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바울의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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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666회 작성일15-12-24 22:34본문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내가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 에 내 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4:6~8)
보이는 사진은 바울의 참수터에 있는 조각그림이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형이나 공개 처형은 못하고 외곽에서 조용히 참수(목을 벰)로 순교를 당하였는데, 이때 머리가 3번 튕겼다고 전한다. 바울은 주후 68년경 로마에서 참수당했다.
열두 사도의 최후
큰 야고보는 주후 44년 예루살렘에서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다. 베드로 동생 안드레는 헬라국 밧으라에서 X형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빌립은 부루기아에서 기둥에 매인채 맞아 죽었다. 바돌로매는 산채로 인육의 가죽이 벗겨져서 죽었다. 도마는 인도에서 쇠몽둥이와 창에 찔려 죽었다. 마태는 애굽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 다대오는 버시아에서 활에 맞아 죽었다. 작은 야고보는 주후 62년 유대인들에 의해 성전에서 밀쳐진 뒤 돌과 망치에 맞아 죽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후 68년 네로 박해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다.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죽었다. 요한은 끊는 물에 넣어졌다가 살아나 밧모섬에 유배 당했다가 주후 100년경 에베소에서 죽었다. 이들은 단지 그리스도만을 전하다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들이 전한 생명의 복음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살리고 있다.
교회의 박해는 항상 전체적이며 지속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로 간헐적이며 국지적이으로 이루어 졌다.
- 초대교회의 10대 박해라면 네로(54-68), 도미티아누스(81-96), 트라야누스(98-117), 하드리아누스(117-13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셉티무스 세베루스(202-211), 막시미누스(235-236), 데키우스(249-251),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갈레리우스(305-311) 이다.
- 기독교 핍박이유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게르르고:세네카 안식일 때문), 자기끼리만 뭉친다 등)과 기독교인에 대한 오해(식인:주의만찬, 근친상간:형제,자매 등), 그리고 비애국자(황제 숭배 거부, 군대 병역 문제), 무신론자(국가의 신들을 믿지 않으므로), 희생양(네로의 경우 자신의 잘못을 뒤집어 씌움), 유대인의 적개심(밀고) 등이 있었다.
- 그리스도인들의 별명으로는 나사렛 괴수들, 마술사, 사기꾼, 갈릴리인(무식하고 천한 사람들이라는 뜻), Biathanatai(비아싸나때:죽고싶어 안달인 사람들이란 뜻), 무신론자, 전염병 같은 자 등이 있다.
-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계속 성장한 이유는 사랑의 공동체, 순교자의 씨앗, 부활에 대한 확신이라 하겠다.
[묵상] 행 20:24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가?"
사도바울은 예수님께서 그러했듯이 자기가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을 미리 알았고, 준비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달려가지만, 사도바울은 복음을 위해 달려갔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사명을 알았고 그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기서 사명은 심부름이란 뜻이 있다. 즉 사명은 내가 내 생명을 내 놓을 만한 것에 이르렀을 때 사명을 알게 된다. 우리는 바울처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심부름꾼으로서 목숨을 다해 심부름을 해야한다. 목숨을 다해 심부름 한다는 것은 다른말로 계시록 2:10 에 있는 "죽도록 충성"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소명이전에 사명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부름의 소명 말이다. 그 소명은 첫째 "네 목숨은 내것"이란 것이요, 둘째 "너를 부른 것은 내 명령을 지키기 위함"이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서 복음은 폭탄 (다이나 마이트)이란 뜻을 가진다. 하나님께 내가 맡겨질 때 은혜의 복음은 다이나마이트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가 ?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무엇 때문에 해야 하는 일들인가 ?
[묵상] 딤후 4:7~8 "나의 싸움은 어디에 있는가?"
바울의 마지막 편지는 디모데 후서이다. 바울은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남기면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선한 싸움이란 선으로써 악을 이기는 싸움이다. 이 세상은 너무나 악해 있다. 정의와 진실은 어디로 가고 부패와 부도덕이 판을 치고 있다. 세상은 육의 싸움터이다. 또한 세상은 내 소욕을 위해 싸워간다. 나의 명예와 나의 편안함을 위해 싸운다.
그러나 나는 세상과는 달리 영적인 싸움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악한 영과 지금도 싸우고 있다. 악한 영 사단 마귀는 곳곳에서 자신의 문화와 세력을 조직적으로 키워 가고 있다. 영적인 싸움은 먼저 나와의 싸움부터 시작된다. 내 속에는 두 가지의 마음이 공존한다. 성령님의 갈망과 육의 갈망이다. 이 둘은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따라 오는데 우리는 이 두 갈등에서 주님을 높이는 선택을 해야한다.
이 영적인 싸움은 곧 눈물의 싸움이다.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 영적인 세계이다.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도저히 설 수 없다. 눈물은 내 마음을 씻어내는 좋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나는 오늘도 영의 선한 싸움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주님의 도우심과 궁휼하심을 바라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죽는 그날까지 숱한 고난과 역경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고 간증한다. 세상은 자기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도적을 지키지만 나는 사도바울처럼 믿음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 향한 나의 믿음은 도적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욕심이 올 때 나의 믿음이 도적당하기도 한다. 나의 정욕과 내가 고상하게 생각 하는 지식이 나의 믿음을 도적하기도 한다. 오늘 내가 좋다고 해서 내일도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겸손함으로 허리를 동이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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