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차전도여행지외 19. 고린도 (Cori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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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5,803회 작성일15-12-24 21:04본문
<고린도로 가는 도로와 이정표>
<옛 고린도의 유적지>
“(1)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 (11)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행18:1-11)
현재 지명을 '코린트'(Corinth)라고 불리우는 성경의 고린도는 아테네에서 남서쪽으로 약 87km에 위치해 있으며, 그리스 대륙과 필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길목인 지협 남단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고, 국제적 상업의 중심지로 아테네를 능가할 만큼 발전했다. 배를 만들 정도로 번창한 항구도시로써 물질적 풍요를 누렸지만, 그에 반해 심한 빈부격차와 퇴폐문화라는 그늘진 요소도 있었다. 고린도는 지형적으로 샘이 많아 농작물(오렌지, 올리브)이 잘되고, 흙이 좋아 질그릇업이 발달했다. 당시 청동거울은 가장 사치품중의 하나였다.
고린도는 B.C.146년에 로마의 뭄미우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가 약100년이 지난 B.C.46년 율리우스 시저에 의해 재건되어 로마인들이 이주하여 산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다. 그 후 B.C.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고, 아가야 지방을 관할하는 로마 총독의 본부를 두었다. BC 41-19년에 로마로부터 추방된 유대인들이 고린도에서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게 되었고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한 고장중의 하나였다(약 25,000명, 회당 있었음), 고린도는 번성할 때 2만명이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야외 경기장이 있었고, 이곳에서 고대 운동경기 등이 치루어졌다.
사도바울은 글라우디오 로마 황제때에 아테네를 떠나 혼자 이곳 고린도를 방문하였는데, 이때는 갈리오(Gallio)가 로마 총독으로 부임한 시기였다(AD 51-52년). 후에 실라와 디모데는 마케도니아에서 와서 합류하였다. 이들은 황제의 칙령에 의해 로마로부터 추방되어 왔고, 천막제조업을 하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살았으며 바울은 안식일마다 유대교 회당에서 강론하며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다(행18:1-5). 사도 바울이 약 1년 6개월에 걸쳐 복음을 전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그에게 적대감을 갖고 바울을 갈리오 총독에게 데리고 가 재판을 요구하였다(행18:11-17). 하지만 당시 총독이었던 갈리오는 이를 거절하고 법정(BEMA, 재판석)에서 물러가도록 했다. 이 후에 겐그레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로 건너갔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갈등과 도덕적인 문제로 수많은 훼방과 어려움을 겼었으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기초를 세웠으며, AD 52년경에는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도 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 3차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3년간 머물면서 써서 보낸 편지이다(고전16:8). 이후 고린도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고 교회를 어지럽혔고, 이에 다급하고 비통한 마음에 격약된 어조로 고린도후서를 써서 보냈다. 로마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잠시 들렸을 때 기록하여 고린도의 동항(East Port)이었던 겐그레아에 살던 여집사 뵈뵈를 통하여 로마로 보내졌다(롬16:1-2,).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사랑이 많은 교회였지만 2% 부족했다(고전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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