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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2 : "애통한 자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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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743회 작성일13-06-2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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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물은 무슨 눈물입니까?
 
죄에 대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먼저,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루를 보내고 자신을 되돌아보면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자신안에 있는 죄와 허물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는 것, 이것이 애통입니다.
 
죄와 죽음에 얽매여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물질과 쾌락에 얽매여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눈물이 말라버린 목석 같은 우리를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울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 민족의 죄악과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울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죄악과 이웃들의 죄악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케 될 것입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 이 행복을 맛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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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원치 않게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했던 연인과의 실연의 아픔도 크고,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사기당했을 때의 아픔도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 가장 사랑한 사람을 갑작스런 사고로 잃어버려야 하는 아픔은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들이 없을 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눈물이 없는 삶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쾌락위의 생활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돈을 벌고, 정권을 잡고,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도 우는 것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물이 있는 자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물은 무슨 눈물입니까? 죄에 대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먼저,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루를 보내고 자신을 되돌아 보면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자신 안에 있는 죄와 허물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는 것, 이것이 애통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애통을 알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는 하나님앞에서 선을 행하고 싶어도 행할 능력이 없고, 또 행하는 것마다 원치 않게 죄를 짓는 자신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바울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졌습니다.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 보다는 들켰느냐, 안 들켰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형무소에 가 있는 사람들은 들킨 죄인들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안 들킨 죄인들일 뿐입니다. 들킨 사람은 죄인이지만 안 들킨 사람은 의인이요 애국자가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식으로 합리화를 해도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양심의 소리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양심의 소리까지도 듣지 않고자 쾌락에 취해 잊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안을 위한 선교사였던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침 기도 시간에 내 영혼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내 속에 있는 악과 타락을 목격하고 나는 깊이 울었다." 자기 죄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 이 행복을 맛보지 않겠습니까!
 
다음으로,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나 국가와 민족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의 죄를 볼 때, 무관심 하거나 냉소적이 되거나 격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즘 메스컴은 [현철이 비리]사건 폭로로 격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소리를 들어보면, '나는 잘못이 없는데, 이렇게 된 것은 다 너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현철이 때문에 경제가 이렇게 되었고, 정치가 이 모양이 되었다.' 학교 문제에 있어서도 이런 입장은 마찬가지입니다. '장 이사장 때문에 학교가 이렇게 되었다.'
 
모두들 의인의 심정이 가득하여 '나 때문에'라는 말은 듣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인들은 시대의 죄악을 보면서, 캠퍼스의 문제를 보면서 나의 죄악을 보는 것처럼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진정한 기독인들은 신문을 읽으며 핏대를 올릴 것이 아니라 애통해야 합니다. 캠퍼스 학우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자'할 때 우리는 그들로 인해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너 때문이야'하며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할 때, 우리 기독인들은 '나 때문이야'를 외치며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이런 자에게 임하는 축복을 보십시오. "애통하는 자가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렇게 애통하는 자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옵니다. 시편 126:5-6은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계시록 7:17도 말씀합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러라." 사람의 위로는 그냥 안위해 주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는 감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힘이 되어 주시고, 용기가 되어 주시고, 지혜가 되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난관이라도 극복할 수 있게 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약한 사람뿐만 아니라 강한 사람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항상 남을 잘 위로해 주는 사람에게도 필요합니다. 저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 위로는 자신의 죄와 타인과 세상의 죄에 대해서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기독인들은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병든 사람은 아닙니다. 심각한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는 거룩한 기쁨을 즐거워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나오고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울고 싶어도 울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슴은 차디차졌고, 모든 것에 냉소적이요 비판적으로 되어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울 수 없는 마음을 울어야 합니다. 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면과 인격이 성숙해지는 점도 없지는 않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눈물을 잃어간다는 것입니다. 지난 날 저의 삶을 생각해 보면 이런 저런 사연들로 인해 눈물을 많이 흘렀습니다.
 
물론 그 눈물 속에는 연민의 정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의 죄로 인해 마음 아파하고, 양육자들과 사회의 죄로 인해 잠을 못 이루었던 적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갓 추억거리로 여기며 '다 그런거지 뭐. 나도 옛날에는 그랬잖아.'하며 목석 같은 사내가 되어버린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고 자신이 얼마나 굳어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시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애통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애통해 하시고 눈물을 흘리셨 습니다. 죄와 죽음에 얽매여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물질과 쾌락에 얽매여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눈물이 말라 버린 목석 같은 우리를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눈믈을 흘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울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 민족의 죄악과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울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죄악과 이웃들의 죄악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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