로움을 더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사단의 이 궤계로 말미암아 크게 동요한 듯하다.
데살로니가후서는 그 잘못됨과 슬픔에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주의 오심이 그들에게 환난의 날이 되지 않는다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1:7). 이처럼 우리는 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말한 것처럼 신원의 날, 환난받는데서 떠나 공중으로 끌어 올리워서 그들과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시다. 그러나 불꽃 같은 심판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1:8, 9).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1:10).
바울은 더욱 확신케 하려고 이같이 말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2:1,2).
전에 들었던 예화를 다시 생각해 보자. 그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더비에서 그들의 황제를 만나기 위해 로더함에서 불려 나오기 전에 로더함을 공격하려고 포문이 열리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그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큰 혼란이 일어났다고 하자. 그리하여 그 황제의 한 장교가 그들에게 편지하여 이르기를 "황제 폐하의 신하되시는 여러분, 내가 간청하는 것은, 우선 그분의 오심의 확실성과 여러분이 그분과 함께 있게 되는데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황제의 말씀을 믿을 수 없습니까? 여러분이 더비에서 그분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기 전에 포탄은 단 한 발도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할 것이다. 바로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혼란에 떨고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며 확신을 주었던 것이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일어날 두 가지 일이 확실한 바 그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말한 것으로, 주께서 그의 성도들에게 오심과 주를 만나는 그들의 모임인 것이다.
우리가 거리를 거닐 때나 바쁘게 뛰어다니는 군중을 볼 때 믿는 자는 이 순간에라도 공중으로 끌어올리울 수 있고, 믿지 않는 자는 그 신원의 날의 심한 고통 가운데 남게 될 엄청난 차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데살로니가후서 2:3∼12에서 우리는 이 세대의 종말에 일어날 무서운 기사를 본다. "배도하는 일" 또는 배교가 있다. 참 교회가 끌어올리운 후에 그것은 더욱 심할 것이다. 이 배도의 특징이 계시록 13장에 묘사되어 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이 그 하나의 특징이다.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 2:4).
어떤 사람은 이 무서운 인물이 참 교회가 주를 만나려 끌어 올리운 후, 즉 인간 죄악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 불법의 사람을 카톨릭 또는 교황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 불법의 사람이 성전에 앉을 것이라는 구절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산 또는 모리아산―그분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곳―외에 결코 어떤 성전도 세우지 않으셨으며 또 세우지 않으실 것이다. 지금 그 성전은 무너져 있지만 그때에는 재건된다고 성경 여러 곳에 밝혀 놓았다. 그리고 이 무서운 불법의 사람은 분명히 유대인 중 하나이며 그가 그의 백성에게 나타나면 유대인들은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일 것이다(요 5:43 참조).
사단이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듯이 이 불법의 사람 속에 들어갈 것이다. 다니엘은 분명하게 그를 지적하여 마지막 때에 나타날 악한 왕이라고 하였다. "이 왕이 자기 뜻대로 행하며 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 비상한 말로 신들의 신을 대적하며 형통하기를 분노하심이 쉴 때까지 하리니 이는 그 작정된 일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단 11:36). 우리는 교황이 유대 나라 왕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모두 유대인에게 일어날 것이 분명하며 성령과 교회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바울은 그들이 들은 바를 상기시켰다.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는데 그것은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그 누룩이다.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활동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올라가시고 교회가 주를 영접하여 끌어 올리운 후에는 어떻게 될까?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서…." 너무 분명하게 그 악한 자는 교황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주 예수께서 그의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카톨릭과 모든 배교한 교회들이 그 열왕들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된다(계 17장 참조). 그런데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모든 속임으로 임하"는 이 무서운 사건들은 은혜시대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 어두움의 날에 하나님께서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여 저주받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이 은혜의 시대가 끝난 후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세상을 무섭게 흔드실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받을 그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까닭이다. 진리를 받지 않음으로 저주받은 것이다. 이것이 현 세대의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구원받았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2:13). 그 귀한 주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끝맺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3:5).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실제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바울에게는 그것이 언제나 소망의 주제로 나타나 있는 가장 중요한 실제적 진리였다. 그는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때, 이른바 교회가 슬프게도 진리에서 떠나 악하게 될 것을 말한 후에도 염려한 것이 이것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 6:14∼16).
그리고 이어서 소망에 대해 잘못 판단하거나 그것을 버리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마지막 때의 무서운 상황을 조심하라고 권면한 후에도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그 소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바울은 다시 디도에게 이렇게 써서 보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이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불쌍한 죄인으로 비참한 가운데서 발견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그 은혜를 나타내셨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온전한 은혜로 이루어지게 하셨다. 이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도록 가르쳐주고 있다. 또한 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신다(딛 2:13).
사람들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처럼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자들이 기다리는 소망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와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그리스도께서 한번 십자가에서 당신의 죄를 지고 당신에게 내릴 온전한 심판을 받으셨으므로 당신에게는 이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할 수 없는 위안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분의 온전한 속죄를 증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 우리는 이제 살아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다. 의롭다 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와 허물을 다시 기억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죄 때문에 심판받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지 않은 한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아, 이것은 오랫동안 괴로워 하던 영혼에게 주어지는 말할 수 없는 복된 평안이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야 되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과연 그렇다. 그 심판대는 하나님께 가까이 살면 살수록 더욱더, 수욕과 미움을 받은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가장 복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곧 각자의 행함에 따라 상주실 그분의 시상대 앞에 서게 될 가장 복된 것이다.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문제, 그리고 우리에게 내려질 모든 정죄가 그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히 해결되었고,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분이 냉수 한그릇의 호의에도 결코 상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이것은 큰 확신과 인내를 주는 격려이다.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심한 시련과 시험 가운데서 이 복된 소망보다 더 영혼에게 안정과 인내를 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4).
이 귀한 주제가 성경에 온전히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9). 사람들은 장래에 대한 전망이 매우 밝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주 어둡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예언은 불확실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벧후 3:1∼15 참조). 베드로후서 3장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즉 교회보다 더 큰 세계를 본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 모든 말씀에서 밝혀진 한가지 사실은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단지 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이것은 우리의 귀하신 주께서 우리 마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을 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의 소원과 소망이 아닌가? 확실히 이것은 귀하다.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나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그리고 경건치 않은 세상에 있을 심판의 사실에 관해서는 아담의 칠대손 에녹이 예언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유 14,15절). 이것은 얼마나 엄숙한 말씀인가!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이에 대해서 뚜렷하게 나타낸 것 중에서 몇 말씀을 살펴보자.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25).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이 중요한 경고의 말씀을 경히 여기는 세속적인 신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이는 일곱 교회 역사가 흐르는 동안에 있는 교회의 상태에 적당한 경고이며 지금에도 마땅한 말씀들이다.
계시록 4장에는 그 일들이 일어난 후의 일들을 밝혀 놓았다. "이후에 (이것들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계 4:1). 그리하여 4장, 5장에는 구속받은 자들이 세상에서 떠나 영광스러운 어린양의 보좌 둘레에 앉아있는 복된 광경이 펼쳐진다.
6장에서 19장까지는 교회가 끌어 올려 주와 함께 있게 된 후 이 세대의 종말에 관한 성령의 말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크고 무서운 환난의 날이 펼쳐지는 것이다. 땅에는 평화가 없어질 것이다(6:4). 어느 누가 감히 그 두려운 날의 공포를 나타낼 수 있으랴?
전에도 없었고 다시 있을 수도 없는 그 큰 환난의 때에 관하여 선지자들의 한 말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록한 모든 글이 응하는 이 신원의 날의 화들과 심판에 관하여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다른 성경과 온전히 일치하게 이 진노의 날 동안에 유대인에게 되어질 전경(全景)을 다시 한번 새겨보고자 한다.
사단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쫓겨 내려와서 유대의 남은 자들을 핍박한다(계12장). 사단이 로마제국의 머리에게 그의 권세를 주어 자기를 경배하게 한다(13:3∼8). 배교한 교회가 그 로마제국에 재산을 빼앗기고 이제는 그녀의 마지막 참람된 역할을 위해 그 짐승을 타게 된다(17장). 이것은 그 로마제국의 머리로 하여금 마지막 가증한 행위를 하게 한다. 전에는 있었다가 지금은 없는 로마제국이 가장 두려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나타난다. 열(10) 왕들이 그 제국의 머리와 동맹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 제국을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제국에 그 열 왕 또는 열 왕국의 권세를 주기 위함이다. 그 재건된 제국이 잠시 동안 그 음녀(부패한 거짓 교회)를 태우고 가나 배신하여 그때에 있을 열 왕국과 함께 그녀를 던져버린다. "음녀를 미워하며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17:16). 18장에는 그녀가 불타는 것이 가득히 묘사되었다.
4장에서부터 주와 함께 있던 교회가 이제 19장에는 주와 함께 돌아온다. 20장 서두에는 첫째 부활의 순서가 온전히 완성되고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안식에 들어간다. 이 천년시대의 안식이 다하기까지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하며 이 천년시대 동안 이 지상에 약속된 모든 축복이 이루어진다. 사단은 결박되며 죄는 전혀 허용되지 않고 즉시 판단된다. 그리고서 종말에 이르러 사단이 잠시 동안 놓여나면 죽은 자들의 큰 심판이 일어날 것이다(계 20:11∼15). 이 일이 끝난 후 새 하늘과 새 땅의 말할 수 없이 복된 영원세계가 펼쳐진다.
이 중대한 주제를 마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마지막 음성을 들려주려 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그러면 이 주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는 사복음서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신 말씀을, 그리고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신 말씀을 살펴보자.
사복음서를 살펴보기 전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가브리엘의 말을 살펴보자.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 놀라운 구절에 있는 "…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처럼 문자 그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태어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다. 또한 하나님은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이제 사복음서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자. 먼저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일곱가지 비유를 소개하려고 한다.
첫번째는 씨뿌리는 비유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된 나라를 세우시기 전에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뿌리는 시대, 또는 전파하는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 네 부류 중 한 부류만이 구원받아 열매를 맺었다. "더러는 흙이 없는 돌 밭에 떨어지고",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다."
당신은 멸망하는 이 어느 하나에 속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 세상 헛된 염려와 부(富)를 조심하라.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으리라. "주 예수님은 이런 상태가 계속될 것을 가르치셨는가? 아니면 점차로 모든 사람이 말씀을 받게 되어 모두 구원받게 될 것을 가르치셨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번째 비유가 해답을 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의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그런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예수님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이 비유를 통해 온 세상이 개혁된다는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반대라는 것과, 또한 네 곳에 뿌려진 씨 가운데 오직 한 곳만 온전히 열매 맺었다는 것과, 악한 자와 의로운 자가 이 세상 끝까지 함께 자라가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악한 자는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세번째 겨자씨 비유는 교회가 크게 되었을 때 첫번째에 씨를 주어먹던 그 악한 자들이 그 나무가지에 와서 깃든다는 것이다.
네번째는 가루 속에 넣은 누룩 비유이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리라." 이 비유는 더 할 나위없이 비참하게 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교회가 너무나 세속화하여 이른바 기독교 집단은 온통 이 여자의 악한 누룩이 눈에 띠지 않게 역사해서 부풀어 오른 것이다. 성경에서 누룩은 항상 악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리새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 등이 있다.
다섯번째, 여섯번째, 그리고 일곱번째 비유들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밭 전부가 아닌 그 안에 있는 보화, 온 세상이 아닌 하나의 진주, 즉 하나님의 교회를 세상에서 데려가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그 큰 그물에 걸린 고기 중에 좋은 것과 못된 것이 있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마태복음 24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적은 무리 유대인 제자들에게 하신 알기 쉬운 가르침을 보게 된다. 이제까지 말씀해온 일곱가지 비유와 같은 주제이지만 비유가 아니고 다만 알기쉽게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 서두 몇 절에는 예수께서 유대 성전의 무너짐을 예언하셨는데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장차 그분의 왕국을 다스리러 오실 때 그분의 발이 설 곳인 감람산에 앉으셨다. 그때 제자들이 와서 조용히 물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사오리이까" 24:4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거기에는 단 한마디도 세상이 개선된다는 언급이 없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거짓 그리스도, 즉 미혹케 하는 자들, 난리와 난리의 소문, 기근, 온역, 지진, 핍박, 재난, 죽음, 죄악의 관영,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랑이 식어지고, 그 후에 끝이 오리라고 하셨다. 이 예언의 말씀 중에 많은 부분이 성취되었고, 아직도 성취되어져야 할 부분이 많다.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은 그분의 유대인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며 그리고 그 나라에 일어날 것에 대하여 특별히 지시한 바라는 것을 잊지 말라. 15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이것은 분명히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니엘 12:11∼13을 읽고 또 9:27과 대조해 보면 로마제국의 머리의 무서운 행동을 보게 되는데, 그 이레(一週)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며 그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설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의 증거를 믿는 경건한 유대 사람에게 매우 귀중한 말씀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순간 피하라는 신호로 알아야 한다. 그때에 그들은 그들의 옷을 가지러 집에 들어갈 시간 조차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창세로부터 그 때까지 없었고 그 후에도 없을 큰 환란이 일어난다.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유대인)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이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1,2).
분명히 멸망의 가증한 것을 거룩한 곳에 서는 것과 환란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께서 이것이 환난 직후에 일어날 것이라고 증거하셨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가장 확실한 것은 그 때에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께서 오시는 모습을 보고 통곡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이것이 바로 눈 앞에 있으니 매우 주목할 만하다. 비록 아직도 유대인이 이방에 흩어져 있을지라도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너무나 진지한 배려(配慮)이다. 이 세상은 여전히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있다.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때에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가장 엄숙한 경고가 내려져 있다.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한 종의 운명은 매우 두려울 것이다. 그도 역시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으나 그의 운명은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律)에 처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은 이와 같이 엄숙하다. 오 독자여, "내가 준비되어 주를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엄숙한 자문(自問)으로 일깨움 받으시기를 바란다.
마태복음 25장 전체가 역시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 열 처녀의 비유가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는 바대로 그분이 오실 때 모두가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에게 속하였다고 자처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못들어 간다. 졸며 잠들어 있는 자, 오, 믿는다고 자처하는 자여, 당신이 만일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말씀을 듣게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늘에 가 계시는 동안 그 시기에 관한 또 하나의 다른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종들 모두가 받은 달란트를 활용한 것이 아니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주께서 오실 때 그 살아있는 백성에 대한 심판이 매우 분명하게 말씀되어 있다. 당신이 유심히 읽어보면 여기에는 죽은 자의 심판이 없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반역한 그 슬픔의 밤에 그분이 대제사장 앞에 서셨을 때에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아, 인간은 항상 그분의 증거를 거절한다. 그 대제사장은 그것이 참람된 말이라고 하며, 그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였다(마 26:64,65 참조).
이제 마가복음 13장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그 엄숙한 경고의 말씀이 반복되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깨어 있어야 할 자는 문지기 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언제인지 모르므로 모두가 깨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주의 오심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생전에는 오시지 않을 테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주의 오심이 매우 가까움에는 틀림이 없다. 그분이 출타해 있는 이 밤(현시대)은 말씀하신 대로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저물 때", "밤중", "닭 울때" "새벽"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이 시대의 저녁에 해당하는 때는 이미 지났고, 밤중인 소위 암흑의 중세기도 지났고, 개혁을 일깨운 닭 울음도 지났다. 아, 새벽의 동이 터온다. 깨어 있으라! 날이 곧 밝아온다! 깨어서 준비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런데 아마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예수님이 복음의 전파로 말미암아 세상이 개선되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셨다면 이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친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누가복음을 주의깊이 읽어보고 거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을 들어보자(눅 12:35∼48). 여기에는 두 부류의 종들이 나온다. 인자가 오실 때 깨어있는 종들은 매우 복되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이르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는 악한 종, 특별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게" 된다고 했는데, 이 종은 매우 귀한 은총을 받은 유대 백성을 말한다. 어떤 나라가 그 나라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알았는가? 하나님의 진노의 추수 심판은 그 때에 그 은총받은 나라에 쏟아질 것이다. 그 나라의 운명은 주의 뜻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교의 나라보다 더욱 처참할 것이다. 확실히 이 경고의 말씀은 경히 여길 바가 아니다. 이 심판은 매우 가까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누가복음 17:24∼37을 보면 주께서 거절받으실 것을 아주 결정적으로 말씀하셨다. 이 거절받으심이 바로 인자의 오시기까지 계속된다. 그분을 거절함이 마치 노아와 롯의 때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세상이 개선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거리가 먼 생각이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누가복음 19:11∼27에 기록된 먼 나라에 간 어떤 귀인에 관한 비유에는 많은 백성이 그분을 미워할 것이라는 예언이 되풀이 되었고, 또 그들이 그분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그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그분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21장은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듣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날 줄 고대했던 백성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주께서는 많은 고난과 핍박의 시대가 있을 것을 알려주셨다. 이는 그들의 생각과 아주 달랐다. 그들은 모든 이방을 다스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20절에 있는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 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라는 말씀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빠져 있다. 그 백성들이 기대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마 하나님께서 이 성을 온 땅의 도성이 되게 하리라(사 2:1∼4)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안전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이미 이루어졌다.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을 때 그 유대인 제자들은 산으로 도망쳤다.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 나라가 땅 위에 임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같이 말하리라. "그같은 멸망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될 것임이니라'(사 11:9)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왕국 시대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한 시대가 오기 전에 있을 것에 대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자. 형벌의 날들이 유대에 임하여 그 나라에는 큰 재난이 있겠고 그 백성에게 진노가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21:20∼24까지에 있는 예언은 그 나라의 역사를 짧게 요약한 것으로서 우리 눈 앞에서 이미 다 이루어졌다. 저희는(유대인) 칼날에 죽임을 당하고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갔고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밟혔다. 18세기 동안 이상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당시에는 그분의 제자들 조차도 이것을 깨닫거나 믿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하고 물어본 것을 보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 오래 전에 이미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하시지 않으셨는가? 분명히 주께서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세상이 그때에 개선된다는 말인가?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된 대로 "큰 환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다. "민족들이… 곤난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니…",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러면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에서 우리는 이 천년왕국이 그리스도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기 전에 세워질 수 없다는 것 외에 무슨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때까지 유대에는 난리와 소란의 소문이 들릴 것이며 형벌의 날일 것이며 모든 이방에도 재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엄숙한 경고의 말씀인 21:34∼36을 주의해서 읽어보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헛된 안전과 평화의 구호에 속지 말라. "뜻 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아, 세상 장단 맞춰 춤추며 세상 향락에 도취되어 먹고 마시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 헛된 부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가지고 예리한 눈초리로 그것을 잡으려고 하는 자들도 있다. 이같은 자들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 주님은 더디 오신다"고 할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21:36).
이제는 요한복음 14:1∼3의 새로운 주제를 다루어 보자. 내가 이것을 새로운 주제라고 칭한 것은 창세기로부터 지금까지 살펴본 구절 중에 이같이 놀라운 사실이 온전히 계시된 곳을 찾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슬픈 밤에 찬양받으실 주님을 둘러 앉았던 제자들의 소망은 그분이 다스리게 될 예루살렘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12장에서 그 나라에 대하여 하신 그분의 마지막 말씀은 그분이 세상에 외로이 남겨두어야 될 택한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분의 마음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13장은 우리의 대제사장의 온유하신 은혜를 나타낸다. 동양에서는 종들이 대야에 물을 담아 손님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나 요한에게 물그릇을 들고 발을 씻기도록 하지 않으시고 귀하신 예수께서 스스로 그 모든 것을 하셨던 것이다. 곧 그분은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우리는 그분의 온유하신 마음을 깊이 깊이 알아야 한다.
갈보리의 구속 사역은 예수님께서 홀로 하신 것이다. 홀로 역사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발을 깨끗하게 씻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여, 당신은 참으로 귀하십니다. 당신은 구원의 주요 이를 온전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신자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바 깨끗하게 씻겨졌다. 그분은 지금도 당신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계신 것을 잊지 말라.
14장에 이르러서는 귀하신 예수께서 더 이상 자신의 놀라운 비밀을 숨기지 않으시고 그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알려 주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물론 이것은 새로운 것이었다. 그들은 그분이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예루살렘의 영광만 들었지 하늘 아버지의 집에 자기들의 처소가 예비된다는 것은 듣지 못했었다. 아, 그 볼품없는 죄인들이었던 어부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거할 처소를 가지게 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났으나 예수께서 자신의 피를 주심으로 우리를 하늘의 영광의 하나님께로 데려가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아버지의 집으로 가신 것이 확실한만큼 그분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친히 그분에게로 데리고 가실 것도 확실한 것을 분명히 기억해두라.
포효하는 전투 중에 있는 병사에게, 또는 폭풍 속에 처한 선원에게 그가 원하는 고향에 닿을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실로 놀라운 위안을 준다. 아무리 불같은 환난이 밀어닥치고 아무리 어두운 폭풍우가 닥쳐오더라도 그분이 임재하신 그 본향은 확실히 우리가 이를 곳이다. 냉랭한 세상에서 시달리는 고독한 과부와 고아 같은 형제들이여, 이것을 생각하라. 고난받는 자들이여, 기운을 내라! 잠시 후 당신들의 본향은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분깃이 아닌가! 당신의 정다운 본향, 주께서 계신 그곳은 복되게도 확실한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당신이 그분을 뵈올 때, 무서운 심판주로 그분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을 사랑하사 자기 피로 당신을 깨끗케 하신 그분이 당신을 영접하러 오신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아마 당신은, "합당한 사람만 그렇게 하시겠지" 할는지 모른다. 예수님이 그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하실 때 그 둘레에 앉아서 듣던 사람들은 이에 합당한 사람들이었을까? 주께서 그들의 모든 것을 아셨다. 이 영원한 사랑의 놀라운 비밀을 들은 그들 모두가 바로 그 밤에 그분을 버리고 도망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주께서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 영혼에 깊이 심어주시기를 바란다.
아마 당신은 "주께서 이처럼 그분의 오심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요한복음 21:18∼21을 보면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분명하게 나와 있다. 주님의 오심은 분명히 죽음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것을 말씀하시고 그 후에 그분은 또 다른 제자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오심이 믿는 자들의 죽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나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이 죽음을 뜻한다는 구절은 찾아보지 못했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 위해서 몸을 떠나는 것은 더 좋은 것으로써 매우 복된 것이다. 죄와 죽음의 몸을 떠나는 것이 더 좋은 것이지만 주의 오심과는 매우 다른 문제이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주께서 믿는 자들을 자기에게로 영접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 설명은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오심이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안에서 깨닫는 것은 주의 오심이 영적이냐, 육신적이냐를 분명히 증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사도행전 1:9∼11을 알아보자.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이처럼 확실한 말씀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바로 그 모습대로 하늘에 올라가셨는가? 아니면 몸은 무덤에 내버려두고 영만이 하늘에 올라가셨는가? 영혼만 올라가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은 헛된 것이며 우리가 믿는 것도 헛된 것이다(고전 15장 참조). 모든 것이 여기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그분이 우리의 대속자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또 우리의 증인으로서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셨다면 그렇다면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복음이 될 수 없다. 만일 나의 증인이 나를 위해 죽음에서 살아나지 못하고, 나의 증인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셨다면 나는 어찌 모든 것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부활이 영뿐이라는 희미한 생각조차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은 바로 그 복음의 근본을 흔들어 놓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은 영이 아니라고 설명하셨다.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만 있다는 영적 재림은 치명적인 오류이다. 세상에 계셨던 그대로 그분은 살아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분이 반드시 다시 세상에 오실 것이다. 유대 사람들이 묻기를 "네 두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할 것이 아닌가? 형제들이여, 우리를 위해서 찔리신 그 손들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분은 살아나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면 "주께서 다시 오심이 구약성경에 계시된 그 복된 천년왕국이 설립되기 전인지 아니면 그 후인지를 확실히 증거할 수 있는 구절이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할까?
사도행전 3:19∼21을 보라. 눈이 어두웠던 유대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는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라"고 하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보내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주님은 바로 그 왕국이 시작될 때 오실 것이다. 참으로 왕이 없이 어찌 왕국이 시작될 수 있을까? 성경은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악한 자와 의로운 자가 그 추수 시기 또는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은 그러한 악이 세상에 충만한 시대에 어떻게 땅 위에 의와 축복이 묘사된 선지자의 글이 모두 다 이루어져서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를 알게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말하자면 "…할 때까지"라는 구절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한 세상의 축복의 시대는 주님 재림 이전에는 절대로 생기지 아니하며 재림 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신 말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첫번째 구절로서 로마서 8:19∼23을 읽어보자. 이제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유대 나라 중심에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속받은 교회, 그 지체, 신자인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구절에는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다)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이 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를 기다리거나 또는 영에 있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우리는 의롭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과 화평을 가졌으므로(5:1), 몸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몸에 있으면서도 정죄함이 없다는 확신을 누리는 것(8:1), 이것은 우리 몸의 구속을 사모하며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언제 몸의 구속이 이뤄질까?
고린도전서 15:23∼25을 보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부활을 아주 명확하게 가르쳐 주신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들은 그분이 오실 때 부활하게 된다. 이것은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 뿐만 아니라 로마에 있는 모든 신자들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 예수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7). 모두 함께 부활한다고 하지 않고 "자기 차례대로"라고 한 것을 기억하라. 첫 열매인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이것은 복되고 확실한 증거이다! 그리고 "다음에는…"이라는 말에 1900여년 이상이라는 기간이 포함될 줄을 누가 생각했으랴? 여기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의 몸인 성도의 부활 사이(시간)가 1900여년 이상이나 더 지나오고 있다면 첫째 부활인 구원받은 자의 부활과 나머지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할 그들의 부활과의 사이는 확실히 천년이 될 것이 아닌가?(계 20장 참조)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주의 강림 때에 이뤄진다면 우리 살아남아서 죽음을 보지 않은 자들의 몸의 구속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스도 강림 때에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들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15:51,52). 이것과 부합되는 성령의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려고 한다. 우리가 서신서를 읽어갈 때 사도 시대 당시 여러 곳에서 신자들이 바로 이것을 기다렸던 것을 알게 된다. 영혼의 벌거벗은 상태가 아니고 복된 상태라고 바울이 말했다.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갈라디아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글이므로 이 주제에 관한 기록이 없다. 또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 받아 하늘 처소에 앉히운 교회의 정경을 나타낸 것으로써 물론 교회의 소망에 관한 이 주제에 대해서 말한 것이 없다.
그러나 빌립보서에서는 교회가 복음을 위해 더욱 수고하는 것을 보며 실망한 세상을 뚫고 전진하는 이 복된 소망 외에 다른 것이 나타나 있지 않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21).
초대 신자들의 복된 소망과, 오늘날 심판의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두려워 하는 자들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어머니가 여행갔다 돌아오실 때 창을 통해 내다보며 오래 기다리던 어린 자녀들이 달려가 안기울 그 품은 말할 수 없이 그리운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밖으로 뛰어나가 어머니를 맞아들이지 않는가! 자기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자녀들에게 폭군처럼 위협하는 어머니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땅에 두고 하늘로 떠나실 때 손을 들어서 그들을 전과 같이 축복하셨다. 그분은 그들을 떠나셨지만 떠나가신 그 모양 그대로 돌아오실 것이다. 그분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이 세상에는 무서운 심판자로 오신다.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이여,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을 거룩한 피로 깨끗하게 해주신 그분을 보게 될 것이며 그분의 축복의 손길이 있을 것이다. 당신을 그분의 피로 사서 이제 그분의 것이라고 요청하시는 구주로 오시는 그분을 생각해보라. 수치와 슬픔과 죄많은 당신의 몸이 순식간에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아주 놀라운 순간이다! 당신의 모든 눈물이 씻겨질 것이다.
그분의 얼굴을 대하며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어떠할까? 그분의 얼굴은 그 나무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실 때 괴로움으로 깊이 주름잡혔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당신이 공중으로 끌어올려졌을 때, 당신이 울며 기도하던 버린 자식이 그 자리에 함께 했다면, 가슴이 찢어지도록 이별하는 것이 슬펐던 사랑하던 자가 그곳에 함께 있다면, 아, 그 기쁨은 어떠할까?
세상의 냉랭한 찬서리를 느끼는 믿음의 과부들과 고아들이여, 그때에는 영원히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아, 세상 괴로움은 순간에 지나가며 그분의 임재 가운데 기쁨은 끝이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확실성은 매우 귀한 것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슬프게도 하나님의 교회가 이 복된 소망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우리가 데살로니가전서 1:9,10에서 보는 것처럼 사도 시대에는 이것이 어린 신자들의 즉각적인 소망이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처럼 어린 신자들이(데살로니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일년도 채 되지 않았다) 세상이 변하기를 기다리거나 또는 죽어서 주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하늘로부터의 주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들은 다른 소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세상에 크게 비춰지는 것들, 사람의 수가 늘어나고, 재단이 설립되고, 이른 바 그리스도의 성전이라는 우아한 건물 따위는 사도 바울의 생각에 아예 없었으며, 이것들은 그의 소망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것을 위해서 그는 밤낮 가리지 않고 수고했으며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 하였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 그에게 기쁨의 면류관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리스도의 오심이 실제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분의 오심에 대한 기다리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란다.
거룩한 삶을 위한 가장 힘있는 말씀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하던 사도 바울의 기도였다.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3). 이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사모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사역자의 열망이다. 바울은 밤낮으로 이것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모든 신자들이 그때에 거룩함에 흠이 없이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을 매우 어렵게 생각하며 "아직도 많은 말씀들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릴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로마제국이 재건되야 한다는 것을 들었고, 유대인들이 유대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들었으며, 그 불법의 사람이 예루살렘을 통치하러 나타나야 한다는 것도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이전에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 모든 사건들이 일어난 후에야 주님께서 오시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것이 아직 성취되지도 않았지 않는가?"
나중에 말하려고 하지만 틀림없이 로마제국은 재건된다. 유대인들이 본토로 돌아가게 되며 그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게 된다. 유럽은 어두움에 빠져들어가 다시 귀신들과 우상들을 섬기는 곳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음 말씀을 보면 모든 의문이 해소될 것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5∼17).
이제까지의 구절들은 예언의 진리를 점차적으로 밝힌 것으로 주의 오심의 일반적 의미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자세한 것이 나타나 있다. 사도 바울의 목적은 믿는 자들 가운데서 죽은 누군가로 인해 몹시 슬퍼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3주간 동안 가르침을 받은 어린 신자들이었음을 기억하라(행 17:2).
바울의 전도 방법이란 항상 옛 창조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어린 신자들도 그와 함께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얻었으므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이 충만하였던 것이다(살전 1장 참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갓 신자가 된 이방인들이 육신의 죽음을 보고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분명히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성도들의 부활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쓴 것으로 잠자는 자들이 잃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홀연히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고전 15장 참조).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우리가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차 일어날 어떤 사건보다 먼저 일어날 사건이다. 어느 누구도 잠자는 자와 살아있는 성도가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기 전에 다른 일들이 이뤄져야 한다는 말씀을 단 한 구절이라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예화 하나를 들겠다. 마치 세상이 그리스도를 반역하듯이 로더함 성에 그들의 황제를 반역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자. 이제 그 황제가 그의 전 군대를 이끌고 그 성을 멸하러 간다는 것을 알렸다. 그러나 그 성에는 백명 가량되는 충성스러운 그의 신하들이 있었다. 황제는 그들을 더비에서 영접하겠다고 전해 왔다. 더비에서 황제를 만날 수 있도록 그들을 데리러 온다는 것이며 그후에야 로더함에 있는 원수들을 공격하겠다는 것이다. 황제가 더비로 행차하는 시간은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그 신하들은 어느 때인가는 황제를 만나게 될 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제 그 황제가 실제로 그 성에 들어가기 전에 로더함에는 많은 일들, 참호를 파고, 포대를 쌓는 일 등등이 일어날 것이다.
이와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살해했으며 아직도 여전히 반역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그분의 신하이다. 그리고 그분의 신하들은 모두 그분이 오실 때 공중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나서 심판으로 운명지어진 이 세대에 신원의 날이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자들이 주를 만나기 위해 공중에 끌어 올리운다는 하나님의 영의 말씀대로 교회가 주와 함께 있기 위해 끌어 올리우는 주의 날을 기대해야 한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말한 것이다. 신자의 소망이 공중으로 끌어 올리워지는 것이므로 때와 시기에 관해서는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사실 성경에는 교회가 끌어 올리우는 날짜에 관해서는 말씀하신 일이 없다. 날짜들은 모두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교회가 들림받은 후에 신원의 날이 시작된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끝나고 신원의 날이 시작된다(사 61장 참조). 이것을 알고 있는 바울은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우리는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에게 핍박과 환난이 닥친 것과, 또 사도 바울이 보낸 것처럼 꾸미고 온 거짓 형제들이 "주의 날이 벌써 이르렀다"고 전하여 그들에게 괴로움을 더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사단의 이 궤계로 말미암아 크게 동요한 듯하다.
데살로니가후서는 그 잘못됨과 슬픔에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주의 오심이 그들에게 환난의 날이 되지 않는다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1:7). 이처럼 우리는 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말한 것처럼 신원의 날, 환난받는데서 떠나 공중으로 끌어 올리워서 그들과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시다. 그러나 불꽃 같은 심판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1:8, 9).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1:10).
바울은 더욱 확신케 하려고 이같이 말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2:1,2).
전에 들었던 예화를 다시 생각해 보자. 그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더비에서 그들의 황제를 만나기 위해 로더함에서 불려 나오기 전에 로더함을 공격하려고 포문이 열리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그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큰 혼란이 일어났다고 하자. 그리하여 그 황제의 한 장교가 그들에게 편지하여 이르기를 "황제 폐하의 신하되시는 여러분, 내가 간청하는 것은, 우선 그분의 오심의 확실성과 여러분이 그분과 함께 있게 되는데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황제의 말씀을 믿을 수 없습니까? 여러분이 더비에서 그분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기 전에 포탄은 단 한 발도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할 것이다. 바로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혼란에 떨고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며 확신을 주었던 것이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일어날 두 가지 일이 확실한 바 그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말한 것으로, 주께서 그의 성도들에게 오심과 주를 만나는 그들의 모임인 것이다.
우리가 거리를 거닐 때나 바쁘게 뛰어다니는 군중을 볼 때 믿는 자는 이 순간에라도 공중으로 끌어올리울 수 있고, 믿지 않는 자는 그 신원의 날의 심한 고통 가운데 남게 될 엄청난 차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데살로니가후서 2:3∼12에서 우리는 이 세대의 종말에 일어날 무서운 기사를 본다. "배도하는 일" 또는 배교가 있다. 참 교회가 끌어올리운 후에 그것은 더욱 심할 것이다. 이 배도의 특징이 계시록 13장에 묘사되어 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이 그 하나의 특징이다.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 2:4).
어떤 사람은 이 무서운 인물이 참 교회가 주를 만나려 끌어 올리운 후, 즉 인간 죄악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 불법의 사람을 카톨릭 또는 교황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 불법의 사람이 성전에 앉을 것이라는 구절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산 또는 모리아산―그분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곳―외에 결코 어떤 성전도 세우지 않으셨으며 또 세우지 않으실 것이다. 지금 그 성전은 무너져 있지만 그때에는 재건된다고 성경 여러 곳에 밝혀 놓았다. 그리고 이 무서운 불법의 사람은 분명히 유대인 중 하나이며 그가 그의 백성에게 나타나면 유대인들은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일 것이다(요 5:43 참조).
사단이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듯이 이 불법의 사람 속에 들어갈 것이다. 다니엘은 분명하게 그를 지적하여 마지막 때에 나타날 악한 왕이라고 하였다. "이 왕이 자기 뜻대로 행하며 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 비상한 말로 신들의 신을 대적하며 형통하기를 분노하심이 쉴 때까지 하리니 이는 그 작정된 일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단 11:36). 우리는 교황이 유대 나라 왕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모두 유대인에게 일어날 것이 분명하며 성령과 교회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바울은 그들이 들은 바를 상기시켰다.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는데 그것은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그 누룩이다.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활동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올라가시고 교회가 주를 영접하여 끌어 올리운 후에는 어떻게 될까?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서…." 너무 분명하게 그 악한 자는 교황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주 예수께서 그의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카톨릭과 모든 배교한 교회들이 그 열왕들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된다(계 17장 참조). 그런데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모든 속임으로 임하"는 이 무서운 사건들은 은혜시대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 어두움의 날에 하나님께서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여 저주받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이 은혜의 시대가 끝난 후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세상을 무섭게 흔드실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받을 그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까닭이다. 진리를 받지 않음으로 저주받은 것이다. 이것이 현 세대의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구원받았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2:13). 그 귀한 주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끝맺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3:5).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실제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바울에게는 그것이 언제나 소망의 주제로 나타나 있는 가장 중요한 실제적 진리였다. 그는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때, 이른바 교회가 슬프게도 진리에서 떠나 악하게 될 것을 말한 후에도 염려한 것이 이것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 6:14∼16).
그리고 이어서 소망에 대해 잘못 판단하거나 그것을 버리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마지막 때의 무서운 상황을 조심하라고 권면한 후에도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그 소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바울은 다시 디도에게 이렇게 써서 보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이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불쌍한 죄인으로 비참한 가운데서 발견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그 은혜를 나타내셨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온전한 은혜로 이루어지게 하셨다. 이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도록 가르쳐주고 있다. 또한 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신다(딛 2:13).
사람들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처럼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자들이 기다리는 소망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와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그리스도께서 한번 십자가에서 당신의 죄를 지고 당신에게 내릴 온전한 심판을 받으셨으므로 당신에게는 이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할 수 없는 위안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분의 온전한 속죄를 증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 우리는 이제 살아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다. 의롭다 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와 허물을 다시 기억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죄 때문에 심판받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지 않은 한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아, 이것은 오랫동안 괴로워 하던 영혼에게 주어지는 말할 수 없는 복된 평안이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야 되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과연 그렇다. 그 심판대는 하나님께 가까이 살면 살수록 더욱더, 수욕과 미움을 받은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가장 복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곧 각자의 행함에 따라 상주실 그분의 시상대 앞에 서게 될 가장 복된 것이다.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문제, 그리고 우리에게 내려질 모든 정죄가 그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히 해결되었고,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분이 냉수 한그릇의 호의에도 결코 상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이것은 큰 확신과 인내를 주는 격려이다.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심한 시련과 시험 가운데서 이 복된 소망보다 더 영혼에게 안정과 인내를 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4).
이 귀한 주제가 성경에 온전히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9). 사람들은 장래에 대한 전망이 매우 밝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주 어둡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예언은 불확실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벧후 3:1∼15 참조). 베드로후서 3장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즉 교회보다 더 큰 세계를 본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 모든 말씀에서 밝혀진 한가지 사실은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단지 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이것은 우리의 귀하신 주께서 우리 마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을 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의 소원과 소망이 아닌가? 확실히 이것은 귀하다.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나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그리고 경건치 않은 세상에 있을 심판의 사실에 관해서는 아담의 칠대손 에녹이 예언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유 14,15절). 이것은 얼마나 엄숙한 말씀인가!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이에 대해서 뚜렷하게 나타낸 것 중에서 몇 말씀을 살펴보자.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25).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이 중요한 경고의 말씀을 경히 여기는 세속적인 신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이는 일곱 교회 역사가 흐르는 동안에 있는 교회의 상태에 적당한 경고이며 지금에도 마땅한 말씀들이다.
계시록 4장에는 그 일들이 일어난 후의 일들을 밝혀 놓았다. "이후에 (이것들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계 4:1). 그리하여 4장, 5장에는 구속받은 자들이 세상에서 떠나 영광스러운 어린양의 보좌 둘레에 앉아있는 복된 광경이 펼쳐진다.
6장에서 19장까지는 교회가 끌어 올려 주와 함께 있게 된 후 이 세대의 종말에 관한 성령의 말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크고 무서운 환난의 날이 펼쳐지는 것이다. 땅에는 평화가 없어질 것이다(6:4). 어느 누가 감히 그 두려운 날의 공포를 나타낼 수 있으랴?
전에도 없었고 다시 있을 수도 없는 그 큰 환난의 때에 관하여 선지자들의 한 말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록한 모든 글이 응하는 이 신원의 날의 화들과 심판에 관하여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다른 성경과 온전히 일치하게 이 진노의 날 동안에 유대인에게 되어질 전경(全景)을 다시 한번 새겨보고자 한다.
사단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쫓겨 내려와서 유대의 남은 자들을 핍박한다(계12장). 사단이 로마제국의 머리에게 그의 권세를 주어 자기를 경배하게 한다(13:3∼8). 배교한 교회가 그 로마제국에 재산을 빼앗기고 이제는 그녀의 마지막 참람된 역할을 위해 그 짐승을 타게 된다(17장). 이것은 그 로마제국의 머리로 하여금 마지막 가증한 행위를 하게 한다. 전에는 있었다가 지금은 없는 로마제국이 가장 두려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나타난다. 열(10) 왕들이 그 제국의 머리와 동맹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 제국을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제국에 그 열 왕 또는 열 왕국의 권세를 주기 위함이다. 그 재건된 제국이 잠시 동안 그 음녀(부패한 거짓 교회)를 태우고 가나 배신하여 그때에 있을 열 왕국과 함께 그녀를 던져버린다. "음녀를 미워하며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17:16). 18장에는 그녀가 불타는 것이 가득히 묘사되었다.
4장에서부터 주와 함께 있던 교회가 이제 19장에는 주와 함께 돌아온다. 20장 서두에는 첫째 부활의 순서가 온전히 완성되고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안식에 들어간다. 이 천년시대의 안식이 다하기까지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하며 이 천년시대 동안 이 지상에 약속된 모든 축복이 이루어진다. 사단은 결박되며 죄는 전혀 허용되지 않고 즉시 판단된다. 그리고서 종말에 이르러 사단이 잠시 동안 놓여나면 죽은 자들의 큰 심판이 일어날 것이다(계 20:11∼15). 이 일이 끝난 후 새 하늘과 새 땅의 말할 수 없이 복된 영원세계가 펼쳐진다.
이 중대한 주제를 마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마지막 음성을 들려주려 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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