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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시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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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359회 작성일13-06-22 08:16

본문

말씀 : 시편 1:1-6
 
요절 :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오늘 말씀은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의 행복을 노래한 시편입니다. 이 시는시편 150편의 서론이요,<성령의 머리말> 이라고도 부릅니다. 모든 시문학의 주제를 요약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시 입니다. 이 시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는 반드시 멸망을 주시고, 의인에게는 반드시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본 시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첫째는 1-3절까지로 의인의 성격과 조건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들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4-6절까지로 악인의 조건이 그려져 있는데 그들의 궁극적인 파멸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배우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항상 푸르고,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인생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시냇가에 심은 나무 (1-3)
1,2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 있는 사람"이란 "참으로 복되도다!..... 사람이여!" 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세상 죄악을 본 받지아니하고, 구별된 생활을하는 사람입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합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시편 기자는 세상 사람을<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나누었습니다. <악인>이란 곧 경건치 않는자(ungodly)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를 모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꾀가 많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악인의 꾀를 열심히 배웁니다. 중세에는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이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는 성경처럼 읽혔다고 합니다. 군주론을 읽어보면 자기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철저히 파멸시켜야 한다는 [악인의꾀]를 기막히게 가르쳐 줍니다. 악인들에게 는 도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인간의 고귀한 인격을 찾아 볼 수없습니다. 이들은 양의 가죽을 쓴 이리와 같은 자들입니다. 요즘도 서점에는 악인의 꾀를 가르쳐 주는책들이 날개 돋친 듯이 잘 팔립니다. "배짱으로 삽시다"
 
"부하를 다스리는 법" "남편 길들이는 법" "성공으로 가는 길" "정상에의 도전" 등 끝이 없습니다. 또 열심히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성공담을 듣습니다. 물론 이들의 꾀에 진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합니다. 어떤 면에서 생각해 보면 악인의 꾀가 지혜로운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문제 해결이 빠를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 가운데서도 몸은 교회에 나가지만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악인의 꾀를 좇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꾀를 일시적으로 자기를 흥하게 하나 필경은망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악인의 꾀>를 버리고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또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합니다. <죄인>이란 악인보다 더 질이 나쁜 사람을 가리킵니다. 악인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인격이 견실치 못한 사람이라면, 죄인(sinner)은 삶의 목적과 방향이 빗나간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대담하게 죄를 짓습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죄인의 길에서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의 행동에 발을 맞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사는 것을 말합니다. 죄인들은 모든 문제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니이체는 2차 대전의 참상을 겪은 후에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초인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인간적인 말만 하다가 미치광이가 되어 죽었습니다. 또20세기의 지성을 자랑하던 싸르뜨르는 니이체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 니이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지만 싸르뜨르는 "신은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은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빼앗아 가는 원수이기 때문에 철저히 거부하고, 대적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계약 결혼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이 창설하신 가정을 파괴하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요즘 구라파에서는 정식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구가 자꾸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떤나라에서는 아기를 낳으면 1년 휴가를 주고, 남편까지고 휴가를 준다고 합니다. 그래도 아기를 낳지 않습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절대로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또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the scornful) 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를 넘어서 조소하는 단계에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비웃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업신여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스스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나 결국은 우준하게 되어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이 될 뿐입니다(롬1:22,23).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절대로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며 다만 그를 섬깁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목자의 삶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선교사의 삶이얼마나 축복됩니까? 그러나 오만한 자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어리석은 자야말로 평신도 목자요, 선교사들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다가 가끔 눈이 뒤집힐 때가 있습니다. 믿음을 잃고, 오만한 자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 볼 때 예수 믿는 자신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둘째,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자 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죄악을 멀리할 뿐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인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들과 하나님을 조롱하는 오만한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신자들은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만 뜨면 악인의 꾀를 보고 듣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의 길에 서게되고, 오만한 자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앉게 됩니다. 그러므로 소극적인 신앙 생활로서는 절대로 죄악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오직" 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복 있는 사람이 절대적인 자세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자' 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는 것은 인생의 낙을 오직 하나님과 그 말씀 가운데서만 찾는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율법이 심히 부담이 됩니다. 말씀을 주면 인상을 쓰며, 완악한 마음으로 대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합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어떻게 즐거워 합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고 했습니다.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의 뜻을 되새기며, 입 속으로 중얼거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그 말씀에 취해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내어 읽게 된다는 것입니다. NIV에는 "meditate inthe law of God"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묵상하고,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반복하여 명상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어두워진 마음을 밝혀주시고,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실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령께서 놀라운 영적 비밀을 깨우쳐 주십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말씀의 능력을 덧입혀 주십니다. 그래서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또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희망찬 하루를 계획합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루를 반성하며, 세상 죄악에 물든 마음을 눈물로 회개합니다. 이런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를 어디에 비유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그 잎사귀 가마르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자라고 열매 맺는데 필요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토질이 좋지 않습니다. 사막과 같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물이 넉넉한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행복한 나무는 없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냇물에 뿌리를 담그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풍족한 생명수를 공급받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잎이 푸르고 싱싱합니다. 또 철 따라 탐스러운 과실을 맺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생명수가 철철 넘치는 시냇물에 그 인생의 뿌리를 담그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삶의 지혜와 용기와 새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는 아직도 불신시절에 가졌던 악인의 꾀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또 죄인의 길에서고, 오만한 자리에 않고 싶은 유혹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인의 꾀를좇아 옛 습성대로 살기 쉽습니다. 또 순간 순간 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든 유혹을 이기고 열매 맺는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후 가장 먼저 주신 훈련이 일용할 양식을 먹는 훈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끌어내어 낮추시고, 주리게 하신후에 40년동안 날마다 만나를 거두어 먹게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중을 알게 하려 함이라(신 8:3).
 
" 이스라엘이 노예로 살 때는 떡으로만 살았습니다. 말씀이 필요 없었습니다. 빵만 있으면 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가 된 그들에게는 빵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날마다 만나를 거두게 하시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말씀을 준행하는 생활을 가르치신것 입니다(출16:4). 또 신명기 6:6-9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손목에 메고미간에 붙이고, 온 집안에 붙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모든 삶이 말씀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매일 아침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며 일용할 영의 양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기 위함입니다. 또 우리가 매주 한 편의 소감을 진실한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도 생명의 말씀에 우리의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한 작업입니다.
 
II. 바람에 나는 겨(4-6)
4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기자는 악은 바람에 나는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악인은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습니다. 자기 꾀를 좇아 삽니다. 진리의 길에서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서 온갖 범죄를 일삼습니다. 또 그 마음이 교만하여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건한 자들을 비웃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인 것처럼 우쭐거립니다. 또 이들은 일시적으로 부요하게 되어 떵떵거리며 권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악인들을 조금도 부러워해서는 안됩니다. 대구에는 몇년 전에 총알 택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안동까지 승객들을 총알같이 태워 주고, 많은 돈을 요구하는 택시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기사들이 2시간만에 태워 주는데 이분들은 속도 위반을 해서 1시간만에 태워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3년만에 큰 저택을 살만큼 떼돈을 벌었습니다. 그들은 30대초반에 인생의 기반을 튼튼히 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운전 기사들이몹시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5년 후 조사를 해 보니 그 운전기사들이 다 죽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악인들은 강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약한 자들이요, 가장 안정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불안정한 자들입니다. 겨는 작은 바람이 불어도 날립니다. 겨는 뿌리가 없습니다. 생명도 없습니다.
 
열매도 없는속이 텅 빈 쭉정이에 불과합니다. 겨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땔감이 될 뿐입니다. 이처럼 악인들도 바람에 나는겨와 같이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변덕스럽습니다. 열매 없는 생활이 무의미하고 공허합니다. 이들의 결국이 어떠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 악인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십니다. 열매 맺는 나무와 그렇지 못한나무를 가려 내십니다. 겉으로 아무리 화려하게 꾸밀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그 중심을 보십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합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그러므로 죄인들은 결단코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6절을보십시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안전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결코 인정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어떤 형제는 중간고사 시험을 치고 문제에 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컨닝을 해서 답안지를 다 써 넣었는데 자기 혼자만 신앙 양심에 거리껴서 그렇게하지 못했습니다. 정당한 실력으로 하면 남보다 나은 점수를 딸 수 있는데 거꾸로 된 경우 화가 납니다. 다윗도 믿음으로 살다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어찌하여 악인이 큰 소리치도록 내 버려 두시는가 하며 항의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오랜 신앙 생활을 통해서 깨달은 바가 무엇입니까? 악인의 길은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늘 푸르며, 때를 따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일용할 양식과 주 한편의 소감을 진실하게 감당하므로 진리의 말씀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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