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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고전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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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349회 작성일13-06-22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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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사랑은 말하고 표현해야 하는것이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 자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생각해도 그 자녀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못느꼈다면그 사람은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받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여 주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이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있냐고 항변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과 아울러 사랑의 방법을 점검하십시오. 매일 보기만 하면 공부하라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라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말은 청소년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잔소리이니까요. 여러분의 아내가 자녀가 남편이 여러분의 사랑을 느끼고 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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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말 씀: 고전13:1-13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 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4, 13)
 
이 세상에 사랑이란 언어처럼 아름다운 말도 없습니다. 또 사랑처럼 위대한 힘도 없습니다. 이 사랑이 인생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게 큽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이 사랑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분쟁, 제물을 먹는문제, 음행.은사의 남용, 질투, 모임의 질서파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문제가 사랑이 없기 때문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의 진리를 깨우치고자 호소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랑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사랑의 본질과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서 논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사도들이 될 수있기를 기도합니다.
1. 사랑이 없으면(1-3) 1절을 보십시오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되고 " 여기서 방언이란 외국어를 말하며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 아름답고, 유창하고 논리정연한 말을 가리킵니다.. 또 ' 천사의 말'은 천사들이 사용하는 아주 최상의 언어요 달변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사랑의 실천이 없고 방언을 하며 진리의 말만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10년을 공부해도 영어 한마디 못하는데 어떤 사람은 외국어를 서너 개씩 하고, 아나운서 빰칠 정도로 말을 잘합니다. 정말 외국어를 잘하고 말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여러분들도 말 잘하고 싶고, 정말 외국어를 잘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꽹과리가 된다고 합니다. 꽹과리나 양철 두드리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데 밖에서 꽹과리나 양철을 두드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얼마나 귀가 아프고 시끄럽겠습니까? 이처럼 사랑이 없으면 아름다운 말도 유창한 외국어도 감동이 없고 생명이 없는 시끄러운 소리로 우리를 괴롭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는 외국어 잘하고 말 잘하고 메시지를 잘 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 동역자에게 한 마디를 하더라도 사랑이 담긴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미움과 증오와 정죄가 가득합니다. 사랑이 있는 말과 없는 말은 글자는 똑 같아도 분질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 있는 말은 분위기 자체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처음부터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감싸주려고 애를 쓰고, 격려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의 말은 말만 들어도 힘이나고 살아납니다. 은혜가 있어 상대방의 분노와 문제들을 잘 해결해 줍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말은 어떻습니까? 분위기가 냉랭하고 날카롭습니다. 감정이 섞이고 정죄하는 기운이 감돌고 옆에만 가도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말할 때마다 가시가 서립니다. 이런말은 힘을 빼고 노를 발하고 죽이기까지합니다. 이런 사람 가까이에는 왠지 가기가 싫습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랑스러운 말은 하면 할수록 좋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때로 하지않음만 못합니다. 책망이라로 사랑이 담긴 말을 해야 하고 , 바로 잡아 주더라도 깊이 이해하는 마음에서 해야 합니다. 그럴때 말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말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영적인 비밀과 지식에 대한 갈망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 우리에게 예언하는 능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알고,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시는가, 언제 심판하실 것인가, 모든 미래사를 내다 볼 수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너 무슨 생각하였지, 헛 생각하였지, 너 죄 지었지, "참 재미 있을것 같습니다.
 
또 말씀에 담긴 모든 비밀을 깨닫고, 남이 모르는 지식을 알아 글을쓰고 책을 내고 학위를 받는다면 그 분야에 일인자 가 되어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또 모세처럼, 바울처럼 믿음으로 홍해를가르고, 비가 올 때 비를 멈추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태산을 옮기는 믿음의 능력을 덧입기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2b),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I am nothing'으로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위대한 말씀의종, 훌륭한 성경 선생, 박사 아니 박 박사가 되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구제와 희생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자기먹고 살기도 힘든데 많은 물질을 들여 남을 도와 준다거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어준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세상 가치로 볼 때 최고의 희생이며 봉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가장 아름답고 보람된 일로 여기고 이런 사람을 열사, 순교자라 하여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3b 을 보면 바울은 이것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I gain nothing 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일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일이라 할지라도 진정한 사랑이 기초가 되지않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한 일을 영웅 심리, 명예심, 보상심리로, 선거때나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진정한 기쁨도 보람도 내적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열심과 희생이 분열과 다툼과 파벌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랑의 동기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손해 의식, 허탈감에 빠져 목사님을 찾아와서 " 내 청춘을 보상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토록 강조하는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방대한 사랑을구체적으로 정의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볼 때 사랑이란 모든 사물속에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아니하는 생명체 에너지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모든 계명속에 근본정신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물속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뿌리로 존재하고 있으며 모든 믿음의 삶의 기초가 됩니다.. 아름다운 말들, 지식들, 믿음의 역사,구제, 희생,이 모든 것들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사랑은 이것들의 깊은 바닥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고 ,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온전히 서지 못할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기초해서 말을 해야 말이 아름답고 감화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기초해야 지식이 더욱 빛나게 되며, 사랑을 기초할 때 모든 행동과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사랑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먼저 사랑할 수 없다는 우리의 고집을 꺽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나아가서 사랑의 본질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영원히 죽어야 할 자격이 없는 죄인들이 상처가 치료받고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하므로 이 빚을 갚을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배울 때 성도들도 더 잘 사랑할수 있게 됩니다. 이 사랑으로 많은 지식도 쌓을 수 있고, 이 사랑으로 양들을 위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수도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한꺼번에 다 알수는 없지만 겸손히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 나갈때 우리 가운데 놀라운 능력과 기적의 사랑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Ⅱ.사랑이란(4-7) 4절을 보십시오.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첫째,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바울은 제일 먼저 사랑의 정의를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래참는다는 것은 삶의 결실을 맺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농부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위해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학생들도 공부를 잘해서 성공을 하려면 오래 참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패의 관건은 누가 얼마나 오래 참는가 하는 것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니 그냥 참으면 되지 않는가' 단순하고 쉬운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는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오래 참고.' 라는 말은 단순히 어떤 상황에 대해서 오래 참는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어려움을 견딘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이겨 낼 수 없는 것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손해를 당하였을 때 그것을 보복할 힘이 있으면서도 참는 다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오래 참는 인내는 사랑이 없으면 어렵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잘 했던 사람도 양을 치는데서 실패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성실하면서도 가정 생활,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기기도합니다. 이는 인간관계에서 오래 참는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은 이런 인내하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다투고 마음이 안 맞으면 갈라집니다.. 그리고 법을 만들어 어기는 사람은 벌을 주고 제재를 가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에게 '사랑은 오래 참는것' 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참으라 하면 '그래 참자!' 하며 마음에 꾹꾹 눌러 놓다 어느말 갑자기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하며 용수철처럼 폭발 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 거역하며 죄악에 빠져 살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기까지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고 오늘날까지 기다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오래참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 한 사람이라도 여기에 남아 있을 만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우리는 모두가 이 하나님의 오래 참는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랑이란 단지 달콤하게 느껴지는 에로스적인 사랑만이 아닙니다. 아픔과 고통을 참으면서 인내하는 것도 고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 참을 때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실수와 허물 투성이인 아담의 자손입니다. 오래 참음이 본질적으로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이기 때문에 오래 참고 섬기면 얼마든지 변화될 가능성이 다 있습니다. 강도도 오래 참는 사랑 앞에 변화되고, 힘든 양도 오래 참고, 나와 스타일이 다른 동역자도 오래참으면 반드시 변화 됩니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것이 인간 사회인데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래 참는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오래 참는 사랑을 제일 먼저 내세운 것입니다
 
둘째, 온유합니다. 오래 참는 것이 사랑의 수동적인 측면이라면 온유는 사랑의 능동적인 측면입니다, 온유란 단순히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신앙생활 하다보면 무시도 당하고, 멸시고 받고, 심지어 배척과 핍박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잘못하면 감정으로 대하거나 싸우기 쉽습니다. . 이때 오히려 사랑으로 품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목소리 크고 싸움꾼이 되면 이깁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온유한 자가 승리자가 됩니다.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미워해야 할 사람,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려면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다스려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고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모든 종류의 사람,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품고 섬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원수라도 자기의 사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로 오는자를 편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온 유한사람 주위에는 항상 많은 양떼들이 모여들게 됩니다. 온유한 자는 양을 잘 칩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처럼 온유함으로 나타 납니다.
 
셋째,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합니다. 투기란 다른 사람이 잘 되거나 높아지는것을 질투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을 우월하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낮추려는 속성입니다. 증오와 경쟁의식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사랑은 이러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 한국속담에 '이웃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다'는 말이 있고, '여자가 질투하면 오유월에 서리가 내린다' 는 말이 있습니다 . 이는 아주 비복음적인 것입니다. 왜 이웃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픔니까? 우리 가운데도 다른 동역자가 양을 잘 치면 배가 아프고 못 품는 사람이있습니까? " 그 양 오래 못 갈 거야"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다른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동역자가 양을 칠 때 다과를 serving하고 옆에서 기도해 주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도 이런 사랑의 사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넷째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합니다. 사람들이 자랑을하는 것은 현재 위치보다 억지로 높아지고 남보다도 나으려는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랑은 심리적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가리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최고의 보화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랑하는 것은 사랑의 결핍증입니다. 우리가 설령 자랑할 것이 있다면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자기자랑은 무익한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다섯째,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무례히 행한다는 것은 함부로 행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랑하는 마음이나 교만한 마음이 있으면 무례하게 행하게 됩니다. 이때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어떤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는 내 멋에 산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부부니까", "내 자식이니까"하면서 함부로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역자에게 "야 그것 좀 가져와"하고 화가 난다고 자식를 때리고 욕을 합니다 때려도 도망가지 않기 때문에 안심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린가슴에는 상처가 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례함을 입은 동역자나 자식은 life testimony에서 발표를하고 결코 남편이나 부모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부부라도 자식이라도 함부로 말하거나 대해서는 안됩니다.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도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메아리를 보십시오., 내가 무례하게 "야" 하면 "야" 하고 그대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 사랑합니다"하면 " 사랑합니다 " 하면 따뜻하게 돌아옵니다.
 
여섯번째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인간적 사랑은 이기적입니다. 항상자기 유익을 구합니다. 부모님의 사랑도 이기적이고 필레오의 사랑도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요 3:16절을 보십시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주는 것입니다. . 사랑은 주는 사랑이 될 때 성숙해지고 무르익게 되는것입니다. 사랑을 배우기를 원하십니까? 무엇이든지 주어 보십시오. 달라질 것입니다.
일곱 번째, 성내지 아니합니다. 성냄은 감정입니다. 감정을 폭발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지 모릅니다. 순간의 감정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감정 때문에 세상에 많은 비극적인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사랑은 감싸주고 치료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체질이니 어쩔수 없다고 하면서 성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화가 나고 성이 난다는 것은 아직도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는데 깨우면 화를 벌컥 냅니다.이것도 감정이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들 성내면 안됩니다.
 
여덟 번째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남을 보복하려는 마음, 나쁘게 비난하는 마음 미움, 증오,는 악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 악한 것을 생각지 않을 뿐 아니라 타인에게 절대로 전가시키지 않습니다. 죄악된 생각이 스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품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 악한생각이 들어 올 때 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한 생각을 오랫동안 인내로 품고 있는 사람이있습니다. 일주, 한달, 1년...이는 사랑의 속성이 아닙니다. 아무리 길어도 최소한 해넘어 가기까지 품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아홉번째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이말의 뜻은 사랑은 악에 공감하지 않고 선에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의 가치기준과 방향성을 말해줍니다. 세상에서는 사랑한다고하면서 악을 공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악으로 향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를 기뻐하고 진리 중심적이 되게 합니다. 지니재로 행하는 사랑을 행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가까운 친구가 악을 해아는 것을 묵인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욕망을 부인해야 하고, 자기 희생이 따르고, 싫더라도 책망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권선징악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열번째,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다시 결론적으로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모든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 없이 모든 것을 참을 수 없고 , 사랑 없이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고, 사랑 없이 모든 것을 바랄 수 없고, 사랑 없이 모든 것을 견 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끝장입니다. 우리 자신도 과거에 본성대로 살때는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희망도 없었고, 사람들에게도 소망도 두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나 다른 사람을 바라보나 세상을 바라보나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 주시고 죄인들을 향한 오래 참음의 참사랑도 보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참는 것을 배웠고, 조금씩 소망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만일 이러한 사랑의 속성을 배우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혈기, 감정, 불신, 절망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으로 모든 고통, 모든 괴로움, 모든 수치도 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양도 소망 가운데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모든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처음 이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모든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딜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러나 사랑은 모든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Ⅲ. 사랑은 영원하다(8-13) 8절을 보십시오 "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영속성과 지속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랑과 다른 은사를 비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적인 속성을 잘 알고 방언이나 지식, 예언의 은사를 잘 이해하고 잘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한 현실 세계에 살다보면 지식도예언도 방언도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은사들에 대해서 어떻게 말합니까? 9,10절에 또 이렇게 보충합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이땅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또 불완전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오셔서 온전한 것이 이루어질 때는다 없어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으로서 언제 까지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주님이 오시더라도 계속되어 집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을 절대시하며 애쓰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현재 미숙하더라도 온전한 것으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은사에 집착하여 영원한 것들을 잃어 버리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 이 어린아이와 같고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바울은 다시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 합니다. 어린아이는 맑고 깨끗한 심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고 깨닫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유치합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갖고 있는 영적인 사고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얻은 깨달음 이지만 처음부터 완전하거나 성숙한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장성한 사람이 되듯이 성장하고 자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고의 폭이나 넓이 깊이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어린아이와 같았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고백합니다. 니는 어린아이의 일을 무시하는 뜻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 신앙은 대개 뜨겁습니다. 그러나 지식이나 은사나 모든면에서는 어리고 서툴렀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신앙이 점점자라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방언이나 예언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은사도 점점 더 성숙한 과정으로 성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방언을 많이 말한다는 것을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최고의 은사로서 사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시간 '사랑'의 은사 한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0년이 넘도록, 부모로부터, 이웃으로 부터, 신앙 생활을 하면서 목자님들로 부터 그렇게 사랑을 많이 받은것 같은데도 주는 데는 얼마나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합니까? 우리다 영적인 것에 대하여 아무리 많이 아는 것 같고 체험한 것 같아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옛날 금속 거울은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취어 주었습니다 .
 
이와같이 우리의 영적수준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불완전 합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인간한계의 상황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분명하고, 주께서 우리를아신 것 같이 온전히 알게 되리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세에 주어진 것들로 인하여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장차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들을 비하면 이런 것들은 하잘것 없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은 신자에게 항상 있어야 할 세가지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세가지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복음의 삼대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정말 이 세가지는 믿음 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 입니다. 그러면 서도 사랑을 제일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은 믿음, 소망의 존재하는 근거이며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또 믿음, 소망은 자기에게 덕을 끼치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고 유익을 줍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제일이라고하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여러 가지 것들이 있지만 제일 중요하게 구해야 할 것이 사랑입니다. 이사랑은 한순간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님이 오신후에도 계속됩니다. 다른것은 온전한 것이오면 다 그치나 사랑은 그치지 않고 영원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들을 폐하여져도 사랑은 주님이 오실 때 까지 우리가 늘 힘써야 할 영원한 과제입니다. 우리는 사랑에서 성숙해져야 합니다.이것이 진정으로 신앙의 성숙도을 보야야 할 것 입니다. 나는 현재 아직도 어린아이 입니까? 장성한 자입니까? 우리 모두 머리를 맞대고 몸을 부딪기며 최고의 은사 사랑의 과제를 풀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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