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강해(마5:1~16) > 성도양육

성도양육

성도말씀

성도양육


팔복강해(마5:1~16)

페이지 정보

조회4,278회 작성일13-06-22 08:18

본문

마태복음 5-7장은 산상보훈의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은 교리나 율법이 아니라 천국 시민들이 실천해야 할 행동 규범으로 천국의 대헌장(Magna Charta)이라 고 합니 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중에서 어떤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가를 밝혀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천국 시민들이 가져야 할 성품이 어떠해야 하며, 천국 시민 들이 누릴 수 있는 지고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천 국 시민으로서 자질을 덧입고, 참 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복 있는 자 (5:1-12)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이 산은 이곳에서 팔복을 말씀하셨다고 하여 팔복산이라고 부릅니다. 이 산에는 아주 완만하고 넓은 평지가 있었습니다. 팔복산에는 봄이 되면 여기 저기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산밑에는 갈릴리 호수가 그림같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 앞에 나왔습 니다.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제일 먼저 천국 시민들이 누리는 8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아, 최고의 행복이로다!" 하는 감탄문으로서 지고의 행복(the supremely happy)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행복이라고 하면 '5복'을 생각합니다. 5복은 첫째는 오래 사는 것(壽)입니다.
 
둘째는 부자가 되는 것(富)입니다. 셋째는 몸 건강하고 마음 편한 것(康寧) 입니다. 넷째는 명예를 얻는 것(攸好德)이요, 다섯째는 천수를 누리고 잘 죽는 것(考終命)입 니다. 이는 모두 물질적이고, 외적이고, 일시적인 행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 씀하신 8복은 신령한 행복이요, 내적이며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행복 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3)
예수님은 제일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3). '가난하다'는 말은 '굽신거린다'는 뜻으로 굽실거리는 거지처럼 가난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 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신이 영적으로 얼마나 가난하고 비천한 자인가를 깨닫고, 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께 굽신거리며 도움을 간청하는 사람입니다. 천국 이 현재적으로 "저희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이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자신이 개와 같은 이방인으로서 도무지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을 수 없는 비천한 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고자 하는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믿음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마 15:28). 이처럼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신령한 나라입니다. 심령을 가난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리는 근본 바탕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심령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심령이 부요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입에서 토하여 내치십니다(계 3:16).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 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더욱 자신이 얼마나 비천하고 가난한 자인가를 깨닫고 겸손 히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4)
4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애통하며 우는 자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 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애통한다는것은 자기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며 우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야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 습니다. 다윗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잠시 정욕에 눈이 어두워 우리아의 아내 와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이 죄를 감추려 하다가 그녀의 남편까지 살해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무서운 죄의식에 시달리며 뼈가 쇠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시 32:3,4). 그러던 중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받고 모든 죄를 토설하고 애통하며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죄를 인하여 슬퍼하며, 밤마다 침상이 젖도록 울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 이다"(시 6:6)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죄를 회개하고, 애통하는 다윗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위로하사 솔로몬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그 행복을 노래했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롬 4:7,8)
 
이처럼 애통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고후 1:3).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 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나오는 자를 결코 멸시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66:2 에도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을 권고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를 애통하여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를 위로하시고, 사죄의 은혜와 기쁨이 충만케 하십니다. 누가복음18장에는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세리의 비유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앞에 자기를 자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18:13)
 
결국 애통하며 회개한 세리는 의롭다 함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세리의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 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는 생활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를 죄로 여기지 않는 극도로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떨며 자기 죄를 인하여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양떼들의 죄악을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죄를 회개하고, 애통함으로 위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온유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5)
5절을 보십시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 이요" 온유라는 말은 잘 길들여진 말의 성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야생말은 몹시 사납습니다. 그러나 잘 길들이면 주인의 뜻에 절대 복종하며, 유순해집니다. 이렇게 길들여진 말의 성품을 온유라고 합니다. 이처럼 온유란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며 사 람들을 겸손히 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온유한 성품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형성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갈 5:23). 성경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온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 그러나 모세가 처음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교만했고, 혈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자기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모래 속에 파묻어 버렸습니다(출2:12). 그러나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치는 훈련을 통해서 그는 아주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요, 모든 대적하는자들을 온유함으로 섬기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온유한 자가 누리는 행복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여러 차례 우물을 빼앗겼 습니다. 당시 에 목축하는 자들에게는 우물이 가장 큰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비멜렉 이 우물을 탐낼 때 싸우지 않고 양보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또 다른 우물 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아비멜렉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삭을 찾아와 화 친을 청하며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희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창26:28). " 결국 이삭은 온유함으로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아비멜렉을 친구로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8).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셨지 만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실 만큼 죄인들을 온유함으로 섬기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겸손히 배울 때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본래 아주 잔 인하고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가담하였고, 살기 등등하여 기독교도들을 진멸코자 혈안이 되었습니다(행 9:12). 그러나 그는 부활의 주님께서 길이 참으심으로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은 유모와 같이 온유한 자로 변했습니다(살전 3:7). 눈물과 겸손으로 양떼들을 섬겼습니다(행 20:19,31). 그리하였을 때 그는 가는 곳마다 많은 동역자들을 얻었으며, 세계 선교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 보면 사납고 난폭한 자들이 땅을 다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온유한 자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들의 편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유한 성품을 덧입어 많은 동역자들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땅에서 넓은 땅을 차지할 뿐 아니라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할 수 있기를 기 도합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습니다 (6)
 
6절을 보십시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 이요"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사모하고 갈급한 마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란 의로우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 42:1)
 
이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기 위해 목마른 사 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헐떡거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자는 영혼의 참된 만족을 얻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게 되기 때 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는 가운데 구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생수가 되십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인간적인 사랑과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질과 세상 것에 목말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식에 목말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들은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목마를 뿐입니다. 그러 므로 우리가 정말로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 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유지하는데 신앙 생활의 비중 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신앙 생활의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위하여 주리고 목말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어찌하든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했습니다. 그리하였을 때 그의 영혼은 항상 만족하였고, 기쁨이 충만한 목자요, 선교사 생활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7)
7절을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불쌍히 여겨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과 비참함을 자기의 것으로 영접하고, 그를 불행에서 구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소유한 자입니다.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로 인해 고통 중에 있을 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를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엡 4:32). 서로 불쌍히 여기 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장벽을 넘어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 다. 부부지간에도 서로 불쌍히 여기면 모든 문제가 눈 녹듯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남을 불쌍히 여길 때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엄격합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둔 동관처럼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마18:27,28). 이런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긍휼을 행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 휼이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약 2:13)"고 했습니다. 공의로우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이 없는 심판을 내리신다면 참으로 무서운 심판이 될 것 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불쌍히 여 기셨는가를 늘 기억하며 남을 불쌍히 여기는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8)
8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 이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정직하고 사욕이 없는 사람, 위선이 없고, 두 마음(double-minded)을 품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약 4:8). 이처럼 마음이 청결한 자 는 하나님을 봅니다.
 
마음은 우리 눈의 수정체와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수정체가 맑아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진실하고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사람은 백내장에 걸린 사람처럼 영적인 수정체가 흐려져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들은 항상 두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온갖 세 상 염려와 불신에 시달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의 청결을 유지해야 합 니다. 우리가 마음을 청결케 하려면 우리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로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해 주십니다(요일 1:9).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9)
9절을 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를 사랑하고 언제 어디서나 만들어 내는 사람, 곧 피스매이커(peace maker)입니다. 이런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 는 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화목케 하기위해 자신을 희생 시켰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전 5:18). 우리가 화평케 하는 직분을 감당하려면 예수님과 같이 많은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기까지는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화목케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화평케하는 자는 어디서나 환영을 받습니다. 이런 자는 참으로 행복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좌충우돌 하는 트라블매이커 (trouble maker)가 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자기 것을 조금도 희생하려 하지 않는 곳에 항상 싸움이 있고, 상처가 있고, 고통과 번뇌가 있습니다.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10-12)
10절을 보십시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버림받을 때 참으로 슬프고 괴롭습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불행한 사람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통해서 마음에 남아 있는 불순물이 없어지고, 우리의 믿음이 정금과 같이 연단되기 때문입니다. 또 핍박을 통해서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에 산 소망을 두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11,12 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욕을 얻어 먹어야 합니다. 억울하게 핍박을 받습니다. 또 사람들이 거짓으로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합니다. 이런 핍박을 받을 때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너희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 박하였느니라." 선지자들 의 공통점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의를 외치다가 잡혀 톱으로 켜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순교자 들에게 주어지는 상이 가장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지자들과 같이 핍박을 받게 되면 선지자들의 반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받을 때에 슬퍼 해서는 안됩니다. 또 타협하거나 일시적인 안정을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핍박을 감당해야 합니다.
 
Ⅱ. 세상의 소금과 빛 (5:13-16)
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 라."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가르쳐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냉장 고가 없었기 때문에 소금이 아주 귀했습니다. 소금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짠맛으로 음식물을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던 갈릴리 해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소금이 소중하였습니다. 그 뜨거운 지방에서 소금이 없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잡은 생선을 어떻게 썩지 않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소금이 그 짠 말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실제로 당시에는 맛 잃은 소금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사해 바다에서 소금처럼 결정체를 이루기는 하는데 짠맛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맛 잃은 소금은 버 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러므로 짠맛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짠맛은 무 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세상 죄악에 물들지 않고, 살아있는 양심을 소유한 자로서 부패한 세상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고, 옳게 살도록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바닷물은 3%의 염분으로 바다의 오염을 방지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자들은 세상에 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소금이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녹아야 합니다. 이는 자기 희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의 소금으로 서 세상의 부정과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살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그래서 좋은 영향력을 끼쳐서, 죄로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14절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 이요"라고 했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하는 것처럼 빛은 어두운 세 상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빛의 존재 목적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 8:12). 빛은 어둠을 밝히는 본질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비추어야 할 빛은 어떤 빛입니까?
 
16 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세상에 비추어야 할 빛은 우리의 아름다운 행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영적인 무지를 깨우치고,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야 합니다. 또 죄와 사망 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착한 행실로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소금과 빛의 삶은 바로 목자의 삶을 가리킴을 알수 있습니다.
 
결론. 진정한 행복이란 소유의 양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오래 살고 몸 건강한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가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을 소유하는 데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더라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자기 죄를 인하여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하는 자,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자기를 희생하며 진리를 좇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