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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편

성서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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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왕위에 오른 것으로 시작된 로마 제국은 그 뒤 아프리카 북부는 물론 중동과 영국에까지 손을 뻗치는 큰 제국을 이루었다. 15세기에는 높아진 시민 의식과 귀족들의 비호로 르네상스를 발원시켰으며 르네상스의 화려한 꽃을 피웠다. 5세기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국토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로마는 이태리(Italy)의 수도이다. 고대부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육지, 수상교통의 중심지로 로마를 기점으로 이태리의 모든 교통이 발달되어 있다. 이태리의 면적은 301,230㎢ 이며, 남북한의 1.4배이다. 기후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이다. 종교는 4세기 말,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세계 종교로 전파시켰고, 98%가 카돌릭이다. 철저한 종교인이자 세속인으로 통한다. 북부와 남주의 지역감정이 심하다. 이태리의 로마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지이며, 피의 흔적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1861년에야 카볼과 가리발디에 의해 통일되었다.

6. 피의 흔적 콜로세움 (Colos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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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149회 작성일15-12-24 22:23

본문

<공중에서 본 콜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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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의 내부>


콜로세움 자리는 네로 황제 당시 인공연못이었다. 폭군이 죽자 타원형 건물이 계획되었다. 전쟁 포로인 수많은 히브리(유대인)인들이 동원되어, A.D.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궁전의 뜰에 있었던 인공연못에 공사가 시작되어 A.D.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완공한 대형 원형투기장 겸 극장이 콜로세움이다. 보이는 사진 중 ‘공중에서 본 콜로세움’은 주변 건물들과 비교하면 그 크기가 짐작된다.

 

길이가 187m나 되고, 80개 정도가 되는 출구에 5만여명의 관중을 수용할수 있었던 이 경기장은 검투사 시합, 맹수 사냥시합, 바닥에 물을 채우고 모의해전 등을 즐겼다. 운동장의 지하는 사자와 검투사가 대기하던 장소였고 도르래를 타고 올라왔다고 한다. 네로 통치시대를 영화로 한 영화 ‘퀘바디스’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박해장소로 사용된 콜롯세움 장면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네로황제가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콜로세움은 네로가 죽은 후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이 세워진 이후 무려 300여년 동안 이곳에서 크리스챤들이 맹수의 먹이로 죽어갔다. 그 피비린내 나는 처참한 역사는 405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하면서 끝이 나게 된다.

 

박해 당시 평민이나 노예 계층이 대부분이었고 귀족층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콜로세움에서 사자밥이 되어 죽어가면서도 찬송을 부르며 환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저들을 보고, 귀족들은 의문을 품게되었고 전도자를 통해 말씀을 듣게되어 그리스도인이 되는 귀족층이 조금씩 늘어났다고 한다. 믿는 귀족들은 몰래 카타콤베 성도들을 빵과 입을 것을 갖다 주었다고 한다. 이러다 들키면 죽게 되었고 카타콤베에 묻히게 되었다. 당시는 크리스챤이란 신분이 밝혀지면 3대를 멸하였다고 한다.

 

“죽도록 충성하라”란 말속에는 싸움이 있다는 뜻이 있다. 싸우는 것은 이기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약속하신다. 아벨의 피가 하늘에 호소되었듯이 이곳에서 묻힌 크리스챤들의 피가 주님께 호소가 되어 하늘나라에서 생명의 면류관으로 갚아 주리라.

 

성도들이여 ! 이 피(생명)의 힘을 내 속에 안기어서 죽도록 충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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