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에 이르는 길 (히 12:1~14) > 성도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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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훈련 거룩에 이르는 길 (히 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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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797회 작성일13-06-22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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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코우츠
거룩에 이르는 길은 두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광중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또 그분 속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또한 이끄심으로 우리가 경주에 뛰어들어 계속 뛰게 되는 것이고,
 
두번째는 주님께서 징계하시는 것인데 그로 인해 우리는 채찍질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에 합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놓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더러 경주하라고 권고하시는 그 경주가 어떤 특징이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이 그 경주에 수반되는 실제적인 훈련을 어떻게 은혜롭게 사용하시는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낙담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첫째로 필요한 것은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며 그 이후에는 우리가 가는 길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를 징계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하시기 위함"임을 알 때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바른 길을 가고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그다지 빨리 뛰지 않는 법입니다. 길을 걸어갈 때 좌우와 뒤를 돌아보며 예기치못한 온갖 장애물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 속에는 의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히브리사람으로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자신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길을 택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긴 세월동안 이어져왔고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종교적인 의식들로부터 벗어나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결과는 겉으로 볼 때 자신들이 그저 환난과 핍박속에 빠져든것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인지라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에게 믿음의 길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일깨우심으로 격려를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장은 온갖 종류의 환난과 위험이 있는 길을 가면서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 세상을 포기했던 남녀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유리하는 것과 희롱과 환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유는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록된 것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것은 "보다시피 당신은 바른 길을 들어섰다. 자, 그러니 전진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바른 길을 들어섰다고 확신한다면 가는 길에 더 많은 어려움이 있을수록 그 여행을 단축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그래서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불러"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하십니다.
 
흔히들 영혼에게 있어서 첫째 문제는 천국이냐 지옥이냐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순례자가 좁은 문으로 달려가며 어느누구의 음성도 자기를 설득하여 되돌아 가게 못하게 하려고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 달리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천국이냐 지옥이냐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이냐 아니면 영원한 화냐하는 것이 걸려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이런 단계에서는 다소 빨리 경주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감히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여행을 더 해나가던 순례자가 환난의 언덕에 도착하여 쉴터를 발견하자 그만 자리를 잡고 잠이 들고 맙니다.
 
영혼에게 있어서 두번째 문제는 하늘이냐 땅이냐? 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옥에서 탈출한 것만으로도 기쁜 나머지 이 땅에서 벗어나기를 조금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달리는 대신 자리에 앉아서 잠들고 맙니다.
 
물론 아무도 가고싶지 않은 곳으로 달려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만 만일 우리가 하늘에서 부르신 부르심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끌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은 하늘과 연결되고 그곳은 우리에게 매력적인 장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말한 경주에 참여하는 어떤 사람도 하늘보다 땅을 더 좋아한다고는 믿지 않습 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는 하늘로서 내려오신 것은 우리 마음에 사랑의 황금사슬을 두르시고 우리와 자신을 영원히 연결하시려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하늘에 계셔서 우리의 마음이 그곳을 향하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하늘은 그리스도를 사모하여 찾는 이들에게 너무나 마음을 끄는 곳이며 이런 사람들은 모두 목표를 하늘로 해서 열심히 경주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경주는 인생의 경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 마음이 연단받는 여행 - 땅에서 하늘까지 가는 경주 - 이며 이 여행을 하고있는 사람들은 얼굴을 하늘로 향했고 도덕적인 면에서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늘로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하고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경주에 들어섰음을 나타내는 최초의 표시는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무거운 것"을 느끼지 시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믿는 자들에게는 "무거운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무엇이라도 벗어버리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경주에서 출발도 하지 못한 사람들 입니다. 더 오래, 더 빨리 달길수록 우리는 "무거운 것"을 더 민감하게 느끼게 됩니다.
 
"무거운 것"과 "죄"는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있지만 그래도 심각할 만큼 "무거운 것"이 될 수 있는"죄"라고 할 수는 없는 것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열심이 없거나 세상적인 신자와 내가 친하게 지낸다면 이것을 가리켜 명백한 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누구든지 이런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여태까지 지켜본 바로는 우유부단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리스도인들과 사귀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만큼이나 우리 영혼에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 (잠 14:7). 나는 담뱃대가 "무거운 것"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지금껏 보아왔으며 신문을 읽어서 하늘을 가는 데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신자를 단 한 사람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세상 문학은 많은 이들에게 "무거운 것"입니다. 거기엔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께로 마음을 이끄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과 이성을 땅으로 끌어내릴 뿐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특별히 성령님의 마음 속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 곧 세상적인 종교들은 매우 "무거운 것"입니다. 유대교에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것이었고 의식 또한 웅장하고 장엄한 것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옛부터 내려오는 영광의 후광으로 가득했으며 이것은 옛것을 높이 받드는 인간의 감정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것"이었으며 있어야 아무 쓸데없는 장애물이요 순전히 방해만 되었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와 동일한 버려야 될 장애물이 있는데,이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변형판으로 타락해서 사람들이 이 땅에 속한 종교적인 것들에 사로잡혀있으며 그로 인해 하늘로 가는 경주를 하는데 방해를 받고있는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종교적인 것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도록 훈련을 받는다면 이는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믿는 자들 중에는 실상은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데도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집에서 만나는 반대에 대해 불평하고 또 매일 하는 일과 관련되어 당하게 되는 여러가지 시련 등에 대해서 불평하며 만일 이런 상황이 바뀐다면 훨씬 더 잘 살 수 있을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징계의 일부며 그렇기때문에 이런 것들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인 손실을 당하게 됩니다.
 
내가 알고있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대해 안절부절못하고 짜증내며 어떻게든 한 번 바꾸어보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엔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청을 들어주셨는데 그 결과는 그들의 영혼이 핍절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다음으로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죄는 언제든 발을 얽어매어서 넘어지게 할 수 있는 덮개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되는 것이며 만일 우리 발이 묶이게 내 버려둔다면 우리는 달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엄숙하고도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는 모든 것과 이별하겠다는 마음의 결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때때로 어떤 것들은 "저절 로 떨어져 나간다"고 하는 말들을 합니다만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즐길만큼 즐기고 늘어놓는 변명이 되고맙니다. 이런 것들은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젊은 형제들은 특별히 이 문제에 있어서 절대 타협하지 않기를 권고하는 바입니다. 죄가 문제가 될 때는 절대 우물쭈물하거나 어떻게 좀 협상을 해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창세기 35:1-4에서 야곱이 베델에 가려고 예비한 것이 여기에 대한 좋은 실례 가 됩니다. 메소보다미아인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않았을 "귀고리"와 "의복" 이었지만 베델엔 가져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곧 "무거운 것"에 해당됩니다. 이 때 야곱과 함께한 사람들 중에서는 "이방신"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 하나님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이는 "죄"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귀고리와 우상을 모두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 묻고서야 야곱과 그 가족은 "하나님의 집"에 올라갈 준비를갖추게 되었습니다.
 
믿는 자들은 많은 세상적인 것들의 조각들을 소중히 간직한 채 오랫동안 지낼수도 있으며, 흔히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고 이미 알려진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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