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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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841회 작성일13-06-21 02:24본문
어린 아이가 그림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것처럼 어린 그리스도인도 구약성경의 표상들, 즉 그림자로 말미암아 거룩한 진리의 온전함과 축복됨을 배우게 된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펴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이끄신 방법의 한 정확한 그림을 보게 된다.
모세(물에서 건짐)가 그처럼 죽음의 강에서 건짐받은 것은, 자기 백성의 살아있는 구원자가 되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주님에 대한 한 그림이다.
바로의 철장 아래 탄식하고 있는 애굽의 종살이의 가혹한 압박으로 멸망하게 된 그 백성(출애굽기 3장을 읽어보라)의 상태를 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출 3:7,8). 이것이 사단의 종의 멍에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가 아닌가? 전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무서운 고통 속에 있다. 인간 사회의 아름다운 외양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비애의 실재가 가득차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사단의 거짓을 믿어 타락한 것은, 아주 행복했던 동산에서 애굽으로 떨어져버린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애와 고통으로 외치는 소리를 들으셨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감격스런 정경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불쌍한 인간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을 때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건져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이 놀라운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정을 끌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들의 종살이의 비애는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게 했다. 출애굽기 2장 끝부분을 읽으면 그들이 고역으로 인해 부르짖고 있으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부르짓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보살피셨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참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들에게 그것을 받을만한 어떤 공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보시고, 하나님이 구원하러 내려오셨던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영혼에 분명하지 아니한가? 하나님이 당신의 탄식 소리를 들으셨던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구원하러 내려오지 아니하셨다면 도대체 그 탄식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때때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나기 오래 전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생각해 본다. 참으로 우리의 구속은 하나님이 온전히 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하셨던 것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안에서 우리를 구하신 것이다. 에베소서 1,2장은 이 복된 주제로 가득차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으로 주어진 구속과 그 은혜를 생각하노라면 영혼은 황홀해진다.
그러면 출애굽기에 있는 그림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4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처럼 긍휼하심과 사랑을 모세에게 나타내셔서 백성을 구출하도록 그를 보냈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을 위해 예비한 이 놀라운 은혜를 무시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가 아론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이 백성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고역으로 탄식할 때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섭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만났던 것같이 하나님의 영이 당신을 만날 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진다.
5장에서 백성의 상태는 더욱 더 악화되어 간다. 그들은 구원받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소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멍에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들은 짚이 없어서 일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5장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오히려 많은 학대로 끝난다. 일깨움을 받은 영혼에게 이같은 경험은 자주 고통이 된다. 벽돌을 만들려 하나 짚이 없다. 선을 행하려 하나 악이 나타난다. 경배하기를 사모하며 율법을 지켜보려고 무척 애쓰나 오히려 고통만 더하고 구원받지는 못한다. 불쌍한 루터도 이 벽돌가마에서 오랫동안 고통했었다.
당신도 거기에 있어 본 적이 있는가? 그때에 당신은 그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생각했던 것같이 생각하지 아니했는가?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칠줄 알고."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 벽돌가마의 괴로움을 잘 묘사해 놓았다. 온전한 구속은 애굽의 벽돌가마에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두라. 그런데 독자가 바로 이런 상태에 있을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복음을 듣고 믿을 것이며, 열심히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할 것이며, 죄와 사단의 멍에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새 성품을 사모하는 것인지 모르나 아직 당신은 그 온전한 구속을 깨닫지 못한 상태이다.
당신은 말하리라. "나는 마치 그 백성이 짚이 없었던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할 힘이 없다. 그들이 짚을 얻지 못한 것처럼 나도 힘이 없는데 사단은 율법의 무거운 과제를 내놓으며 그것을 이루라고 한다." 바로의 간역자들은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자들과 동일하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너희가 벽돌은 여수히 바칠지니라."
"이제 가서 일하라.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서는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이 두 문장의 내용은 너무나 동일하다!
백성이 그 벽돌가마의 가혹한 고역 아래 있을 동안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위안을 주지 못했다(6장). 2장 1∼8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말씀을 읽어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너희를 빼어내며, 내가 너희를 구속하여, 내가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그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나는 여호와라." 그 벽돌 가마의 고역 아래 있을 동안 이 귀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은 전혀 위안을 주지 못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들이 마음이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여러분이 살아난 영혼으로서 아직 그 율법의 멍에 아래 있다면 조만간 이것이 확실히 당신의 경험이 될 것이다. 당신은 말하리라. "참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은 귀하지만 나는 내 과업을 이룰 수 없다. 나는 율법을 지키려고 무척 애쓰지만 나는 항상 실패한다." 아, 영혼이 항상 율법 아래서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는 동안은 모두가 실패요 죄이며 마음의 괴로움과 가혹한 고역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처럼 자기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이 이것은 그 온전한 구원을 알지 못한데서 나오는 것임이 확실하다. 사랑하는 어린 그리스도인이여, 우리는 애굽의 그 벽돌공들처럼 율법 아래서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므로 서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죄를 사하여 주신 살아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압제자에 대한 심판으로 애굽에 재앙들을 내려 그분의 능력을 보였으나 백성들은 구원얻지 못했다. 이것은 계시록에서 다시 행해질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심각한 광경들이다. 그날에 하나님의 백성을 누르던 교만한 압제자들도 부서질 것이다.
주의 능력의 크심이 애굽에 보여졌는데도 한 영혼도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동일한 것을 보게 된다. 그분의 생애의 사역은 찬양할만하고, 그 이적들은 크고, 그분의 가르침은 신령하고, 그분의 생애가 거룩할지라도, 그분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지 아니하셨다면 아담의 자손은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구속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애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보았고 그분의 귀하신 약속들을 들었고 원수에게 행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목도했다. 3장부터 11장까지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어린양의 피가 뿌려지기까지는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 표상들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주 명확하게 들어난다.
출애굽기 12장, 깊은 뜻이 포함된 이 장을 잘 생각해 보라. 성령께서 당신의 영혼을 축복하여 당신에게 새로운 달의 시작이 되게 하시기를 바란다. 많은 장성한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이 나타내는 온전한 구속을 깨닫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12장에서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볼 수 없는 눈은 소경임에 틀림없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흠없고 일년된 어린양을 그달 14일까지 간직하였다가 온 회중이 그 양을 잡았던 것같이 우리 예수님께서도 흠없는 어린양으로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셨던 것이다. 바로 그 유월절 날 밤에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이처럼 원했던 것이 또 있었을까?
그 어린양의 피가 집 문설주에 뿌려져야 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셨다.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출 12:13). 하나님은 하신 말씀을 지키신다. 그 밤에 피에 관한 그분의 말씀을 따라 믿고 행한 사람은 하나도 멸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에 대하여 보시는 바를 생각해보라. 당신이 보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의 가치에 관한 생각들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한번 피흘리신 예수님을 일으키시어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하셨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치에 대하여 보시는 바를 알게 하는 해답이다. 수천만의 구속받은 자들에게 영원토록 흘러내리게 하는 무한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주신 권리인 것이다.
사랑의 증거인 어린양의 피는 실로 놀라웁다!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의를 아주 밝게 나타내는 반면 또한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도 아주 무섭게 나타냈다. 이는 불쌍한 죄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증거이다. 그분의 의가 끝까지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그분의 사랑이 아주 충만하게 우리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집들의 문설주는 피가 뿌려졌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까닭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 피뿌린 집들에 거하는 모든 남녀와 어린 아이들을 구원하셨는가? 그분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까닭이었다.
이제 그 피뿌린 문설주로 가보자. 그 문설주에 발린 피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그 피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고 선언한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십자가로 가까이 가서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아보라. 영원토록 배워도 결코 온전히 배울 수 없는 복된 교훈들이다. 어찌하여 그 거룩하신 분이 그처럼 죽으셔야 했는가? 어찌하여 그분의 손과 발이 찔리셔야 했는가? 그분을 사랑하던 자들은 도망하고 그분을 미워하던 자들은 그분 주위에서 이를 갈았다. 어찌하여 세 시간 동안이나 하늘이 어두었는가? 어찌하여 하나님이 그분을 버리셨는가? 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셔야 했는가? 하나님이 버리신 그 어두움의 시간에 예수님은 구속의 댓가를 온전히 치루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그처럼 죽으셨다. 나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과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느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실 때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로 전가(轉嫁)될 수 없었다면, 그분의 보혈로 처리되지 않았다면 그 죄는 반드시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쌍한 죄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증거이다. 이 증거 안에서 내 영혼은 영원히 안식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애굽의 모든 첫태생이 죽임을 당하는 바로 그 유월절 밤이 오기 전에는 히브리인 중에 한 사람도 애굽에서 구원받지 못했지만 그 밤이 지나간 후에는 그들 중 한 사람도 그 종살이에 남겨지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지 않는가! 구원을 위해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중대한 진리이다. 그러나 죽음이 이스라엘의 어린양, 그 대리자에게 내려졌고, 또한 애굽의 첫태생에게 내려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과 심판이 저와 여러분의 대속자이신 하나님의 어린양에게 내려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죽음과 영원한 진노가 영원히 우리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피가 문설주에 뿌려졌고, 주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
구속의 교훈을 온전히 깨닫도록 출애굽기 14장을 읽어보자. 사단의 최후 노력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제 그들 앞은 홍해가 가로 막았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 오고 있다. 그 백성은 몹시 두려워 하였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그날 주께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하셨다. 바다 물이 갈라져서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육지 같이 지났던 것이다. 그들은 그 바다에서 구원되었으나 그들을 쫓아오던 원수들은 다 그 바다에 빠져 죽었다. 히브리 사람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았으나 애굽 사람은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참으로 놀라운 구원이다! 어찌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으랴. 이제는 채찍질과 심한 압제가 있는 애굽의 종살이인 벽돌구이가 아니다. 그 바닷가에서 죽은 애굽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보았을 때 그 광경은 어떠했을까? 이것은 우리의 구속을 예표한 완벽한 그림인데 그 실재야 어떠하겠는가?
공포에 떨고 있는 불쌍한 영혼이 처음 구속의 가치를 배울 때, 줄곧 뒤쫓은 사단과 죄의 온갖 세력과 죽음의 파도소리로 인해 매우 두려워한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창시자에게도 이르렀는데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에 이 세상 임금이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운 포효로 그분 앞에 왔을 때 피할 길이 없었다. 아아, 그분에게는 마른 땅으로 지날 길이 없었다. 사단이 온갖 힘을 다해 사람들의 극도의 미움과 분노를 그분에게 쏟게 했다. 애굽 군대의 위협은 우리의 모든 죄가 그분에게 지워졌던 그 무서운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에게 내려졌던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운 파도가 그분의 영혼을 휩쓸고 지나갔다.
어찌하여 이 포효하는 죽음의 파도가 그분의 영혼을 휩쓸고 지나갔는가? 어린 그리스도인이여, 이것은 우리의 범죄 때문에 우리에게 쏟아질 죽음과 심판이 그분에게 쏟아진 것이다. 그분이 가혹한 종살이의 이 애굽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려" 하신 것이다. 그분의 구원은 온전하다. 찬양받으실 구원자시여! 그분은 우리의 죄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으셨다. 애굽 사람들이 죽어 바닷가에 엎드러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죽음에서 당당히 살아난 것처럼 우리를 억압하고 심판 가운데로 끌고 가던 죄는 그곳에 엎드러졌다. 더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주께서는 우리 죄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셨다(히 10장 참조). 홍해가 바로와 그의 군대를 멸했던 것 같이 예수님이 친히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세력을 가진 사단을 멸하셨다.
이제 조용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참으로 깨달으라.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께로 이끌리어 간 이스라엘은 비록 그들이 광야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전히 새로운 위치였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배워야할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모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온전한 구원을 노래하는 놀라운 구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여러번 읽어보라. 이것이 과연 당신의 마음에서 울려나는 노래인가? 당신은 이같이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서 즐거워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이 복된 역사를 깨달았는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이 당신을 이처럼 은혜의 자녀의 신분으로 바꾸어놓지 않았는가? 당신이 거룩한 대속자에게로 이끌려 갔을 때 죄와 사단의 세력이 멸망당한 것이 아닌가? 분명 이스라엘이 홍해를 바라보고 그들의 원수의 시체들을 보면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았으면 하고 소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면서 구원받았으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온전히 이루어진 역사이다. 그들이 부른 노래를 들어보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구원이시로다." 참으로 구절 구절마다 확신과 기쁨에 넘쳐 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나오는 말도 이와같이 확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노라"(골 1:12∼14).
홍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갈라놓았다. 그와 같이 이스라엘은 애굽에 대해 죽었으며 애굽 역시 그들에 대해 죽었다. 당신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하여 죽었는가? 그리고 세상이 당신에게 대해 죽었는가? 바로의 군대 중 하나라도 남아서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에게 돌을 던지지 못했다. 당신은 어떤 죄도 당신을 정죄할 수 없도록, 그리스도의 피가 그처럼 가치있고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는가?
그것은 당신을 하늘에서 갈라놓은 죽음이 아니다. 영원히 세상과 죄와 그리고 사단에게서 갈라놓은 그 좁고 어둡고 깊은 죽음의 시내였던 것이다. 참으로 죽음과 심판, 죄와 사단, 세상 모두가 지나간 것이다. 이스라엘이 홍해의 이편 가나안에서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도 십자가의 이편 하늘에서 노래 부르게 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 복된 위치이다. 어떤 자는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당신이 한 말을 모두 믿는다. 그러나 아직도 이전과 같이 기쁘지 않다."
그렇다면 당신을 기쁘지 않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이 당신의 영혼에게 평강을 일러주셨을 때 당신은 그리스도에 관한 생각이 충만했었고 이것이 당신을 즐겁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아마 자신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당신을 덜 즐겁게 하는 원인이 아닌가? 그러면 다시 율법의 멍에 아래 놓인 것이 아닌가? 이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평강의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은 없다. 당신은 아마 구원을 위해서 율법 아래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율법 아래 있다면 곧 벽돌을 만들고 있는 가혹한 종살이에 있는, 즉 애굽에서 벽돌을 만들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생활의 규범으로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평강을 누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애굽에서의 구원은 히브리인을 벽돌가마의 종살이에서의 온전한 구원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유대인까지라도 그 율법에서 구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한가지 분명한 목적은 그들을 율법에서 구속하려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에게 말한 것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 13). 또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갈 4:4,5).
구속이란 죄와 저주에서뿐만 아니라 율법에서도 구원받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서 이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아보라. 6장에서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말하며 7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도 죽은 자라고 하였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또는 "율법에서 구속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벽돌가마의 예화는 그 문제를 분명히 알게 해준다. 히브리인 노예는 그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해야할 책임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고역이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도 이와 똑같은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그 위치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출 19장).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나 사람은 죄 아래 팔려 있는 잃어버린 육신의 사람인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 죄가 그와 함께 나타난다. 그가 이런 상황에 있으면 그는 고달픈 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자기가 미워하는 것을 하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말하리라. "이것이 분명 `나'라는 것인가?" 확실히 그렇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 모두가 그런 것이다.
그러면 "율법이 생활의 규범이 아니면 거룩한 순종의 원리는 무엇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이 글에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오직 거룩한 순종의 원리가 율법의 멍에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에게 옳은 것을 말해주나 그렇게 행할 능력은 주지 못한다. 다만 그가 행하는 것이 바르지 않다고 그를 정죄하는 것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 온전히 구속받는 것이다. 그들이 한번 애굽에서 구원된 것은 그 가혹한 종살이에서 온전히 구원된 것이며 그와 같이 우리도 죄와 그리고 죽음과 율법에서 온전히 구원받은 것이다.
더욱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았지만 (죄와 죽음이 율법 있이 범죄한 자나 율법 없이 범죄한 자 모두에게 임했으므로) 온전히 파괴되었던 옛 상태에서 구속함을 받아서 이제는 모든 인간의 책임에서 떠난 온전한 새 원리에 있는 하나님께로 데려간 자이다. 이제 죄의 종살이에 얽매인 자가 아니고 새 성품을 가진 하나님께로 난 하나님의 자녀이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다른 모든 것보다 더욱 온전히 알아야 할 구속의 또 한가지 특성은 곧 영원하신 구속이라는 것이다.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히 9:12).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속을 받은 우리 신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어느 누가 죄와 죽음과 정죄에서 그처럼 영원히 구원된 것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으랴? 나의 옛 자아는 죽었고, 그 옛 상태는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 어린 그리스도인이여, "영원한 구속"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보라. 당신의 모든 죄는 영원히 도말된 것이다. 죽음, 그 십자가의 죽음이 그 모든 것을 마감한 것이다. 소망은 이제 우리가 얻은 영원한 구속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안식이 주어진다. 애굽에서의 온전한 구속은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일 또는 쉬임을 알게 했다. 우리는 에덴 동산에 안식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 안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인에게는 안식이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구속은 영원한 안식을 준다. 아무것도 그 가치를 더하거나 덜 할 수 없다. 독자여,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허락하신 무한한 축복의 자리가 아닌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귀한 말씀을 살펴보도록 우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바란다. 다른 어떤 것도 당신의 필요를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
모세(물에서 건짐)가 그처럼 죽음의 강에서 건짐받은 것은, 자기 백성의 살아있는 구원자가 되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주님에 대한 한 그림이다.
바로의 철장 아래 탄식하고 있는 애굽의 종살이의 가혹한 압박으로 멸망하게 된 그 백성(출애굽기 3장을 읽어보라)의 상태를 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출 3:7,8). 이것이 사단의 종의 멍에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가 아닌가? 전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무서운 고통 속에 있다. 인간 사회의 아름다운 외양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비애의 실재가 가득차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사단의 거짓을 믿어 타락한 것은, 아주 행복했던 동산에서 애굽으로 떨어져버린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애와 고통으로 외치는 소리를 들으셨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감격스런 정경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불쌍한 인간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을 때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건져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이 놀라운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정을 끌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들의 종살이의 비애는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게 했다. 출애굽기 2장 끝부분을 읽으면 그들이 고역으로 인해 부르짖고 있으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부르짓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보살피셨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참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들에게 그것을 받을만한 어떤 공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보시고, 하나님이 구원하러 내려오셨던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영혼에 분명하지 아니한가? 하나님이 당신의 탄식 소리를 들으셨던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구원하러 내려오지 아니하셨다면 도대체 그 탄식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때때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나기 오래 전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생각해 본다. 참으로 우리의 구속은 하나님이 온전히 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하셨던 것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안에서 우리를 구하신 것이다. 에베소서 1,2장은 이 복된 주제로 가득차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으로 주어진 구속과 그 은혜를 생각하노라면 영혼은 황홀해진다.
그러면 출애굽기에 있는 그림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4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처럼 긍휼하심과 사랑을 모세에게 나타내셔서 백성을 구출하도록 그를 보냈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을 위해 예비한 이 놀라운 은혜를 무시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가 아론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이 백성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고역으로 탄식할 때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섭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만났던 것같이 하나님의 영이 당신을 만날 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진다.
5장에서 백성의 상태는 더욱 더 악화되어 간다. 그들은 구원받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소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멍에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들은 짚이 없어서 일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5장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오히려 많은 학대로 끝난다. 일깨움을 받은 영혼에게 이같은 경험은 자주 고통이 된다. 벽돌을 만들려 하나 짚이 없다. 선을 행하려 하나 악이 나타난다. 경배하기를 사모하며 율법을 지켜보려고 무척 애쓰나 오히려 고통만 더하고 구원받지는 못한다. 불쌍한 루터도 이 벽돌가마에서 오랫동안 고통했었다.
당신도 거기에 있어 본 적이 있는가? 그때에 당신은 그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생각했던 것같이 생각하지 아니했는가?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칠줄 알고."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 벽돌가마의 괴로움을 잘 묘사해 놓았다. 온전한 구속은 애굽의 벽돌가마에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두라. 그런데 독자가 바로 이런 상태에 있을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복음을 듣고 믿을 것이며, 열심히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할 것이며, 죄와 사단의 멍에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새 성품을 사모하는 것인지 모르나 아직 당신은 그 온전한 구속을 깨닫지 못한 상태이다.
당신은 말하리라. "나는 마치 그 백성이 짚이 없었던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할 힘이 없다. 그들이 짚을 얻지 못한 것처럼 나도 힘이 없는데 사단은 율법의 무거운 과제를 내놓으며 그것을 이루라고 한다." 바로의 간역자들은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자들과 동일하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너희가 벽돌은 여수히 바칠지니라."
"이제 가서 일하라.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서는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이 두 문장의 내용은 너무나 동일하다!
백성이 그 벽돌가마의 가혹한 고역 아래 있을 동안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위안을 주지 못했다(6장). 2장 1∼8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말씀을 읽어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너희를 빼어내며, 내가 너희를 구속하여, 내가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그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나는 여호와라." 그 벽돌 가마의 고역 아래 있을 동안 이 귀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은 전혀 위안을 주지 못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들이 마음이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여러분이 살아난 영혼으로서 아직 그 율법의 멍에 아래 있다면 조만간 이것이 확실히 당신의 경험이 될 것이다. 당신은 말하리라. "참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은 귀하지만 나는 내 과업을 이룰 수 없다. 나는 율법을 지키려고 무척 애쓰지만 나는 항상 실패한다." 아, 영혼이 항상 율법 아래서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는 동안은 모두가 실패요 죄이며 마음의 괴로움과 가혹한 고역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처럼 자기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이 이것은 그 온전한 구원을 알지 못한데서 나오는 것임이 확실하다. 사랑하는 어린 그리스도인이여, 우리는 애굽의 그 벽돌공들처럼 율법 아래서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므로 서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죄를 사하여 주신 살아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압제자에 대한 심판으로 애굽에 재앙들을 내려 그분의 능력을 보였으나 백성들은 구원얻지 못했다. 이것은 계시록에서 다시 행해질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심각한 광경들이다. 그날에 하나님의 백성을 누르던 교만한 압제자들도 부서질 것이다.
주의 능력의 크심이 애굽에 보여졌는데도 한 영혼도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동일한 것을 보게 된다. 그분의 생애의 사역은 찬양할만하고, 그 이적들은 크고, 그분의 가르침은 신령하고, 그분의 생애가 거룩할지라도, 그분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지 아니하셨다면 아담의 자손은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구속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애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보았고 그분의 귀하신 약속들을 들었고 원수에게 행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목도했다. 3장부터 11장까지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어린양의 피가 뿌려지기까지는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 표상들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주 명확하게 들어난다.
출애굽기 12장, 깊은 뜻이 포함된 이 장을 잘 생각해 보라. 성령께서 당신의 영혼을 축복하여 당신에게 새로운 달의 시작이 되게 하시기를 바란다. 많은 장성한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이 나타내는 온전한 구속을 깨닫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12장에서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볼 수 없는 눈은 소경임에 틀림없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흠없고 일년된 어린양을 그달 14일까지 간직하였다가 온 회중이 그 양을 잡았던 것같이 우리 예수님께서도 흠없는 어린양으로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셨던 것이다. 바로 그 유월절 날 밤에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이처럼 원했던 것이 또 있었을까?
그 어린양의 피가 집 문설주에 뿌려져야 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셨다.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출 12:13). 하나님은 하신 말씀을 지키신다. 그 밤에 피에 관한 그분의 말씀을 따라 믿고 행한 사람은 하나도 멸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에 대하여 보시는 바를 생각해보라. 당신이 보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의 가치에 관한 생각들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한번 피흘리신 예수님을 일으키시어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하셨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치에 대하여 보시는 바를 알게 하는 해답이다. 수천만의 구속받은 자들에게 영원토록 흘러내리게 하는 무한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주신 권리인 것이다.
사랑의 증거인 어린양의 피는 실로 놀라웁다!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의를 아주 밝게 나타내는 반면 또한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도 아주 무섭게 나타냈다. 이는 불쌍한 죄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증거이다. 그분의 의가 끝까지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그분의 사랑이 아주 충만하게 우리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집들의 문설주는 피가 뿌려졌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까닭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 피뿌린 집들에 거하는 모든 남녀와 어린 아이들을 구원하셨는가? 그분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까닭이었다.
이제 그 피뿌린 문설주로 가보자. 그 문설주에 발린 피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그 피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고 선언한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십자가로 가까이 가서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아보라. 영원토록 배워도 결코 온전히 배울 수 없는 복된 교훈들이다. 어찌하여 그 거룩하신 분이 그처럼 죽으셔야 했는가? 어찌하여 그분의 손과 발이 찔리셔야 했는가? 그분을 사랑하던 자들은 도망하고 그분을 미워하던 자들은 그분 주위에서 이를 갈았다. 어찌하여 세 시간 동안이나 하늘이 어두었는가? 어찌하여 하나님이 그분을 버리셨는가? 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셔야 했는가? 하나님이 버리신 그 어두움의 시간에 예수님은 구속의 댓가를 온전히 치루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그처럼 죽으셨다. 나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과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느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실 때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로 전가(轉嫁)될 수 없었다면, 그분의 보혈로 처리되지 않았다면 그 죄는 반드시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쌍한 죄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증거이다. 이 증거 안에서 내 영혼은 영원히 안식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애굽의 모든 첫태생이 죽임을 당하는 바로 그 유월절 밤이 오기 전에는 히브리인 중에 한 사람도 애굽에서 구원받지 못했지만 그 밤이 지나간 후에는 그들 중 한 사람도 그 종살이에 남겨지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지 않는가! 구원을 위해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중대한 진리이다. 그러나 죽음이 이스라엘의 어린양, 그 대리자에게 내려졌고, 또한 애굽의 첫태생에게 내려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과 심판이 저와 여러분의 대속자이신 하나님의 어린양에게 내려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죽음과 영원한 진노가 영원히 우리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피가 문설주에 뿌려졌고, 주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
구속의 교훈을 온전히 깨닫도록 출애굽기 14장을 읽어보자. 사단의 최후 노력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제 그들 앞은 홍해가 가로 막았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 오고 있다. 그 백성은 몹시 두려워 하였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그날 주께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하셨다. 바다 물이 갈라져서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육지 같이 지났던 것이다. 그들은 그 바다에서 구원되었으나 그들을 쫓아오던 원수들은 다 그 바다에 빠져 죽었다. 히브리 사람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았으나 애굽 사람은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참으로 놀라운 구원이다! 어찌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으랴. 이제는 채찍질과 심한 압제가 있는 애굽의 종살이인 벽돌구이가 아니다. 그 바닷가에서 죽은 애굽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보았을 때 그 광경은 어떠했을까? 이것은 우리의 구속을 예표한 완벽한 그림인데 그 실재야 어떠하겠는가?
공포에 떨고 있는 불쌍한 영혼이 처음 구속의 가치를 배울 때, 줄곧 뒤쫓은 사단과 죄의 온갖 세력과 죽음의 파도소리로 인해 매우 두려워한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창시자에게도 이르렀는데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에 이 세상 임금이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운 포효로 그분 앞에 왔을 때 피할 길이 없었다. 아아, 그분에게는 마른 땅으로 지날 길이 없었다. 사단이 온갖 힘을 다해 사람들의 극도의 미움과 분노를 그분에게 쏟게 했다. 애굽 군대의 위협은 우리의 모든 죄가 그분에게 지워졌던 그 무서운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에게 내려졌던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운 파도가 그분의 영혼을 휩쓸고 지나갔다.
어찌하여 이 포효하는 죽음의 파도가 그분의 영혼을 휩쓸고 지나갔는가? 어린 그리스도인이여, 이것은 우리의 범죄 때문에 우리에게 쏟아질 죽음과 심판이 그분에게 쏟아진 것이다. 그분이 가혹한 종살이의 이 애굽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려" 하신 것이다. 그분의 구원은 온전하다. 찬양받으실 구원자시여! 그분은 우리의 죄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으셨다. 애굽 사람들이 죽어 바닷가에 엎드러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죽음에서 당당히 살아난 것처럼 우리를 억압하고 심판 가운데로 끌고 가던 죄는 그곳에 엎드러졌다. 더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주께서는 우리 죄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셨다(히 10장 참조). 홍해가 바로와 그의 군대를 멸했던 것 같이 예수님이 친히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세력을 가진 사단을 멸하셨다.
이제 조용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참으로 깨달으라.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께로 이끌리어 간 이스라엘은 비록 그들이 광야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전히 새로운 위치였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배워야할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모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온전한 구원을 노래하는 놀라운 구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여러번 읽어보라. 이것이 과연 당신의 마음에서 울려나는 노래인가? 당신은 이같이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서 즐거워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이 복된 역사를 깨달았는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이 당신을 이처럼 은혜의 자녀의 신분으로 바꾸어놓지 않았는가? 당신이 거룩한 대속자에게로 이끌려 갔을 때 죄와 사단의 세력이 멸망당한 것이 아닌가? 분명 이스라엘이 홍해를 바라보고 그들의 원수의 시체들을 보면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았으면 하고 소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면서 구원받았으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온전히 이루어진 역사이다. 그들이 부른 노래를 들어보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구원이시로다." 참으로 구절 구절마다 확신과 기쁨에 넘쳐 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나오는 말도 이와같이 확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노라"(골 1:12∼14).
홍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갈라놓았다. 그와 같이 이스라엘은 애굽에 대해 죽었으며 애굽 역시 그들에 대해 죽었다. 당신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하여 죽었는가? 그리고 세상이 당신에게 대해 죽었는가? 바로의 군대 중 하나라도 남아서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에게 돌을 던지지 못했다. 당신은 어떤 죄도 당신을 정죄할 수 없도록, 그리스도의 피가 그처럼 가치있고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는가?
그것은 당신을 하늘에서 갈라놓은 죽음이 아니다. 영원히 세상과 죄와 그리고 사단에게서 갈라놓은 그 좁고 어둡고 깊은 죽음의 시내였던 것이다. 참으로 죽음과 심판, 죄와 사단, 세상 모두가 지나간 것이다. 이스라엘이 홍해의 이편 가나안에서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도 십자가의 이편 하늘에서 노래 부르게 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 복된 위치이다. 어떤 자는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당신이 한 말을 모두 믿는다. 그러나 아직도 이전과 같이 기쁘지 않다."
그렇다면 당신을 기쁘지 않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이 당신의 영혼에게 평강을 일러주셨을 때 당신은 그리스도에 관한 생각이 충만했었고 이것이 당신을 즐겁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아마 자신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당신을 덜 즐겁게 하는 원인이 아닌가? 그러면 다시 율법의 멍에 아래 놓인 것이 아닌가? 이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평강의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은 없다. 당신은 아마 구원을 위해서 율법 아래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율법 아래 있다면 곧 벽돌을 만들고 있는 가혹한 종살이에 있는, 즉 애굽에서 벽돌을 만들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생활의 규범으로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평강을 누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애굽에서의 구원은 히브리인을 벽돌가마의 종살이에서의 온전한 구원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유대인까지라도 그 율법에서 구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한가지 분명한 목적은 그들을 율법에서 구속하려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에게 말한 것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 13). 또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갈 4:4,5).
구속이란 죄와 저주에서뿐만 아니라 율법에서도 구원받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서 이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아보라. 6장에서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말하며 7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도 죽은 자라고 하였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또는 "율법에서 구속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벽돌가마의 예화는 그 문제를 분명히 알게 해준다. 히브리인 노예는 그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해야할 책임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고역이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도 이와 똑같은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그 위치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출 19장).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나 사람은 죄 아래 팔려 있는 잃어버린 육신의 사람인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 죄가 그와 함께 나타난다. 그가 이런 상황에 있으면 그는 고달픈 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자기가 미워하는 것을 하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말하리라. "이것이 분명 `나'라는 것인가?" 확실히 그렇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 모두가 그런 것이다.
그러면 "율법이 생활의 규범이 아니면 거룩한 순종의 원리는 무엇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이 글에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오직 거룩한 순종의 원리가 율법의 멍에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에게 옳은 것을 말해주나 그렇게 행할 능력은 주지 못한다. 다만 그가 행하는 것이 바르지 않다고 그를 정죄하는 것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 온전히 구속받는 것이다. 그들이 한번 애굽에서 구원된 것은 그 가혹한 종살이에서 온전히 구원된 것이며 그와 같이 우리도 죄와 그리고 죽음과 율법에서 온전히 구원받은 것이다.
더욱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았지만 (죄와 죽음이 율법 있이 범죄한 자나 율법 없이 범죄한 자 모두에게 임했으므로) 온전히 파괴되었던 옛 상태에서 구속함을 받아서 이제는 모든 인간의 책임에서 떠난 온전한 새 원리에 있는 하나님께로 데려간 자이다. 이제 죄의 종살이에 얽매인 자가 아니고 새 성품을 가진 하나님께로 난 하나님의 자녀이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다른 모든 것보다 더욱 온전히 알아야 할 구속의 또 한가지 특성은 곧 영원하신 구속이라는 것이다.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히 9:12).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속을 받은 우리 신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어느 누가 죄와 죽음과 정죄에서 그처럼 영원히 구원된 것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으랴? 나의 옛 자아는 죽었고, 그 옛 상태는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 어린 그리스도인이여, "영원한 구속"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보라. 당신의 모든 죄는 영원히 도말된 것이다. 죽음, 그 십자가의 죽음이 그 모든 것을 마감한 것이다. 소망은 이제 우리가 얻은 영원한 구속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안식이 주어진다. 애굽에서의 온전한 구속은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일 또는 쉬임을 알게 했다. 우리는 에덴 동산에 안식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 안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인에게는 안식이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구속은 영원한 안식을 준다. 아무것도 그 가치를 더하거나 덜 할 수 없다. 독자여,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허락하신 무한한 축복의 자리가 아닌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귀한 말씀을 살펴보도록 우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바란다. 다른 어떤 것도 당신의 필요를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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