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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신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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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943회 작성일13-06-22 01:51

본문

Ⅰ.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25:21-26, 27:18-29)
 
야곱의 투쟁적인 생애는 어머니 뱃속에서 시작됩니다. 모친 리브가는 결혼한지 20년만에 임신을 했는데 쌍둥이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태중에서 서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리브가는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며 하나님께 가서 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놀라운 비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 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작은자를 섬기리라(창 25:23)"하나님께서는 두 국민이 태 중에 있는데, 그들이 복중에서 나누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 중에 한 족속이 강한 민족이 될 것인데, 먼저 태어나는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쌍동이로 태어날 아이들 중에 동생을 택하시고, 그에게 크신 뜻과 소망을 두셨음을 말해 줍니다. 리브가는 이 예언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야곱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고자 했습니 다(28).
 
그러면 하나님은 왜 장자인 에서를 택하시지 않고 야곱을 택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 주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택하실 수도 있고, 야곱을 택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속 역사를 완성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택하셔 쓰십니다. 그런데 누구를 택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 때 주권에 속한 일이요, 하나님께 속한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늙은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 중에서 이삭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달랐습니다. 이스마엘은 첩의 소생이요, 종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약속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에 에 서와 야곱의 경우는 모든 것이 같습니다. 아버지도 같고 어머니도 같습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행위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말라기에는 "내가 에서는 미워하였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하셨습니다(말 1:2,3).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행위나 조건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 자신의 선택 주권으로 말미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신분이니 에서와 야곱이 어떤 사람들이 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야곱을 택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선택은 전혀 인간 조건이나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야곱의 선택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은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 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0-13)" 하나님의 선택은 결코 행 위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 자신의 선택 주권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께서 늙고 소망 없는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이나 강한 이스마엘을 버리시 고 연약한 이삭을 택하신 것, 또 태중에 있는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택하신 것 모 두 다 인간 조건이나 행위에 근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이었습니다. 야곱이나 에서나 하나님 께서 보실 때는 똑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본질상 진노의 자식 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기 때문에 야곱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태중에서 택 하셨으며, 힘든 야곱을 크신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마침내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했습니다(요 15:16).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부르 심을 받고 쓰임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택함받은 것은 결코 우리의 행위가 선하기 때문도 아니요, 능력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요,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야곱(25_24-34)
25:24절을 보면 리브가가 해산할 기한이 차서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는데, 이는 털 이 많은 털보라는 뜻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쌍동이가 태어날 때는 15분이나 30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뒤따라 태어났으므로 동시에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발 꿈치를 잡았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간발의 차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야곱의 강인한 인간성을 잘 나타내어주는 이름입니다. 27절을 보면 이들이 자라서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이 되었습니다. 에서는 털이 많고 야성미 가 넘치는 들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종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종용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완전한(perfect, complete)" "성숙한(mature)"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요1 1:8). 그래서 "온전한 사람(Knobel)", "경건한 사람(Luther)", "의로운 사람(Kalisch)", "온유한 사람(Rosenm ller)"이라고 번역했다. Morris, Genesis Record, p.415; 이상근, 창세기,p. 270.
 
야곱은 내성적이고 여성적이었습니다. 그는 장막에 거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가 죽을 쑤는 것을 볼 때 어머니 치마꼬리를 붙잡고 부엌 주위를 맴돌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타 입의 남성들은 자매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들도 이들을 각각 다 르게 사랑했습니다. 이삭은 미식가라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에서를 사랑했습니다(28). 그러나 리브가는 하나님의 모태로부터 두신 뜻을 기억하고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하루는 에서가 사냥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야곱은 부엌에서 맛있는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뺏으려고 계획적으로 팥죽을 끓이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에서는 사냥하고 돌아와서 심히 배가 고팠습니다. 야곱에게 심히 곤비하니 팥죽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대뜸 형의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했습니다. 형의 배고픈 약점을 이용하여 장자권을 빼앗고자 하였습니다. 사실 장자권은 팥죽 한 그릇에 판다고 해서 팔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를 형으로 인정치 않고, 한번이라도 "형님!"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같습니다. 이 문제는 야곱이 어려서부터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문제였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 에서에게 장자권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이 동생이라는 사실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여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치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남성들에 대한 반발심과 욕구불만이 가득합니다. 남자같이 말하고 행동 합니다.
 
치마 입기를 거부하고 바지만 입고 모든 남자들을 경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 대한 경쟁심으로 뼈가 쇠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장자로 태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많은 손해를 볼 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에서에 대한 시기심이 타올랐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장자권을 빼앗고자 했습니다. 장자권은 당시에 아주 중요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동안은 아버지 다음으로 가정에서 권한이 있었습니다. 또한 재산 상속권도 다른 형제들보다 배를 더 상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자에게는 제사권이 있었습니다.
 
가정과 부족의 제사장으로서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아주 중요한 직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어떠합니까? 32 절을 보십시오. "내가 죽게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에서는 현실적인 유익을 따져보았습니다. 배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밥먹여 주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때를 놓칠세라 야곱은 "오늘 내게 맹세하라"고 다짐을 받아내었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에서는 배고프던 차에 실컷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갔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에서를 가리켜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34). 히브리서 기자는 "판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망령된 자" 라고 했습니다(히 12:16). 에서의 사고방식은 "우선 먹고 보자"였습니다. 그는 현실주의적, 실리주의적,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직접 섬길 수 있는 제사장의 직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한 순간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귀중한 권리를 파는 망령된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인생관은 결혼하는 데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서는 나이 40세에 헷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바스맛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26:34,35). 이로 인해부모가 많은 근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28:6-9에 보면 부모들이 이방 여인들을 기뻐하지않자 다시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에서는 육신적인 만족과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자였습니다. 분명한 철학이 없었고 그때 그때 유익을 따라 사는 망령된 자였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명분들이 있습니다. 신자의 명분, 목회자의 명분, 선교사의 명분입니다. 이러한 명분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요, 당장에 현실적인 유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고, 성경 공부에 참여한다고 당장에 무슨 유익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친구들은 주말만 되면 들로 산으로 놀러 가는데 고리타분하게 주일 예배를 드리고 소감도 써야 합니다.
 
친구들은 도서관에서 열심히 시험 공부하는데, 도움이 필요한 양을 심방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귀히 쓰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명분을 귀히 여겨야합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물질주의 시대입니다. 물질을 중심으로 모든 가치가 평가됩니다. 대학도 취직이 잘 되는 학과가 인기가 높습니다. 장가를 가려고 해도 돈이 많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사람이 일등 신랑감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이런시대에 우리 신자들은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현실적인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신자의 명분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특히 핍박을 받을 때 하나님이 주신 명분을 굳게 잡고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로마의 잔혹한 박해 속에서도 신자의 명분을 목숨보다 더 귀히 여기고 믿음의 순결을 지켰습니 다. 우리가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지 않고, 영적인 것을 귀히 여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한 야곱 (27:1-40)
 
그후 많은 세월이 흘러 이삭이 나이 늙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이삭은 야곱이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산 장자권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자인 에서를 축복해 주려고 은밀히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으로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 많아서 많이 망설 였습니다(12). 그러나 야곱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 하고자 거짓말을 확신있게 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또 사냥한 적도 없으면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축복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또 이삭이 어떻게 이렇게 속히 잡았느냐고 하자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나 이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20). 그리고 이삭이 야곱의 손을 만져보고 "음성은 야곱이로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고 하며 참으로 네가 에서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야곱은 두려워서 진실을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끝까지 버티었습니다. "그러하니이다(24)." 이삭은 야곱의 너무나 확신에 찬 거짓말에 속아서 야곱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27:27-29). 야곱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자신을 에서로 속여서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했습니다. 야곱이 쟁취한 것은 당장유익이 되는 물질적인 것이나 현실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 신령한 영적인 축복을 쟁취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한 것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 하나님, 이삭에게 백배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조상들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물줄기를 잡은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평소에 영적인 축복을 귀히 여기는 믿음이 없었다면 저주 받을지도 모르는 모험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영적인 축복을 귀히 여기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축복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예 수님께서도 천국은 침노하는자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1:12). 그러므로 영적인 축복은 양보하면 안됩니다. 어찌하든지 쟁취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물질적인 축복은 귀히 여깁니다.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물질적인 축복을 쟁취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축복은 양보하고, 겸손한 체하면서 사양합니다. 이런 자들은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들입니다.
 
영적인 축복을 귀히 여기는 자만이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남는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축복은 양보하더라도 영적인 축복을 귀히 여길 때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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