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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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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087회 작성일13-06-22 02:09

본문

히브리서 12:1-29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된 자에게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에서 여러 믿음의 선배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 기도하고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도 했습니다.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믿음으로 의를 행하기도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으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것과 돌로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그 믿음 때문에 인정을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약속을 믿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에대한 약속이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을 보지는 못하고 다만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기뻐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선배들이 있고, 그 선배들은 우리를 빙 들러 싸서 보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말합니다."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경주하자." 이 장면은 마치 육상 경기장에서 트랙에서는 선수들이 달리고 있고 관중석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며 응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놓인 경기 코스를 달리고 있고 관중석에서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최대한 가벼운 차림으로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우리 앞의 믿음의 경주를 달려야 하고 거룩함이라는 경주를 잘 달려야 합니다. 또한 사명이라는 경주를 힘써 달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를 지켜보던 믿음의 선배들은 '야,잘한다' 소리치며 기뻐하고 격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혹 잘못 달리면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이코스를 달리면서 우리 앞서 달려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속에서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시오, 또 그 믿음을 완성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키고 달려야 합니다. 우리 눈이 예수님 외의 다른 데로 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의 길, 사명의 길을 달리다가도 다른 데를 잘봅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듯한 친구를 부러운 듯이 보기도 하고, 세상의 현란한 것에 눈이 갑니다. 혹은 어려움 속에서 누군가 내게 도움을 주고 위로를 주지 않을까 하며 두리번거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길옆의 하수구에 빠지기도 하고 나무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합니다. 길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달릴 힘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달리다가 한눈팔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께만 눈을 고정시키고 달려가야 합니다. 그 예수님은 앞에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 셨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인간적인 모든 수치와 모욕과 멸시를 십자가 위에서 다 담당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본문의 히브리 신자들도 세상을 믿음으로 살면서 모진 수치와 멸시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억울했습니다. 서럽고 분하고 원통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 그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멸시와 수치와 조롱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사람이 수치와 조롱과 멸시을 당하고서는 견디지 못합니다.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 수치심 때문에 견디기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내게 수치를 준 사람에게 되갚아주고 싶습니다. 원수를 갚고 싶어 합니다. 원수를 갚지 못하면 뭘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되갚아 주면 악이 되풀이 됩니다. 악이 악을 낳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고만 있으면 화병이나서 견딜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악이 받혀서 견딜 수 없습니다. 혹은 수치심 때문에 내 존재가 너무나쪼그라들어 마치 한 마리 벌레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견딜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십자가를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 안에 수치와 멸시를 치료하는 특효약이 있습니다.십자가 위의 예수님 안에 원수를 사랑으로 갚는 비법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사랑하고 도와주고 격려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묘하게도 서로 해치고 상처 주며 힘을 빼기도 합니다.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에서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 일은 있습니다.
 
그것이 부정할 수없는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은 결코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런 현실이 치료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자기에게 반대하고 비난하던 모든 사람들을 바로 갚아주기 보다는 참으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 사람들을 참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 는 대항치 아니하고." 그들은 세상 죄와 싸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와 싸웠고 자신들의 죄와도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피 흘리기까지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피 흘리기까지싸운다는 것은 죽기살기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는 한이 있고 심하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죄와 싸워 이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신자들은 그렇게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땀 흘리기까지는 싸웠습니다. 그러나 피 흘리기 직전에 싸움을 그쳤습니다. 피 흘릴 생각을 하니 겁이 났습니다. 피를 흘리고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그 때까지 싸운 싸움이 헛되고 말았습니다. 싸움은 다시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는 싸우지 않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정욕의 죄와 계속해서 싸워도 뚜렷한 결과가 안 보이자 나중에는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책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게으름과 싸우되 코피를 쏟기까지 싸우면 이길 수 있을 텐데 그렇게까지는 싸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부인을 하시되 십자가에서 피 흘리기까지 하셨는데, 우리는 자존심이 상하지않을 정도까지만 자기 부인을하지 그 이상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견디지못합니다. 목자생활에서도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데, 피를 흘려야 할 순간에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을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때까지 싸운 모든 것이 헛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죄과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싸우셨 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죄를 이기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피 흘리기 직전에 싸움을 포기하셨더라면 세상 죄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또 그들은 고난 중에서 아들들을 격려하듯이 격려하시는 말씀을 잊었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연단하시고 그의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히브리 신자들은 외적 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닥친 고난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고난이 하나님의 훈련이요,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연단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려움은 그냥 어려움으로만 보였습니다. 그 어려움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들은 '야, 힘들다' 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어떤 이는'하나님이 나만 찍어놓고 미워하시는 거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의 영적, 생산적 의미를 몰랐기때문에 마음과 입에 원망과 불평이 가득했습니다. 독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자신들의 삶과 미래에 대해부정적인 생각만 들어왔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슬픔과 부정적 생각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닥친 그 모든 것들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저자는 말합니다. "너희가 참음은 훈련을 받기 위함이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접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훈련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그들은 닥친 모든 어려움들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알고 참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아들로 여겨 훈련하심을 알고 견뎌야 했습니다.훈련이란 무엇입니까? 훈련에는 현재의 내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사람에게는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현재의 내 자신은 내가 볼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에 대해서 자족하기쉽습니다. '나만큼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세상에 나만큼 진실한 사람 있어?' 합니다. 그러나 그어떤 사람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그리고 훈련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가 높을수록 훈련의 강도가 셉니다. 방위병에 대해서은 그렇게 심하게 훈련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장교에 대해서는 훈련이 셉니다. 특공대 훈련은 더 셉니다. 특공 훈련 중에는서바이벌 훈련이 있는데, 그것은 먹을 것을 전혀 주지 않은 채 어느지역 에 떨어뜨려 놓고 정해진 지점에정해진 시각까지 찾아오게 하는 것인데, 그것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하는훈련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에도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겸손과 섬김이라는 목표,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이라는 목표, 어떤 사람에게는 거룩함이라는 목표가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부지런함이라는 목표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사람의 자기 신뢰라든지 자기 성실을 깨뜨리십니다. 우리 각사람이 각자에게 두신 하나님의 목표를 알 때 훈련을 더 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훈련 목표도 모른 채힘든 마음만 가지기 쉽습니다. 훈련에 대해서 운명적인 생각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왜 나만 이런 고생을 해야하나?'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8절을 보십시오. "훈련은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우리는 할수 있는 대로 어려움이 없고 문제가 없으며 편하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만사 형통 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이제 훈련은 그만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이제 내 나이 50이 되어가니 훈련은 그만 받고 축복을 더 많이받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러나 본문대로 한다면 문제가 없고 훈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생자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슬퍼해야 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라면 평생 하나님의 사랑의 훈련이 따를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문제없고 편하기를 포기하고 평생, 그야말로 죽는 그 순간까지,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 훈련받을 각오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편안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 것이 아니라, 훈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야합니다. 이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경제적으로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쳤습니다.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습니다. 이는 창피한 일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훈련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훈련받으면서 하나님을 더욱 더 경외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9,10 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 육체의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육신의 아버지는 때로 자기 감정에 못 이겨 자녀들을 때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훈련을 주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무릇 훈련이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훈련을 받은 자에게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어려움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하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구체적이 되고 깊어집니다.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더욱구체적으로 알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됩니다. 또한 마음에 깊은 평화가 심겨집니다. 그 평화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요동치 않는 평화입니다. 그런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해의 폭이 넓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화내거나 감정적이 되거나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 마음과 얼굴에 하나님의 빛이 빛납니다. 그런 사람의 머리 위에는 옛날 성자들의 그림에서처럼 동그란 후광이 생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훈련에는 빛나는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힘차게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리를 삐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은 것을 오히려 감사해야합니다. 우리는 훈련을 잘 받고 변화되어야 하며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할 수 있어야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 리라." 다른 번역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라" 했습니다. 사람과의화평은 그냥 쉽게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보다는 화목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싸우는곳에는 악한 영이 역사하지만 화목하는 곳에는 성령이 함께 일하십니다. 화목한 것이 좋은 줄은 누구나 잘압니다. 그러나 화목은 그리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화목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 합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합니까? 말부터 함부로 하지 말고 서로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생각 없는 말 한 마디, 함부로 내뱉은 말 한 마디가 사람 사이를 여지없이 깨버릴 수 있습니다. 상대방 처지는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한 말이 상대방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어 사람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선한 말, 덕을 세우는 말을 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고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내 생각과 내 경험대로 판단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커다란 틈이 생깁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화목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화목한 곳에서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우리가운데 쓴 뿌리가 나지 않아야 합니다. 내 속에 어떤 이유 로든 쓴 뿌리가 남아 있으면 그것이 내 마음을 쓰게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쓰게 만듭니다. 내 속에 있는 쓴 뿌리가 사랑의 공동체를 깨뜨리는 요인이 됩니다. 쓴뿌리가 없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쓴 뿌리가 없어지려면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로들고 나가야 합니다. 내게 닥치는 모든 어려움들, 사람 사이에 생기는 문제와 갈등이 하나님의 훈련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그렇게 할 때 쓴 뿌리가 없어집니다. 쓴 뿌리가 없어지면 우리는 서로 화목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를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발견하는 만큼 사랑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더욱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훈련을 잘 받아야 하겠습니다.
 
"무릇 훈련이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된 자에게는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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