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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없느니라 (By no mea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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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374회 작성일21-02-1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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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 부활로 증명되는 예수의 주되심, 그리고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십자가의 은혜가 사도들을 통해서 처음 전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은혜로 모든 죄가 씻음을 받는다고요? 그런 논리로 하면 
 죄를 더 지어야 이득 아닌가요? 어차피 은혜로 용서받았다면
 죄를 더 지을수록 은혜(용서)도 더 늘어나는 것 아닙니까?“

은혜의 복음에 대한 이 도전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굉장히 단호했습니다. 
로마서 6장 2절의 ‘그럴 수 없느니라’는 굉장히 완곡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사도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서 ‘말도 안된다’.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그 죄 가운데 더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로부터 이천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은혜에 의한 죄의 증가설’은 
이제는 불신자 진영에서보다는 오히려 신자 진영에서 교리와 이론의 
영역에서보다는 교인들의 삶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거의 완전히 자리를 
잡은 듯 합니다.

죄를 짓고, 자백하고, 또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고, 자백하는 패턴은
옛사람이 죽고, 예수가 그 안에 사시는 신자들이라기보다는 구약의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과 거의 유사합니다. 이런 패턴은 ‘은혜의 논리’
로 신자의 무리 안에서 더욱 공고해지고, 죄를 짓는 죄책감을 도려냄
으로써 은혜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려는 형태로까지 나타나곤 합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구원 받았으니 다시 지 지어도 괜찮고, 죽어서
천국가면 그만“ 입니까? 혹시 이러한 논리를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가지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혹시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마음 속에 
죄 가운데 거해도 되는 ‘스스로 발급한 면죄부‘, 혹은 ’천국행 종신보험‘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죽은 사람은 다시 죄 가운데 
거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죄 지어도 천국간다’가 
아니라 ‘네(죄)가 주인 노릇하던 그 인생은 십자가에서 이미 끝났다!’ 이며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가 네 안에 사신다’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복음은 죄 가운데 거해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리려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 작자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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